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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여친쩔더라-257화 (257/325)

〈 257화 〉 해보라고.

* * *

아테나는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레스가 소멸 당하는 것도 모자라 인간에게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하기만 해야 하다니.

심지어 올림푸스로 이동하는 것조차 중간에 개입해서 막을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니케도 힘을 쓰지 못하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해야 하는 건가?'

무슨 힘을 쓰는 지조차 제대로 알 지 못 하는 존재에게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패배해야 하다니.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반항할 의지조차 잃은 상태였다.

본래 가지고 있던 미칠 듯한 승부욕도 압도적인 불가항력 앞에선 타오르지 않았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다 들리네."

"뭐?"

"말 짧다고 했지."

"..."

지금, 이 상황에서 말을 짧게 하고 길게 하고가 의미가 있는 걸까.

아테나가 인간성을 가졌다고 해도 어디까지 신의 기준이었기고 인간의 문화와는 전혀 상관없었기에.

그녀는 인간, 그것도 K­유교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완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날 이제 어떻게 할 생, 아니 절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해가 없다고 해도 상황 파악은 할 수 있는 법.

아테나는 일단 최대한 백태양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사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상황 파악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바짝 엎드리는 것뿐.

인간에게 굴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게 자존심에 많은 금이 갔으나 어쩔 수 없었다.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몸소 체험해서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세울 줄 알았다.

"진심으로 항복할 테니 포로로서의 예우를 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테나는 지금 내뱉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발언과 태도로 백태양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리 신과 인간이 다르다고 해도 전쟁의 기본은 바뀌지 않았을 거다.'

패전을 겪었다고 해서 모든 게 소멸되는 게 아니었다.

포로의 대우를 받으며 기다리고 있으면 올림푸스 신들이 분명 지원해줄 터.

하지만.

"포로? 예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왜 그걸 해 줘야 되는데?"

백태양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자였다.

신경을 쓴다고 해도 아테나가 생각하는 예우와 백태양의 예우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전쟁의 신으로서 죽고 죽이는 시대에 살고 왔던 아테나와.

처녀 폭격 대화 치료사의 상식엔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틈이 존재했다.

"일단 벗어봐."

"그게 무슨 소,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들어 놓고 무슨 소리야, 벗으라니까?"

상식 밖의 대화.

아테나는 자신이 힘을 잃었던 사이에 대체 인간들의 상식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제대로 감지 하지 못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를 지나 인간의 각성 그리고 게이트와 던전의 존재 자체를 아직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옷을 벗긴다고 하여도 감옥 같은 장소로 이동을 시켜서 벗기는 게 당연한 것이었거늘.

백태양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얜 왜 빨리 안 벗지?'라는 눈으로 아테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테나는 억울한 마음도 있었고 항변하고 싶은 의지도 있었지만 백태양의 주먹을 한 번 쳐다보고 바로 포기했다.

전쟁의 신이기에 폭력의 전조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힘의 규율에 따라 아테나는 아이기스의 방패와 창 그리고 갑옷과 투구를 모두 벗었다.

'전장에서 옷을 벗다니.'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그것도 스스로 하는 게 아닌 남이 시켜서 해야 하다니.

뿐만 아니라 포로의 예우조차 지켜지지 않으며 처녀를 맹세하며 고결한 순결을 다짐했건만.

'남자 앞에서...'

아테나는 갑옷만 벗었을 뿐인데 알몸이 된 것 같은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어차피 자신을 이송시키려면 게이트 밖으로 일단 나가긴 해야 할 터.

그 틈을 이용해 빠져나간다면 가능성을 엿 볼 수 있었다.

"아테나,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고 했잖아."

물론 백태양이 그걸 눈치채지 못 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는 이미 아테나의 머리를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였다.

안뚱땡과 안비실 그리고 김민수에게 다져진 눈치는 인간 사회에 어수룩한 신의 속셈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러나 지금 백태양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근데 왜 안 벗어?"

어차피 발버둥을 쳐봤자 이미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에 불과한 아테나가 뭘 하든.

백태양이 지금 가장 거슬리는 건 아테나가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안 벗다뇨...? 다 벗었습니다."

아테나는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백태양을 바라봤다.

갑옷과 투구도 벗고 창과 방패도 내려놨는데 여기서 뭘 더 벗으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아테나에게 백태양은 솔로몬처럼 완벽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직 옷을 입고 있잖아, 다 벗으란 말이 뭔지 몰라?"

알몸이 되라는 거잖아.

사형집행인의 칼날처럼 툭 떨어지는 그의 말을 아테나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 그대로야."

