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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비만 오크-288화 (288/800)

# 288

전쟁을 치름에 있어서 인적피해는 당연히 발생한다.

그렇다면 물적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기나 방어구와 같은 전쟁물자? 아니면 식량?

게임에서야 자원의 피해가 가장 많을 지 몰라도, 나는 '땅'이라고 생각한다.

'싸웠다 하면 다 헤집어지니까.'

시체로 오염되는 대지는 이루 말할 수 없고, 싸움이 조금만 더 격화되면 땅은 이전과 달라지기 마련.

이 대륙에서 용사와 마물이 싸운 땅에는 신성력의 잔재가 너무 강하여, 마물이 그곳 근처에 가면 방사능에 피폭되는 것 처럼 고통스러워 하게 된다.

'그러니까 전장은 가급적이면 우리 땅이 아닌 곳으로 하는게 제일 좋아.'

"그게 주인님께서 여기에 진을 만든 이유입니까?"

"당연하지. 키메리에스야, 너는 이웃끼리 싸워본 적이 있느냐? 서로 똥물을 튀기면서 싸울 정도로 격하게 싸워본 적이 있느냔 말이다."

"...아뇨, 그런 일은 없습니다."

"흐흐. 이왕 서로 똥물을 튀길 거라면...내가 먼저 남의 집에 던져야하지 않겠느냐. 우리 집이 더러워질 수는 없으니."

서로 함께 오물을 뒤집어쓰더라도 적은 몸 뿐만 아니라 집까지 오물이 튀게 된다. 냄새는 더욱 빠지지 않을 것이고, 치우지 않으면 계속 남게될 것이다.

"그러니까 싸움터는 당연히 할파스의 던전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서로 밀고 당기는 싸움이 우리 던전까지 넘어오지 않도록 말이다. 흐흐."

쟁탈전은 결국 던전 주인의 모가지를 따면 끝나는 전쟁이나, 그 모가지를 따러가는 과정에서는 포털을 두고 영역 싸움을 해야하기 마련이다.

"자고로 벙커는 남의 집 앞마당에 지어야 정석이지."

수비를 위해 우리 앞마당에 짓는 것은 스스로 몸을 웅크리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적이 어느 루트로 공격해들어올지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내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적을 공략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어이쿠, 저기 내려오는구만."

다그닥, 다그닥.

저주받은 와이번을 죽였음에도 여전히 리필은 계속된다. 지상 2층의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페일 라이더들은 그 사이에 만들어진 간이 요새에 당황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흐흐, 아무리 너희들이라도 여기다가 들이박기는 곤란하지?"

단순히 목책을 만들어놓으면 적이 냅다 몸을 들이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울타리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도록 전기를 흐르게하거나 날카로운 가시를 박아야 했다.

탕탕.

나는 울타리의 정면에 서서 바깥쪽 목책을 가리켰다. 비록 냄새는 다소 역했지만, 페일 라이더들이 울타리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성수.

기네비어가 세례를 내린 성수가 목책 전체에 흩뿌려졌다. 당연히 마족들을 상대로 발군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목책 위의 수비대에까지 영향을 줄 수도 있으나, 목책 위에는 신성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 모험가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크르르.

결국 페일 라이더들이 달려올 수 있는 길은 오직 울타리 한 가운데, 내가 서있는 빈 통로 뿐. 나는 새롭게 공수한 철퇴를 들고 페일 라이더들에게 흔들었다.

"들어와. 마석도 안 나오는 놈들이라도 경험치는 파밍해야지."

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같은 괴성을 내뿜으며 페일 라이더들은 질주하기 시작했다. 고작 두 셋 정도가 간신히 드나들 폭이라, 페일 라이더들은 일렬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 근데 그거 알아둬라. 경험치 파밍은 내가 아니라...."

피융.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내 바로 뒤에서 날아간 은빛의 화살은 신성력을 흩뿌리며 페일 라이더들을 전부 꿰뚫어버렸다.

"주, 주인님?!"

귀가 살짝 따갑기는 했지만, 피가 나는게 아니라 정전기가 튄 것처럼 따가울 뿐이었다. 나는 나를 향해 황급히 달려오는 여인을 내 로브속으로 숨겼다.

"...안 다쳤다. 그러니까 걱정마라."

"죄송해요. 아직은 미숙해서...."

"여왕이 아니라 공주 아니냐. 다루기 힘든 힘을 새로이 배웠으니 당연한 거지."

나는 내 품안에 쏙 들어온 하이엘프 공주, 륜의 귀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만지작거리는 걸로 쉽게 가버리지 않았다.

우우웅.

륜의 눈동자에 은은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륜이 4성이 되며 새롭게 깨우친 힘, '신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흐흐. 넌 진짜 나의 보배다, 보배."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다크엘프도 여왕이 되면서 신성력을 각성하고 사용하는데, 정석 테크트리를 타고 있는 하이엘프가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그것도 여왕이 되기 직전 상태인 공주가.

