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회
142일차
마르코시아스 던전.
오랜 기간 화염마차에 의해 테러를 당한 마르코시아스는 화염마차에 의한 테러가 끝난 것에 축제를 벌였다.
"와아아아!!"
매일같이 들려오는 폭음.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화염.
화염마차가 터지는 것을 대비하여 던전을 개조하려고 해도, 개조하기 위해 인부를 투입한 순간 인부가 화염마차와 함께 터진 이후로 개조조차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화염마차가 멈췄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전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단 더이상 던전에 불길이 치솟아 마법사들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제...지쳤어."
마르코시아스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눈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그만 끝내자."
"그게 주인님의 뜻이라면."
총력전.
모든 전력을 하나로 모아, 마르코시아스는 포털을 넘어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고자 했다.
남은 마석을 모두 병사들로 바꾸어, 마계 대장간에서 새롭게 장비들을 갖추고, 핵심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키메라들을 모두 부활시키고 강화하여 적들이 쉽게 죽이지 못할 존재로 만들었다.
"이 손해는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스타로트 던전을 도모하게 된다면, 소모한 자원을 다시 복구할 것이다. 엘프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든, 강제로 키메라의 알을 낳게 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약탈이란 이런 거지."
남은 것은 이제 진군하는 것.
마르코시아스는 검을 높이 빼들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가자, 나의 부하들이여!"
"주인님! 포털에서 적이!!"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기 직전, 포털이 빛나며 누군가가 던전에 들어왔다. 마르코시아스는 포털 너머에서 나타난 존재들을 보고 경악했다.
"이...씨바...."
<알림> 던전에 침입자 발생!
# 모험가 5명, 평균전력 Lv.68. ★★★☆.
"모험가가 왜 거기서 나와!!"
최악의 타이밍에 나타난 모험가들에, 마르코시아스는 대 모험가 전투를 위해 병력을 신속히 재배치했다.
* * *
<수 시간 뒤. 마르코시아스 던전 초입.>
"이젠 무리야. 장비가 너무 많이 망가졌어."
"...키메라가 이렇게 많은 던전은 처음입니다."
모험가들은 라스마켓에서 지원을 받은 <모닥불 키트>를 이용해 불을 지폈다. 레이플은 모닥불 키트를 설치하며 설명서를 읽었다.
"아아. 이 모닥불 키트는 마물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매직 아이템'입니다. 불이 붙으면 여신께 기도를 올려주세요."
화륵.
모닥불에 불이 붙었다. 붉은 불꽃이 구불거리는 장작을 태움과 동시에, 은빛의 재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거...신성력인가?"
"여신이시여. 맞습니다. 장작 속에 신성력이 깃들어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과연 정말로 효과가 있을 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공짜로 받은 물건이니 휴식 겸 실험 겸 사용해도 나쁠 건 없었다.
"알람 마법은?"
"설치됐습니다. 주변에 마물이 나타나는 즉시 알람이 울릴 겁니다."
모험의 기본은 사주경계. 레이플은 사방에 설치된 알람마법에 안도하며 자신들이 사냥을 통해 얻은 마석을 늘어놓았다.
"하급 35개, 중급 13개. 생각보다 많이 벌지는 못했네."
"그러게요. ...대신 키메라 둘을 잡으면서 상급 2개를 얻었잖습니까."
"그래. 그거 아니었으면 진짜 울 뻔 했어. 상급 마석이라도 2개 얻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더 안쪽까지 갈 뻔 했잖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잠깐 쉬었다가 돌아가자. 오늘은 여기까지야."
하지만 그건 레이플을 비롯한 베테랑 모험가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숱한 동료를 떠나보내고 살아남은 끝에, 레이플과 모험가들은 세상의 이치를 깨우쳤다.
마석 하나만 더.
그런 욕심을 부렸다가는 저승길에 한발자국 더 다가간다는 것을.
약 30분.
적절히 휴식을 취한 레이플과 모험가들은 전리품을 챙겨 포털을 넘어왔다. 포털 바로 앞에는 들어갈 때와는 다른 여인, 정장 차림의 그린엘프가 모험가들을 맞이했다.
"생환을 축하드립니다."
"어...분홍 머리의 그 분은?"
"매니저께서는 '던전의 역류'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정산은 제게 맡겨주시길."
"던전의 역류?"
"차원의 틈은 불안정한 곳이라, 여러분이 다녀온 던전이 이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던전에서 마물들이 튀어나올 때를 대비하여, 매니저님께서 대비를...아차."
위이잉.
포털의 문이 열렸다. 모험가들은 자신들의 뒤를 쫓아온 마물 무리에 검을 빼들었다.
"저, 저건...!"
"상급 키메라?! 두 마리가 끝이 아니었어?!"
