〈 267화 〉 아폴론을 패고, 아르테미스를 따먹고, 헤라의 젖을 빤다.
* * *
'무기 교체를 오래 안 하긴 했지.'
곤봉도 초반에 얻은 거였고, 붓검은 뒤늦게 얻었지만 무기 자체가 나온 시점은 초반이었다.
성검이 그나마 후반부에 얻은 무기라고 할 수 있었지만 마족 한정 깡패 무기여서 범용적으로 두루 좋은 무기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극 초반에 스토리를 많이 앞당겨서 버틸 수 있었던 거지.'
주인공의 여자를 뺏는 백태양의 역할 특성상 당연히 초반에 압도적인 강함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딱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색다른 계기 중 하나일 백태양.
그런 운명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인 백태양은 반대로 생각하면 초반 스노우볼을 굴리기 아주 쉬웠다.
예전부터 강조했던 거지만 백태양은 김민수와 출발선이 아예 달랐다.
명확한 성장치의 한계가 있을 뿐.
초반에 한해선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악역으로 설정이 되어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만약에 그런 악역이 한계를 계속 부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을 한다면?
다른 역할을 맡은 애들이 제대로 된 성장을 하기도 전에 전부 박살 내며 정리하고 다닌다면?
그 만약의 경우를 모두 일으킨 게 바로 지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지 5개월도 안 되는 시점에 소설의 틀을 부수고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리며 신과 맞서는 상황.
이게 바로 내가 있는 현주소였다.
'하지만 이제 한계가 느껴져.'
강압은 신에게 먹히지 않고, 생명체라고 하여도 강압을 견딜 수 있는 자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상시 발동형 능력자란 것도 어느새 유야무야하게 된 지 오래였고 이젠 순수한 강함을 따지기 됐다.
이런 상황일수록 장비빨은 더더욱 중요하게 작용했다.
"헤파이토스는 모든 걸 만들 수 있다고 전해져요, 재료도 거의 다 있을 테고요."
걱정인 건 오랫동안 쉬었기 때문에 몸이 녹슬었단 건데 그 부분도 지금은 괜찮아요.
아테나는 확신에 가득 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왜? 지금은 괜찮다는 거야?"
이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아테나는 내 말을 듣자마자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올림푸스 신들의 무기를 한 번씩 다 점검했기 때문이죠. 사실 점검이라고 해봤자 녹을 떼내고 칼날을 갈아주는 것 정도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요컨대 몸을 풀만한 대상으로 이미 신들의 무구를 만들었으니 지금은 컨디션이 좋을 거란 이야기였다.
그들이 무장을 하는 게 나에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근데 헤파이토스가 순순히 내 말을 들어 줄까?"
"그건 저한테 맡기면 돼요, 그는 절 좋아하거든요."
"아."
아무렇지도 않게 감정을 이용하는 부탁을 할 거라는 아테나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처녀신으로 오랜 세월 동안 살았다가 사랑을 시작하게 돼서 그런지 굉장히 맹목적인 모습이었다.
사랑에 있어서 이 정도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신이 가질 수 있는 냉철함에 인간의 애정이 독처럼 퍼진 결과였다.
"근데 그렇게 쉽게 부탁을 들어 줄까?"
"그럼요. 그는 생각보다 단순하니까 주인님은 그냥 기척을 숨기시고 계시면 돼요."
그리고 숨기 전에 무슨 무기를 만들면 좋을지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방망이가 좋겠지.'
사실 검을 만들까 생각도 했지만 여러 번 사용해 본 결과 성검 하나면 되겠다는 결론이 나왔었다.
[당연하지! 나보다 좋은 검이란 건 없도다!]
메르피의 말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결국 돌고 돌아 가장 손에 익은 게 곤봉과 같은 방망이류였기 때문이다.
'재료는 붓검과 탐욕의 곤봉을 녹여서 새로 만드는 방식으로 하고'
사이즈는 지금 곤봉보다 조금 더 길고 두꺼운 형태.
이것저것 추가할까도 생각했지만 단순한 모양이 투박하고 휘두를 때 무게 중심도 맞았으니 굳이 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튜닝의 끝은 순정이니까.'
무기를 생각하며 아테나와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헤파이토스의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부분이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피부로 느껴졌는데, 정말 주변에 인기척이란 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침입이라고 하기도 뭐 하고 상황만 따지고 본다면 빈집털이 수준이었다.
깡!
깡!
깡!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귓가에 쇠가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신전에 가려면 아직 한참을 걸어야 할 것 같은데 벌써 저런 소리가 들리다니.
확실히 불과 대장장이의 신이어서 그런지 그 소리부터 스케일이 남달랐다.
"들리세요?"
"응."
"그럼 생각하신 무기,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종이로 가져가면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말로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 거예요."
"알겠어."
아테나는 금방 다녀올 테니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뒤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기척을 내고 다녀도 상관없어도 힘을 발휘해 속도를 올리는 순간 들킬테니 최대한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난 원래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인간이고, 아테나는 행방불명 상태로 취급 됐으니 올바른 판단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속도 내면서 다니고 싶은데 말이지.'