'처녀막 속에 갇혀있던 신성력이 깨어나기 시작한 거다.'

다크엘프 여왕 루나.

사제 기네비어.

오크 성기사 갤러해드.

그리고 이제 우리 군단에는 신성력을 사용하는 존재가 두 명 더 늘었다.

하이엘프 프린세스, 륜.

"4성 되고나서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흐흐."

"...저만 달라진 건 아니잖아요. 히힛."

륜은 슬쩍 뒤를 가리켰다. 그러면서 자신은 내게서 뒤로 물러났고, 나는 내 앞에 나타난 정숙한 드레스 옷차림의 붉은 미녀를 맞이하며 두 팔을 벌렸다.

"어서와라. 처녀를 바치고 싶어서 온 자여."

"...시작부터 못하는 말이 없네. 야, 나 지금 천사거든?"

"타천사 아니냐."

"흥. 됐어. ......."

적발의 타천사는 내게 달려와 푹 안겼다. 조금 낯간지럽기는 했지만, 나는 내게 달려온 이름없는 부하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홀로 코쿤 속에서 싸우느라 고생했다. 새롭게 태어난 네게 이름을 선사하마, 그레모리."

"......흥, 잠깐 맡겨놓은 걸 되게 거창하게 주시네."

적발의 타천사, 그레모리는 자신을 향해 스며들어가는 붉은 오라에 눈을 감았다. 나는 그레모리에게 내가 맡아두고 있던 모든 것을 다시 건넸다.

그레모리의 이름.

그레모리 던전의 주인으로서의 자격.

"어디 얼마나 잘 바뀌었는지 확인해볼까?"

나는 그레모리의 드레스 아래까지 손을 뻗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안쪽에는 검은 스타킹을 입고 있었고, 나는 곧장 고간부로 손을 찔러넣었다.

"어쭈, 그레모리 주제에 뭐 하나 거슬리는데?"

"흐읏.... 어떻게 재회하자마자 냅다 손가락을 찔러...! 다른 애들 다 보잖아!"

타천사의 몸이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레모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부끄러워했다. 울타리 위에 있던 인간 모험가들, 죽음의 기사들, 그리고 륜은 음흉한 눈빛으로 나와 그레모리를 향해 웃고있었다.

"너, 너희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여기 있는 녀석들 다 내 던전 소속인 거 몰라?!"

"자기들 던전 주인이 야한 냄새 풀풀풍기고 있는데 안 꼴리겠냐?"

"무, 무슨 소리야?!"

"너 빼고 다들 알몸의 교류를 했거든. 크흐흐."

코쿤에서 합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바람에, 그레모리는 정사와 라스의 방에서 이루어진 광란의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

"얘들아, 그레모리 처녀 먹히는 때 너희가 옆에서 훈수 좀 해줘야겠구나!"

"뭐?!?!"

"흐흐흐. 기대해라. 내가 너만큼은 특별히 대해줄테니까."

나는 그레모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네 처녀를 가져갈 거다."

벙찐 그레모리가 입을 살짝 벌리며 허탈해했다.

"그건 뭐지? 키스해달라는 암시인가? 그럼 해줘야지."

"아니-읍?!"

나는 사랑스러운 연인끼리 재회를 한 듯, 그레모리를 붙잡고 격하게 입술을 탐했다.

"꺄아아악!!"

"아...나도 저거 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군단장님한테 아다 따이는게 그렇게 기분좋다고 하던데.... 씁."

누구냐. 저속한 발언을 한 자는.

나는 모험가 여인을 한 번 눈으로 흘긴 뒤, 그레모리와의 키스를 이어나갔다. 그레모리가 반가운 것도 있지만, 동시에 적에게 하는 도발이기도 했다.

'커플 염장이 도발 끝판왕이지.'

나는 다음 페일 라이더들이 천장에서 내려올 때까지 그레모리를 탐했다.

"쯉, 푸와. 흐흐, 우리 돼지 그 새 좀 늘었네? 근데 나한테는 안 되지."

쮸와아아아아아아압.

...역시 키스는 잘 하더라.

〈그레모리〉 ★★★★☆

레벨 : 75 / 90

종족 : 타천사

나이 : 243세

성별 : 여성

등급 : R++

출생 : 그레모리의 던전

소속 : 쿰처쿠 척의 던전

직업 : 타락천사

* * *

"저것들 뭐야...?"

금발 여인은 새롭게 나타난 적발 타천사에 얼척이 없었다. 신성력을 쓰는 하이엘프는 그렇다 치더라도, 여인은 적발의 천사를 부른 '호칭'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레모리.

오크는 적발 타천사에게 '그레모리'라고 불렀다. 그레모리의 이름을 부여했다.

'군단장이 저거라고...?'