백태양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그 태도에 아테나는 절망했다.

'다 벗으란 말인가? 정말로 알몸을 원하고 있다고?'

야만인의 시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실제로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적어도 그녀가 주도하는 전쟁엔 질서란 게 있었으며 합당한 마무리라는 게 존재했다.

모든 걸 파멸로 몰아넣는 재앙이 아닌 승리의 빛으로 모든 걸 다시 정리하는 승자의 질서.

아테나는 그 질서에서도 늘 정도와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 많은 자들에게 추앙을 받아왔었다.

긍지.

그녀는 그 누구보다 신에 대한 긍지가 강했으며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자였다.

패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할 수 있는 승자의 태도.

그런 걸 생각했던 그녀가 알몸을 요구하는 남자의 단 한 마디에 무너졌다.

"알몸을 봐서 어쩌실 생각이신지..."

"그냥 빨리하자, 어차피 해야 될 일이잖아."

"..."

콜로세움을 비추는 강렬한 햇빛도 지금 상황을 밝게 만들지 못한다.

아니, 오직 이 남자 앞에 있으니 모든 빛이 사라지고 그늘 속에 가둬진 느낌이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복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툭.

외간 남자 앞에서.

툭.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었던.

툭.

아테나의 새하얀 나신이.

스륵.

모습을 드러낸다.

"큭..."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아테나는 자존심이 뜯겨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살점에 붙어 있던 것과도 같은 천들이 하나씩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햇빛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음에도 백태양의 그림자는 너무 넓은 감옥 같았다.

선녀가 벗어 놓은 날개옷처럼.

아테나는 옷을 곱게 접어 천 하나만을 바닥에 깔고 백태양의 발치 앞에 내려놨다.

치욕에 물들어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노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감정을 숨기려고 해도 주머니에 넣은 송곳처럼 뚝 뚝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다...다 벗었습니다..."

"그러네."

전장에 있었을 땐 바라 못지 않던 시원한 바람이 사타구니 사이를 흝고 지날 때마다 몸이 떨린다.

몸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이렇게 차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아테나는 머리칼을 앞으로 다 내놓아 최대한 유두와 보지를 가릴려 애를 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옷 삼아 가렸음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칼을 흩트리며 젖꼭지와 조갯살을 여지 없이 드러낸다.

"이제 내가 너한테 뭘 시킬 것 같아?"

"네?"

"아니 그렇잖아, 여기까지 했으면 내가 널 그냥 벗겼을 리 없다는 걸 눈치챘잖아."

백태양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테나는 자기 깊은 곳에서 끝도 없이 외쳤던 처녀성의 경고를 드디어 들을 수 있었다.

도망치라고, 뒤도 보지 않고 꽁무니를 빼야 한다는 그 말을 왜 지금 들었을까.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결국 오만을 불러왔고, 눈앞의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음에도 이 남자는 더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포로의 예우는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아무리 상대가 신일 지라도 패자를 장난감으로밖에 보지 않는 무정함.

'...어쩌면 우린 건들면 안 될 존재를 건든 게 아닐까.'

제우스가 처음에 오딘에게 함께 지구를 침략하자고 했을 당시.

오딘은 여러 핑계를 대면서 거절 했다.

이상한 느낌이 든다면서, 네가 먼저 보여주면 그 뒤를 따르겠다면서.

그땐 모두 아스가르드를 겁쟁이라고 욕하고 멸시했지만, 그게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를.

그녀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더 해야 하는 지... 부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끌자.

조금이라도 더 뭔가 구실을 만들자.

'여인에게 대놓고 야한 짓을 요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지.'

아테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도덕 관념을 다시 한번 더 믿었다.

어찌 사내가 여인한테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할 수 있겠는가.

강함의 상징이자 승자라면 당당히 갈취 하는 게 옳았다.

아니, 옳다고 믿고 싶었다.

"아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구나?"

자위해.

"...?"

그 말 한마디가 단두대처럼 아테나의 희망과 모든 기대를 싹둑 도려 냈다.

그녀는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들며 백태양과 눈을 마주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진심이냐고 묻는 눈빛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위 해 보라고."

해가 점점 저물며 백태양의 그림자가 커져간다.

아테나를 담는 걸 넘어 검은 마수가 뻗쳐나가듯 그녀의 주위를 잠식해간다.

'이 남자는 날 지배하려고 하는구나.'

찬란하게 빛나던 사파이어빛 머리칼이 서서히 빛을 잃어간다.

오늘을 잊지 못한다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이해 되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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