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8화 〉1부 (268/315)

말해 무엇하랴.

잔디밭에는 시커먼색으로 그을음이 마치 땜빵처럼 남아있었다.

덕분에 누가봐도 사고를 쳤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고.

그래서일까.

제가 남긴 땜빵을 바라보는 세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뭐야? 뭔 일 있어?"

별장 쪽에서 지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하필이면 그때였고.

이미 태워먹어버린 걸 당장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하늘같으신 언니한테 불호령을 듣긴 싫었던 걸까.

멍하니 제가 태워먹은 부분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는 언제고 세나의 눈동자가 떼구르르 굴러가기 시작했다.

대체 뭘 저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일까.

내가 속으로 그런 의문을 품기 무섭게 실시간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있던 세나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이 났고, 허공에 엉거주춤하니 멈춰선채 딱 끝부분만 파르르 떨리고 있던 세나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쑤욱하고 기세좋게 뻗어져나간 세나의 손이 잔디밭 위를 구르고 있던 양동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서 자기가 태워먹은 부분에다가 씌워버리는데ㅡ

"누가 막 소리 지르고 그러던데."

정확히 그 타이밍에 지나가 현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 이미 세나는 자기가 뒤집어 놓은 양동이 위에 털썩 걸터앉은 상태였고 말이다.

"···야, 유세나."

"으, 응?"

"그건 또 왜 깔고 앉아있냐?"

당연한 말이지만 못 본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눈에 띄면서도 기묘하기까지한 광경을 지나 정도 되는 이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 주, 준비 하다보니까 다리가 좀 아파서···!"

"그러면 그냥 의자 끌어다가 앉으면 되지 쓰잘데기 없이 양동이는 왜 또 깔고 앉아있어? 그러다가 찌그러지면 어쩌려고."

"에, 에이··· 이 정도 가지고 안 찌그러져. 이게 보기에는 이래도 생각보다 튼튼···"

저걸 지금 변명이라고 내뱉고 있는 것일까.

얼굴 옆으로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을 삐질삐질 흘려대면서 최선을 다해 자기 변호를 해대는데 솔직히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속겠냐고···'

아니나 다를까 세나가 횡설수설하며 뱉어대는 말들에 '흐음··· 그래?'하는 느낌으로 적당히 맞장구를 쳐대던 지나의 눈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착 가늘어졌다.

저 눈빛을 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확실한 건 그게 세나한테는 쥐약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히끅···!"

그게 아니고서야 그런 눈빛을 받자마자 딸꾹질부터 할 이유가 없으니까.

살벌하기 그지없는 지나의 눈빛을 받으니까 언니라는 이름의 고통과 억압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학생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꼈던 걸까.

"야, 유세나."

"으, 응···?"

"시킨 거는? 다 해놨어?"

"아, 응···!"

"···그래?"

불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서 지르기까지 해버렸지만 어찌되었든 시키는대로 하긴 했으니 그것 때문에 쥐잡듯이 잡힐 일은 없을 거라 판단한 것일까.

아까 전부터 어색할 정도로 바짝 얼어있던 세나의 얼굴 위로 약간이지만 안도라는 것이 맴돌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흠, 잘 해놨네?"

"그, 그치? 저거 피운다고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

지금 이렇게 양동이 위에 걸터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며 세나가 되도 않는 말을 사족처럼 덧붙였다.

"불 하나 피운 거 가지고 엄살은···"

"그래서 저녁은 언제 먹어? 나 슬슬 배고파서 죽을 거 같은데···"

"뭐··· 준비라면 얼추 다 끝났으니까 슬슬 가지고 나오실걸?"

지나의 말에 반응하기 급급한 세나는 알고 있을까.

어느새 지나와 그녀와의 거리가 바짝 좁혀졌다는 걸?

어차피 사고야 세나가 친 것이기에 철저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둘을 관찰하고 있으려니까 내 심장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거리가 거의 한 걸음 정도까지 좁혀진 순간, 평소 모습으로 돌아갔던 지나의 눈이 다시금 착 가늘어졌다.

그에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은근히 언니의 반응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던 세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움찔하고 떤 순간, 지나의 양쪽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올라갔다.