앞에서 미친듯이 날뛰는 오크가 상대 세력의 우두머리이자 분노의 군단장이다. 정황이 그러했다. 장난이 아니라면 어떻게 56위 던전의 주인 이름을 마음대로 부여한단 말인가.

'진짜?'

다른 누구도 아닌 군단장이 최전방에 서서 부하들을 이끈다? 자신이 지끔까지 튕기고 튕기며 본 오만의 군단장들과는 전혀 다른 성향이었다.

'배만 빼면 괜찮네.'

이미 할파스에 대한 마음이 떠난 여인이었다.

"이런 미친."

쮸와아아압, 츄릅, 쮸르릅, 할짝, 후릅.

타천사와 오크의 격정적인 키스에 여인은 손끝까지 파르르 떨렸다.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육을 섞는 행동은 여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런 변태들이...."

심지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상스럽기 그지없다. 처녀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모자라, 침대만 깔려 있다면 바로 남들이 보는 앞에서 행위로 넘어갈 기세였다.

'안 돼.'

여인은 직감했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자신을 인장이라고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지만, 저 미친 오크는 인장이 솔로몬의 딸이고 나발이고 건드릴 가능성이 농후한 존재였다.

'범해진다.'

오크의 주변에는 온통 여자 뿐이다. 여인은 직감했다. 오크는 안드라스를 진짜로 성적으로든 식재료적으로든 먹어치웠다. 인간에게 박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어쩌면 이미 인간들에게 박히는 능욕을 당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오크들에게 잡혀서 집단 능욕을 당할 수도 있어.'

여인의 배가 쓰려오기 시작했다. 하복부에 새겨진 인장은 여인의 머리칼과 똑같은 금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히익?!"

들키면 강간당한다. 여인은 황급히 자신의 층에 있는 마석들을 꺼내들었다.

"마, 막아---!!"

여인은 처음으로 오만의 군단, 할파스 던전이 이기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 * *

"샥스가 말하기를 오만의 인장이 그렇게 꼴리다고 하던데."

"와. 너는 나를 만나자마자 그런 얘기를 하니?"

"뭐 어떠냐. 인장을 차지하고 나면 찐득하게 한 판 할 건데."

"한 판만?"

"흐흐, 너 있어봐라. 내가 아주 죽여놓을테니."

"주인님, 천장이 슬슬 이상한데요."

농담따먹기를 하는 사이 천장이 들끓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페일 라이더 뿐만 아니라, 검은 스켈레톤들, 화염 채찍을 다루는 리자드맨, 오크에 고블린, 코카트리스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총공세.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온 모든 적들이 눈앞에 있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빼곡히 채우며 내려오는 그들은 흉흉한 눈빛으로 우리를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오, 익숙한 얼굴도 있구만."

선봉에 있는 두 명을 향해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페일 라이더, 푸르카스.

그리고 나에게 이름을 빼앗긴 '전' 아미.'

만약 샥스까지 죽었다면 샥스도 저 자리에 서있으리라.

"망자들이 마석으로 부활해서 다시 나타났구만. 크흐, 대단해. 아주 마석이 썩어넘치는데?"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싹다 죽여서 마석 긁어모아야지."

할파스 군단이 그렇게 마석 보유량이 많다면 내가 가져가는 것이 인지상정. 하지만 마석들은 불행히도 자꾸만 페일 라이더같은 놈들을 부활시키는 데 쓰이고 있다.

전리품이 줄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므로 이번 총공세를 이겨낸 다음 빠르게 탑을 올라야했다.

'부활에 마석을 더이상 쓰지 못하게 막는 거다.'

할파스.

또는 오만의 인장-〈루시펠〉.

[큰 언니입니다. 주인님, 부디 자비를.]

"오냐."

샤이탄의 청탁이니 내가 거절할 수 있을까. 인장을 딱히 수집해야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다.

"펠라 잘하게 생긴 이름이니까 펠라 한 번만 시키고 너한테 넘겨주마."

[감사합니다. 후훗.]

...일단 잡으면 샤이탄이 알아서 내게 조교를 해서 바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우선 저 수많은 마족 무리를 쓸어버려야했다.

"그레모리, 새롭게 태어난 너의 힘을 보여라!"

"......나 참."

그레모리는 손에 마나를 모아 전방으로 내뻗었다. 마녀 출신이자 원소술사 답게 마법 자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신성력 좀 넣고, 구워버리면 되겠지. 간다. 〈홀리 레이〉."

그레모리가 하늘 높이 마나의 구를 던졌다. 미러볼처럼 반짝이는 구체는 적을 향해 적색과 은색이 섞인 레이저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역시 천사 몸이 좋기는 좋네."

타천사 발라크의 몸에 그레모리를 집어넣은 건 정말 신의 한수가 아닐까. 나는 일거에 쓸려나가는 마물들에 쾌재를 불렀다.

처녀가 된 그레모리의 힘은 대단했다.

...아니 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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