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557화 (556/800)

557회

142일차 어감이라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똑같은 대상을 지징하는 말이라도 표현과 어감에서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고, 그게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병'같은 표현이라면 더더욱 거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발정과 성욕의 폭발로 성기능이 향상되는 것은 똑같지만, 그걸 병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축복이라고 표현하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지."

인간들은 발정에 따른 성기능 강화에 대해 <색수병>이라는, 질병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하지만 이게 병이 아니라 하나의 '성장통'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건 병이 아니라 인간들이 응당 겪어야 하는 축복이자 성장과정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성장통이랑 다를 게 없지. 아아, 3차 성징이라고 하는 것이다. 크흐흐, 다 큰 성인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2차 성징 시기에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부분을 한 번 더 자라게 해주는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지."

없는 자에게는 소유에 대한 기쁨을.

가진 자에게는 더욱 풍성해지는 기쁨을.

누구보다 많이 가진 자에게는 남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의 기쁨을.

"솔직히 인간 놈들 중에 자기 자지가 길어지고, 가슴 커지는 걸로 싫다고 하는 놈들은 없을 걸?"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무언가다.

"아아, 나는 이 현상을 <에스트라스>라고 부르겠노라."

Estrus. 영어로 발정기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는 알파벳 하나를 바꿨을 뿐이다.

"뭔가 있어보이는 고유명사로 영어만큼 그럴 듯 한 게 또 없지. 아아,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의 변화인 것이다."

색수병, 에스트라스는 병이 아니다.

성욕의 여신이 내려주는 은총인 것이다.

* * *

메어리의 말에 모험가들은 침묵했다.

에스트라스라고 하는 현상에 대해, 그들은 단 하나의 증상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플과 모험가들은 눈빛으로 서로의 뜻을 주고받았다.

- 그거, 색수병 아니야?

- 맞는 것 같은데.

- 이런 이상한 곳에서 발정해서 미쳐버리라고? 안 돼. 위험해.

- 근데 성검의 용사가 저렇게 증명하고 있잖아.

만약. 색수병-아니 에스트라스 현상으로 인해 오크도 엘프도 모두 거친것이라면, 인간인 자신들도 오크와 엘프처럼 커질 수 있다. 모험가들은 갈등에 빠졌다.

- 자라는 건 좋은데, 부작용이 있잖아.

- 여기서 그걸 겪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여러분이 바라신다면, 라스토피아의 사제들이 여러분들 도울 것입니다."

"......!!"

메어리는 마치 모험가들의 걱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모험가들의 옆에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모험가들은 일부러 다른 성별로 붙인 엘프와 오크의 존재 이유를 깨달았다.

"후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실지도 몰라요?"

두근, 두근.

레이플은 자신의 옆에 시립한 오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장 바지 아래, 숨길 수 없는 세 번째 다리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그 너머, 남자법사의 옆에 있는 그린엘프의 흉악한 젖통도 눈에 들어왔다.

"물론 선택이므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신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당신의 자비를 받지 않는다고 신벌을 내리시거나 하지는 않으시죠."

"......."

"어찌하시겠습니까? 은총을 받고 난 다음에 얘기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던전을 공략한 것에 대해서 정산부터 하시겠습니까?"

모험가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남녀간의 이견이 갈렸다. 남자들은 당장이라도 엘프의 젖가슴에 파묻히고 싶어 안달이 난 반면, 여자들은 바로 옆의 존재가 오크라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설령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는 해도, 마족은 마족이었다. 이종간은 여신교단의 금기....

"어?"

여신이 만들어낸 차원의 틈. 신성력을 가진 오크. 그렇다면 여신은 오크조차도 자신의 교인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여신교단이 말하는 금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점점 아파지고, 이성과 본능이 복잡하게 얽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메어리는 그들의 혼란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짝.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시지요. 여러분, 모험가님들께 증표를."

"""예, 매니저님."""

오크와 엘프들은 검은 깃털펜을 들어 각자 파트너의 손등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날개달린 하트처럼 생긴 기하하적 무늬는 모험가들의 손등에서 붉은 빛을 내며 사그라들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이곳에 오셔서 여신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트라스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언제든 받을 수 있는 은총이지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레이플은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게...정말 여신의 뜻이란 말입니까?"

"후후후...."

메어리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신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만물을 축복하시고자 할 뿐입니다."