방심은 금물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할 게 없네.'
아테나가 떠나고 난 뒤 난 굉장히 심심해졌다.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져서 허전하다고 해야 하나.
[나으리! 저는요!]
[주인놈아! 나는!]
물론 소환수들이 있긴 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소환해서 하하 호호 떠들 만큼 여유로운 곳도 아니고 말이다.
'막상 곤봉이랑 붓검 없으니까 허전하네.'
쓰지 않더라도 원래 있었어야 할 무기가 없어지니 빈털터리가 된 기분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멀뚱멀뚱 서서 아테나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음?'
아주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조절을 한다고 패긴 했지만 혼신의 힘을 다 했기에 아직 퉁퉁 부어 있는 뺨.
갈비뼈를 으스러트리고 간에 정확히 주먹을 꽂았기에 제대로 피지 못 하는 허리.
로우킥을 찰 때 정확히 무릎 관절부 쪽을 차 절뚝거리는 다리까지.
'아폴론.'
놈은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걸어가며 헤파이토스 신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쟨 근데 왜 걸어가지?'
아테나 같은 경우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므로 걸었다지만 아폴론은 전혀 그럴 일유가 없었다.
아니, 정말 전에 했던 예상대로 뒤통수를 치기 위해 잠시 화친을 요구 했던 거라면 설명됐다.
'몰래 헤파이토스한테 접근해서 무기를 만들어달라고 할 생각인가 보네.'
그걸로 내 뒤통수를 칠 생각인 거고.
이제야 앞뒤가 딱딱 맞았다.
내 뒤통수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자리까지 노릴 생각이니 당연히 무기를 준비했다는 걸 신들에게 들켜선 안 되는 거겠지.
헤파이토스같은 경우엔 뭐 따로 입을 다물게 할 수단을 준비해 놨으니 찾아가는 거였고 말이다.
'어떻게 할까.'
선택지는 두 개였다.
이대로 놈이 가는걸 냅두고 나중에 뒤통수를 칠 때 제대로 반격을 하는 것.
이 방법은 아테나와 아폴론이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부분은 아테나가 잘 처리해 줄 거라 믿었다.
'나머지 하나는 그냥 여기서 바로 담구는 거지.'
근데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힘을 써야 하기에 위치가 들통 날 수 있다는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보조 퀘스트 같은 경우는 깨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올라갔다.
신들과 대놓고 적대를 하는 와중에 제우스의 여자를 어떻게 빼앗겠는가.
'아니지, 왜 이걸 걱정하지.'
퀘스트에 묶여 있을 땐 페널티가 사망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하나도 없는 지금 더 이상 퀘스트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얽매여야 한다고 해도 걸리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면 되는 문제 아니던가.
'아폴론을 잡고 아르테미스를 따먹고, 헤라의 젖을 빤다.'
목표 설정 완료.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계획의 첫 단추를 꿰기 위해 난 아폴론을 불렀다.
"야, 노랑 머리."
"누가 날 그렇게 감히 허물없이 불...응?"
아폴론은 집 앞에서 만났을 때 보이던 굽실거리던 모습을 다 지우고 아주 권위적으로 대답했다.
'누가'라고 해봤자 깨어난 신들이 얼마 되지 않은걸 알면서도 저런 태도라니.
놈이 평소에 어떤 생활 태도로 살아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상황 파악 필요 없지? 내가 여기 있는 순간 다 설명 되잖아."
"그게 무슨 소리인..."
"맞으면서 알게 될 거야."
쾅!
난 더 말할 시각은 필요 없다고 판단해 바로 아폴론에게 달려들었고.
타이밍 좋게 헤파이토스의 대장간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너도 아레스처럼 만들어 줄게."
난 내 뒤통수 치려고 한 놈 그냥 안 보내거든.
아폴론을 빠르게 정리하면 올림푸스 12신 중 남은 전투원은 정말로 소수만 남게 될 터.
이런 식으로 각개격파를 하는 게 오히려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인 올림푸스 정복기의 막이 지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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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그럼 저 혼자 가겠습니다!"
"...그래 말리지는 않으마, 하지만 절대 발키리는 데려가선 안 된다. 절대로!"
같은 시각 아스가르드.
토르는 깨어난 그 시점부터 계속해서 오딘에게 공격의 정당성을 알렸고.
마침내 오딘은 두 손두 발을 다 들었다.
온종일 24시간 내내 백태양을 쳐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아들놈을 도저히 억누를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위험한지도 말해줬고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말해줘도 똑같은 말만 반복하니 설득할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한 번 겪어보는 게 낫겠지.'
하지만 절대로 발키리를 끌고 가는 건 허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왕자인데, 혼자 가는 게 말이 되나.'
위엄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발키리는 조금 필요하지.
토르는 오딘이 무슨 생각하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위대한 천둥의 신이 하겠다는데 감히 누가 막겠는가.
'백태양을 친다.'
북유럽 신화가.
아니 거기서 오직 유일하게 토르만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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