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 나도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 * *
의문은 있었다.
강압이 먹히지 않는다면 생명체가 아니란 건데.
'그럼 처녀폭격기는?'
처녀폭격기와 강압은 발동 조건이 비슷하지만 묘하게 달랐다.
강압은 생명체에 한하지만 처녀폭격기는 이성에게만 적용 된다는 모호하게 다른 조건.
그렇기에 생명체 판정은 받지 않지만 이성의 모습은 가지고 있는 상대에겐 어떻게 적용될지 궁금했다.
생명체지만 이성이 아닌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메르피는 아예 날 적대하지 않으니 처녀 폭격기가 발동조차 안 했으니까.'
아레스를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아테나와 1:1 상황을 유도한 것도 그런 이유여서였다.
만약 처녀폭격기가 제대로 발동하지 않는다면 정말 2:1을 할 가능성이 생기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런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듯 처녀폭격기는 엄청난 성능을 자랑했다.
[처녀폭격기 발동! 처녀에게 절대로 패배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처녀를 맹세한 신이기에 효과가 더 증폭 됩니다!]
신에게도 적용되는 미친 듯한 효과는 아테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무슨 짓을 했지?"
"아무 짓도 안 했어, 너무 당연한 법칙이여서 그래."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증유의 힘에 그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활을 쏴도, 검을 휘둘러도, 힘을 방출해도 그 어떤 것도 닿지 못한다는 무기력함이 아테나를 휘감는다.
"당연한 법칙? 신이라도 된 듯 말하는군."
"그 부분에서 어떻게 보면 또 맞긴 해."
신이라.
굳이 따지자면 처녀 폭격의 신 정도 되지 않을까.
담당하는 분야가 아주 적고 극소수의 경우에만 적용이 되겠지만 지금 같은 경우엔 아주 강한 신.
'좋은데?'
시답잖은 생각하며 아테나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이렇게 느긋하게 접근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완벽한 절망을 선사해주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다가오면 나도 방금처럼 적당히 봐주지 않겠다."
"안 봐줘도 돼, 너 생각보다 되게 상황 판단이 느리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투구와 갑옷, 창과 아이기스의 방패.
그리고 늘 곁에 있다는 승리의 신 니케도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냐면.
'니케도 처녀니까.'
니케가 전투라는 상황을 승리로 이끄는 힘을 가졌다면 난 그 상황 이전에 처녀한테서 지지 않는다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싸우기도 전에 패배하지 않기에 니케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난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아테나는 포기할 법한도 한 상황에서 끝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사파이어빛 머리칼이 파도처럼 요동치며 힘을 쓰겠다는 걸 대놓고 알린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다는 걸 직감해 큰 걸 날리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어느 부분은 신화에 나온 것과 비슷하네.'
승부욕이 강하다고 나와 있는 부분은 옛날 만화책에서 봤던 내용 그대로였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갔을 때 항상 승리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겠다는 의지.
그런 게 아테나의 눈동자에 깃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날 만나기 전이었잖아."
난 그런 계획을 박살 내는데 이골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김민수의 헛짓거리와 안뚱땡의 개수작, 안비실의 찌질한 외침 등등.
굵직한 애들을 여러 번 대화로 치료하며 해결해온 내가 여기서 지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툭 툭.
가볍게 땅을 발로 차 아테나와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다.
적당히 가지고 놀려다가 눕히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의지가 너무 강해 조금 대화할 필요를 느꼈다.
"포기를 하는 것도 때론 이기는 거야."
"그런 핑계를 내가 몇 번이나 들어왔을 것 같은가. 난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승리를 쟁취했다."
깡!
성검과 창이 맞닿자마자 아레스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창날을 돌리며 품으로 파고드는 간단한 기교조차 통하지 않는다.
아니, 기교를 부리기도 전에 기본적인 힘에서부터 밀려 아테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
"분명 내가 아레스보다 강할 텐데, 왜 반격조차 못 하지 그런 생각 하고 있어?"
아테나의 의지를 부러트리기 위해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는다.
"넌 절대로 날 이길 수 없어."
사형 선고처럼 말을 내뱉으며 아테나를 사방으로 압박한다.
무기를 맞부딪칠 때마다 그녀의 손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떨린다.
그리 많은 공방을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벌써 지친 기색이 보일 정도였다.
"그만 포기하고 여기서 멈춰, 아레스도 없는데 네가 여기서 혼자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비겁한 자식!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대사가 어째 좀 바뀐 것 같은데.