던전에서 무려 세 마리나 되는 키메라가 튀어나왔다. 레이플은 자신들이 들어왔던 입구 쪽을 바라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걱정마십시오. 이곳은 여신께서 만드신 곳. 매니저님께서 나오시면-"
"잡담은 그만."
또각, 또각.
정장 위에 검은 코트를 걸친 메어리가 나타났다. 분홍빛 머리칼에는 은빛의 오라가 찰랑거렸고, 그녀의 손에는 척 보기에도 아름다운 세검이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성검?!"
"여신의 이름으로."
메어리는 성검을 전방으로 겨눴다. 세 마리의 키메라는 기겁을 하며 몸을 돌려 포털 너머로 달렸다.
"라-스."
성검의 끝에서 막대한 빛이 터져나감과 동시에, 레이플은 긴장감이 풀려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수요가 있는 곳에 시장이 열리는 법이며, 거래가 활성화된다는 건 물물교환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라스마켓을 포기할 수 없지."
우리 던전에서 생성되는 모든 물건들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수요가 있는 물건이다.
하피의 깃털, 안드라스의 깃털, 드라이어드의 나무뿌리와도 같은 원재료.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무기와 방어구, 우리 군단에서 특별히 만들어낸 보존식과 같은 전투식량, 그리고 '차원의 틈'에서 판매가 이루어지는 라스타킹을 비롯한 현대식 물건들과 같은 공산품.
"모험가들은 자기 목숨과 관계되어있는 것이라면 극도로 효율을 따지지. 차원의 틈이라는 말도 안되는 현상에도, 눈앞에 펼쳐진 상품들을 사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자기 장비보다 더 좋은 드워프제 무기가 즐비하게 늘어져있다. 원래라면 금화 다섯 개는 주고 사야했을 물건이, 고작 은화 오십 개 정도로 판매하고 있다.
심지어 마석으로.
던전에서 가장 얻기 쉬운 재화로.
"포털 너머 마르코시아스 던전에서 얻은 마석들은 모두 우리가 '구매'하는 것이지. 흐흐, 조금 고깝기는 하지만, 우리가 당장 마르코시아스 던전을 토벌하는 건 귀찮으니까 그 정도 수고비는 줄 수 있다."
"아, 저 알아요! 이거 하청이라고 하는 거죠? 지난 번에 주인님 혼잣말 하시는 거 들었어요!"
"맞다, 륜. 우리들은 던전을 토벌할 모험가 용역을 싸게 고용하는 셈이지."
던전을 다녀오는 모험가들에게 마석은 그다지 쓸모가 없는 재화다.
수요라고 해봐야 마탑의 마법사들밖에 없는 물건이며, 대량으로 처리해봐야 그다지 이득도 안 된다.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잡템'에 불과하지만, 우리 군단에 있어서 마석은 금화보다 더 값진 재화다.
"놈들은 우리에게 잡템을 팔고, 우리도 놈들에게 잡템을 판다. 본인들에게는 불필요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는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지. 이게 바로 인류 사회의 시작, 물물교환이니라."
군단식 자본주의를 도입하려면 기초부터 다져야한다.
"마석은 돈이 될 것이고, 놈들은 던전에서 얻지 못할 우리 군단의 물건들을 싸게 챙겨가는 셈이지. 놈들이 그걸 인간 도시에서 다시 비싼 값에 팔 것이다."
자연히 우리 군단의 물건들은 '던전 프리미엄'이 붙어서 널리널리 퍼질 것이다.
"하급 마석 다섯개로 스타킹 하나를 샀다고 치자, 륜아. 그러면 네가 모험가라면 이걸 어떻게 판매하고자 하겠느냐?"
"음.... 하급 마석 여섯개?"
"아니지, 아니지. 최소한 중급 마석 다섯개로 바꿔먹어야지. 물건을 구매하는 대상은 우리가 판매하는 원가를 알지 못하지 않느냐."
"......아! 사는 사람들은 하급 마석 다섯개인지도 모르겠네요!"
"아아, 그렇다. 이것은 유통마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 놈들이 비싸게 받아먹는 걸 생각하면 다소 배가 아프기는 하지만,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면 박리다매라도 물건을 많이 판매하는 방법밖에 없다.
"시장이 활기를 띄려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야지."
지금은 '모험가'들을 최대한 많이 불러와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르코시아스 던전에 들어간 다섯 용사들을 위해 특별한 '가호'를 보냈다.
"차원의 틈 100번째 고객님들이 살아서 돌아와서 마석을 판매하면 특별 서비스를 제공해야겠지? 흐흐흐."
100번째 고객. 그런 거 없다.
단지 모험가들이 '마석만 잽싸게 챙겨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게 끔' 만들었을 뿐.