어째서인지, 여신교도라면 응당 할 수 있는 당연한 발언이 레이플과 모험가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 *

위이잉.

늦은 밤. 모험가들은 포털을 넘어왔다. 차원의 틈으로 향하는 문은 모험가들을 배웅하듯 사그라들었다.

"여신이시여."

레이플은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던전에서 가져온 엄청난 양의 재화와 보물은 금화로 환산한다면 족히 집 열 채를 사고도 남을 가치를 가진 물건들이었다.

"이런 곳이 있다니."

더군다나 들어갈 때는 원래 사용하던 장비를 챙겨갔으나, 나올 때는 겉면에 윤기가 흐르는 새로운 복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천옷은 로브보다도 가벼웠으나 가죽갑옷보다 단단했고, 안에 받쳐입은 강철 갑옷은 드워프 장인의 증명인 불꽃 무늬가 반짝이고 있었다.

고작 하루.

고작 하루만에 다섯 모험가는 다섯이서 나눠도 인당 집 두 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거금을 손에 넣었다. 등에 짊어진 봇짐을 들고 길드로 돌아가기만 하면 엄청난 때부자가 될 수 있었다.

"......."

하지만 다섯 모험가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마법사가 마법진만 열면 모든게 해결되지만, 마법사는 마나를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여러분."

레이플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지켜야 할 비밀들이 많지요?"

"그...너무 많아서...."

"네. 톡 까놓고 말해서 이곳에서 겪은 일들 모두가 비밀로 해야될지도 몰라요. 차원의 틈, 라스마켓, 성검의 용사, 색수병의 실체, 에스트라스, 그리고 우리가 잠시 '보류'한 여신님의 은총까지."

"......."

인간은 이기적인 생물이다. 자신에게 계속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때로는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극소수의 인원들끼리 비밀을 지키며 입을 싹 닫아버리고는 한다.

"우리, 같이 갑시다. 제가 길드장한테 얘기할게요."

레이플이 앞장 서서 말하자 다른 모험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차원의 틈으로 향하는 포털은 이미 닫혀버렸고, 말만 조금 맞춘다면 내일도 이곳에 와서 다시금 던전을 공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있을 일들은 모두 비밀로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루동안 고민을 하여 얻어낸 결과가 정해질 것이다. 여신의 은총, 에스테라스라는 이름의 가호를 받을 것인지.

이미 마음은 굳었다. 단지 레이플을 비롯한 다섯 명 모두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뿐이었다.

"우리, 길드로 돌아가서 조금 더 진솔하게 이야기해볼까요?"

모두가 함께 뜻을 모아,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꾹 다문다.

사람들은, 그것을 '공범'이라고 부른다.

* * *

"이야, 대리파밍 개꿀이네.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1. 던전의 지하 2층으로 연결되는 공간이동 마법진을 연다.

2. 인간 기사로 위장한 라임이 모험가 길드에 새로운 던전에 관한 정보를 뿌린다.

3. 모험가 길드에서 대규모 던전 토벌대, 또는 소규모 정찰대를 파견한다. 여기서 플랜 A[오만]과 플랜 B[분노]가 갈렸다.

"아쉽군. 50명 정도 왔으면 50명 정도 구울이 생겼을텐데."

"너무 많은면 오히려 마르코시아스 던전을 진짜로 토벌해버릴 지도 모르니까요."

처음으로 들어온 모험가들이 고작 다섯 명의 정예였기에, 우리는 오만의 군단 식 대규모 학살이라는 기존의 플랜을 변경하여 분노의 군단식 자본주의의 거래술을 펼쳤다.

4. 소규모 정찰대에게 차원의 틈이라면서 라스마켓을 보여주고, 그들이 마르코시아스 던전을 토벌하여 얻어낸 마석을 우리 던전의 특산물과 바꿔준다.

5.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은근한 유혹을 통해 플랜 C[색욕]으로 들어간다.

"아...진짜 아쉽네. 인간들 비밀 지키게 하는 데에는 씹질이 최곤데."

이 작전의 기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이기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신이 얻은 음험한 이익을 남들에게 공유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따라 나는 인간을 '믿고' 순순히 내보내줬다.

"걱정마십시오. 족쇄는 확실하게 채워졌습니다."

"그래. 만약 비밀을 퍼뜨리려고 한다면 터질 것이다."