지상으로 침략하려고 내려온 신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니 억울했다.
상황이 이래서 그렇지 신들을 막으려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건 나였다.
'저 얼굴로 얼굴에 흙먼지 덮으면서 억울해하니까 내가 가해잔 줄 알았네.'
외모가 깡패라고.
샤엘이 색기가 있어 보이는 쪽으로 최고였다면 아테나는 망가트리고 싶은 얼굴 쪽으로 최고였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이미 주저앉아서 숨을 거칠게 내뱉고 있는 게.
없던 취향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누가 비겁한 지 모르겠네, 게이트도 숨겨 놓고... 그러고 나서 패색이 짙어지니까 이렇게 화내는 거 보기 안 좋아."
쾅!
아테나는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일단 온순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상대를 설득시켜야 할 땐 항상 훌륭한 대화 수단을 준비하는 게 중요했다.
"웁...욱...흐읍...!"
쾅! 쾅! 쾅!
복부, 복부, 복부.
대장장이가 철을 단조하듯.
나 또한 아테나의 머리칼을 단단히 붙잡고 그녀의 배를 망치질한다.
힘의 방출도, 그렇게 자랑하던 천벌도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계속 이 상태가 지속 될 것 같은 공포.
아테나는 드디어 내 애정 어린 대화를 듣고 설득 됐는지 살벌했던 눈매가 순하게 죽어 있었다.
"그만...그만...해..."
"말이 짧다."
안비실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애들은 대체 얼마를 때려야 불리한 상황에서 말을 높이는 걸까.
분명히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도 말을 놓지 않는다는 건 뭔가 믿는 수단이 있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믿고 버틸 수 있는 게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지, 딱 하나 있구나.'
그거라면 충분히 이 정도 불리한 상황은 견딜 수 있겠구나.
'그럼 그렇게 한 번 하게 해 줘야지.'
난 아테나의 심리를 파악하고 일부러 머리칼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누가 봐도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해서 방심하고 있다고 알 수 있게.
노골적인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아테나는 지속된 폭력에 판단이 흐려졌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됐다.
"다음..번...엔... 이런.. 일 없을...거다..."
그 말을 끝으로 올림푸스로 도망가려는지 그녀의 몸에 범접할 수 없는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빛은 하나의 장막처럼 아테나를 보호하고, 그녀를 올림푸스로 천천히 끌어당기고 있었다.
"오늘은 잊지 않겠다 백태양."
비상 탈출 수단을 발동한 아테나가 미래를 기약하며 올림푸스로 도망치려는 그 순간.
덥썩.
아테나의 발목을 대수롭지 않게 잡았다.
"...무슨?!"
경악으로 물든 그녀에게 눈짓으로 내 발을 가리켰다.
"헤르메스의 신발을 네가 어째서...?"
"빌렸어."
그 말을 내뱉으며 발목을 잡은 손을 밑으로 쭉 내려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역시 이거였네.'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뭔가 있다는 게 분명했고.
난 그게 올림푸스로 도망치는 거라 확신했다.
왜냐면 지금 당장은 이렇다 할 수가 없으니 미래를 기약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똑같이 말해 줄게."
나도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테나의 빛나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절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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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바로 나서지 않는 겁니까 아버님!"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신들의 고향 아스가르드.
그곳은 지금 토르와 오딘의 언쟁으로 인해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통치하자는 게 아니라 미드가르드로 잠시 가서 누가 돌아왔고! 누가 이 땅을 지켜 줄 건지를 알려주는데도 거절하시다뇨!"
쾅!
토르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천둥 번개가 치며 주변 사물을 파괴하려 했고.
그때마다 오딘은 손을 저으며 그의 번개를 막아 냈다.
"인간들은 더 이상 누군가의 통치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건 그 이전의 문제라고 했을 텐데."
"대체 그게 무슨 문제란 말입니까!"
"토르야. 넌 정말로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냐? 신이 죽었다."
"예?"
"섣불리 움직이다간 모두 죽는다."
토르는 오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이 인간을 겁낼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오딘은 그런 토르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 정렬해 있는 발키리들을 쳐다 봤다.
'발키리들은 모두 처녀다.'
단 한 명에 의해 수많은 발키리들이 아무런 힘도 못 쓴다면.
토르는, 아니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믿을 수 있을까?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이었기에 오딘은 악역을 자처하며 미드가르드로 가는걸 반대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멀쩡한 발키리들을 모두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