"자, 살아서 돌아오너라. 혹시나 죽을 것 같으면 몹몰이로 돌아와도 좋다."
직선형 통로로 개조된 라스마켓.
"원래 마을에는 유저가 덤비지 못하는 고레벨 NPC들이 깔려있는 게 국룰이지."
차원의 틈(笑)에는 성검의 용사,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치안부대가 있다. 설령 죽이더라도 마석만 있으면 부활할 수 있는 강한 전사들이.
"흐흐, 기절한 녀석들도 슬슬 깨어나겠지? 그럼 작전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던전 구조 변경!"
구구구구.
지하 2층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나무 판자로 이루어진 격벽이 내려와 막다른 길을 만들어냈으며, 라스마켓과 포털 사이의 길은 막혔다.
끼릭, 끼릭, 끼릭.
바닥을 지탱하던 판자들이 좌우로 개방되며 바닥이 다시 활짝 열렸다. 포털 바로 아래는 날카로운 가시창이 번들거리는 함정이 되었고, 우리가 숨어있던 격벽이 활짝 열렸다.
"흐흐, 인간놈들 자기들이 여기를 통과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겠지?"
"다시 옮길게요!"
구구구구. 화염마차 투하시설, 이른바 스키점프대가 다시 원래의 위치를 찾아 옆으로 옮겨졌다. 아래에 추가로 달아놓은 바퀴를 통해 각도를 맞춘 우리는 다시 화염마차에 키메라의 시체를 집어넣어 사출했다.
"자, 다음 손님이 올 때 까지 다시 경계 준비!!"
다크엘프는 활과 오크 자지를 장착한 채, 사격대 위에 엎드렸다.
* * *
"여기는...."
"정신이 드십니까?"
중후하고 인자한 목소리에 레이플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꿀이 떨어지는, 듣는 것 만으로도 임신할 것만 같은 목소리에 레이플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히익?!"
"깨셔서 다행입니다."
자신이 누운 침대의 옆에는 검은 정장 차림의 '오크'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만약 그가 입은 복장이 메어리라고 불린 여인과 비슷한 차림이 아니었다면, 오크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미약한 '신성력'이 아니었다면, 분명 레이플은 품안의 단검을 꺼내 오크를 공격했을 것이다.
"오, 오크가 어떻게...?"
"이곳은 차원의 틈. 여신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이상향에는 인간과 마족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말인데. 레이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스코트 하겠습니다, 레이디."
"........"
탄탄한 근육질의 팔에 레이플은 자신도 모르게 오크의 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신성력 때문일까, 아니면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자연스러움 때문일까. 레이플은 귀족 영애마냥 오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어딘가로 인도되었다.
"......."
해코지 당한 흔적은 없다. 오히려 상처는 말끔히 치료되어있었다. 오크가 자신을 이끈 곳에는 이미 자신을 비롯한 일행이 한 테이블에 모여있었다.
"어, 왔어?"
"...흠흠."
남자들의 옆에는 엘프가. 여자들의 옆에는 오크가. 인간의 눈으로도 하나같이 미남미녀들밖에 없는 외모에, 괜히 인간인 자신들이 주눅들어야만 했다.
"생환을 축하드립니다, 모험가님."
테이블의 중앙에는 분홍 머리칼의 매니저, 메어리가 인자한 미소로 레이플을 맞이했다. 레이플은 자연스레 일행의 가운데에 앉아 메어리와 마주앉게 되었다.
"궁금한 것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가장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 번 열린 던전은 귀환 이후, 일정 시간 이후에 다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
"시간으로 따지면...내일 아침 9시에 열리게 되겠군요. 그리고 지금 시각은 오후 7시. 딱 한 시간 전에 던전의 문이 닫혔습니다. 던전은 9시부터 6시까지 열리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건 왜죠?"
"항상 열려있으면 이곳까지 계속 마물이 범람하게 되어 있거든요."
레이플은 납득했다. 어차피 이 이상한 공간에서 의문을 품는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럼 모험가님들, 생환을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한 가지 서비스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차원의 문을 이용한 100번째 생환자로서, 여신께서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은총을 내려주실 겁니다."
"은총...이요?"
"예, 그렇습니다. 은총이라고 해도 변변찮은 것이며, 여러분이 바란다면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으니까요."
테이블 위에, 아름다운 유리병 안에 찰랑거리는 녹색의 액체가 반짝이고 있었다.
"<에스트라스>. 여신님의 은총을 받으면...이렇게 됩니다."
메어리는 코트를 벗어, 자신의 흉부장갑을 과시했다. 과연 여신의 은총이라고 부를 만한 정도로, 그 크기는 평범한 인간의 사이즈를 훨씬 벗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