수면향을 통해 잠시 의식을 잃게한 사이, 그들의 몸에 우리는 음충을 집어넣었다. 던전과 차원의 틈에 대해 발설한다 싶으면, 스카 트올로지들이 즉시 뱃속에서 날뛰기 시작하며 그들을 발정시킬 것이다.

"색수병이랑 증상은 비슷해보여도 실제로는 다르지. 하나는 미약에 의한 중독이고, 모험가들은 뱃속에 진짜 마물이 들어있는 것이니."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음충은 불타죽을 것입니다. 그걸 대비해 순회사제단이 눈에 불을 켜고 몸을 던질 것입니다. 걱정마십시오."

본디 작전이라는 것은 서로 연쇄작용으로 맞물리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가장 짜임새가 있다. 샤이탄과 꿈속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마냥 성녀 능욕 영상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걸로 지하 2층은 메어리와 극소수의 인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색수병 확산으로 인한 적 전력의 약화로 1할을 줄였다.

모험가들의 방문이 활성화가 된다면 전력이 1할 또 줄어들 것이다.

"아직 부족해."

마지막으로 딱 하나. 통할 지 안 통할 지는 미지수이나, 시도를 해서 나쁠 건 없는 작전으로 적의 전력을 줄인다.

"선빵 필승. 가자, 륜."

"네! 히힛, 주인님이랑 같이 싸우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그렇지? 마냥 앉아서 젖만 빠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저도 좆만 빨고 있을 수 없죠!"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우리 군단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

"륜아, 우리가 할 행위가 뭐라고?"

"방화. 학살. 테러."

후방이 안정되었다는 건, 즉 그만큼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

"아아, 그렇다. 우리는 지금부터 마지막 작전, 게릴라에 들어간다."

우리 군단이 활용 가능한 모든 병력 운용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땅에서 전쟁을 치르기 전에 토벌대를 최대한 많이 말려죽일 것이다.

"전 군단, 출격."

라스베가스를 중심으로, 나는 병력을 수 십 부대로 나누어 진군시켰다.

"여자는 겁탈하고 남자는 따먹어라."

라스마켓을 운영해야 할 그린엘프, 드워프, 드라이어드를 빼고 전부다.

* * *

<그 시각, 모험기 길드 지부장실.>

"미치겠군. 이거 밝히면 꼼짝없이 이단으로 몰려서 화형당할 거다."

레이플과 네 모험가는 지부장과 따로 만나 모든 사실을 밝혔다. 공범은 늘어날수록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이 크지만, 모험가 길드라는 이익집단을 대표하는 지부장은 모험가들의 편이었다.

"레이플. 얘들아, 이거 퍼지면 좆된다. 무조건 입 싹 닫고 있어야 해."

"지부장님이나 얘기하지 마시오."

"당연하지. 이거 내 아내한테도 말 못할 문제야. 으으...씨발. 이거 금화로 굴리면 얼마나 벌 수 있지...?"

여섯 모험가는 눈앞에 놓인 물건들을 보며 침묵했다. 척보기에도 현실에서 만들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물건들이 대부분이었고, 보통 그런 물건들은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이라는 말만 붙이면 거진 다 해결이 되는 애로사항이었다.

"좋아. 라스마켓. 여신께서 모험가들을 위해 만들어주신 걸 쓰지 않을 수 없지. 그럼 이제 나한테 더 숨기는 건 없지?"

"........"

"뭐야, 씨발. 또 있어? 뭔데?"

"그, 그게.... 에스테-"

"지, 지부장! 큰 일났습니다!"

문이 벌커덕 열리며, 하급 모험가 하나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야! 긴급회의 붙여놓은 거 안 보여?! 큰일 아니면 죽을 줄 알아!"

"비르고 남작령을 점령한 마물들을 감시하는 초소가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오크의 짓입니다!"

"존나 큰일인데?"

모험가들의 표정이 굳었다.

"초소를 지키는 병사들은? 그 놈들은 어떻게 됐다냐?!"

"그, 그게...."

모험가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욕에 미친 마물들에게 범해졌습니다!!"

"색수병이...마물들에게도 발병한다고?! 왜?! 어째서?!"

"......후작성 안에서만 돌던 색수병이, 마물들에게도 전파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인류에게만 퍼지는 것 같았던 역병이, 하필이면 제일 위험한 자들에게 퍼져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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