"야, 유세나."

"으, 응?"

"혹시 너 불피우다가 넘어지기라도 했냐?"

"···응?"

"아니이··· 별 건 아니고 무릎에 잔디가 붙어있길래."

"아, 아···! 이, 이거?"

안 돼···!

멈춰···!

제발 멈춰···!

책장 뒤에서 열심히 'stay'를 외쳐대던 아저씨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세나의 시선이 제 무릎 쪽을 향해 내려감과 동시에 지나의 두 손이 세나를 향해 쑥 뻗어나가는 걸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으려니 먹잇감을 포착한 뱀처럼 움직이던 것들이 이내 목표에 닿았다.

세나의 겨드랑이 사이로 쑤욱하고 파고 들어간 것들이 양동이 위에 걸터앉아있던 세나를 억지로 일으켰다.

정확히는 들어올렸다고 해야할까.

"에···?"

설마 다 커서 이런 식으로 둥가둥가를 당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모양인지 세나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표정도 하필이면 그 소리에 딱 맞는 걸 하고 있어가지고 어째 잘 짜인 한 편의 꽁트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진짜 아기라도 안아들듯 너무나도 거뜬하게 세나를 양동이 위에서 들어올린 지나가 그대로 발을 휘둘러 양동이를 걷어찼다.

터엉ㅡ!

그런 소리와 함께 지나의 발에 채인 양동이가 떼구르르 굴러가며 드러난 풍경은··· 예의 그 시커먼 땜빵이었고.

"허···"

마침내 세나가 숨기고 있던 것의 정체를 확인한 지나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탁 흘렸다.

그야 그렇겠지.

불 좀 피워놓으라고 했지 불을 지르라고 한 적은 없을테니까.

"아니 넌 무슨··· 사고를 쳐도 이렇게 스펙터클하게 치냐."

제 아무리 지나라도 설마 잔디밭을 태워먹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런 듯 했다.

"헤헤···"

"웃음이 나오지?"

"···"

"생각해보면 참··· 미스테리긴 해. 너 군대에 있을 때는 대체 어떻게···"

듣고 보니까 실로 그랬다.

혹시 그때는 아직 방송을 시작하기 전이라서 멀쩡했던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 아무튼 이거 어쩔거야."

"어··· 무, 물어주면 되지 않을까?"

"으이구··· 돈 많으셔서 참 좋으시겠어요."

"어,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을까···?"

그렇게 여전히 지나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시피한 세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까 지나가 왜 그렇게 세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알 것도 같았다.

간단히 말해서 입이 문제였다.

지나가 무슨 말만 하면 꼭 지지 않고 한 마디씩 해대는데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그게 참··· 매를 부르더라.

그런 식으로 세나가 지나한테 쥐잡듯이 털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별장 문이 열리며 가영이 손에 뭔가를 잔뜩 든채 모습을 드러냈다.

"응? 무슨 일 있니?"

그리고 그게 가영이 둘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고.

"이리주세요. 고모."

"괜찮은데···"

"그래도요."

그런 가영의 옆으로 잽싸게 접근해서 짐을 나눠드는 척 하며 그녀를 사건 현장을 향해 인도하니 지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영을 상대로 하소연을 했다.

"아니, 엄마 이것 좀 봐. 먼저 가서 불 좀 피워놓으라고 보내놓으니까 그새 잔디밭을 홀라당 해드셨어."

언니한테 잡혀사는 처지인 세나를 안쓰럽게 여겨서 어지간하면 은근히 세나 편을 들어주곤 하는 가영이지만 그런 그녀라해도 차마 세나가 잔디밭 위에 만들어놓은 땜빵까지 커버를 쳐주긴 그랬던 모양이다.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그을린 자국을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그런 가영의 반응에 은근히 구원의 손길이 날아들길 기대하고 있던 세나의 표정이 단번에 시무룩해졌다.

"으음··· 세나는 앞으로 불같은 거 만지고 그러면 안 되겠다···"

"그러니까 내 말이. 다행히 이번에는 유한이가 옆에다가 미리 물을 떠다놔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어우···"

사실상 마당 전체를 뒤덮고 있는 잔디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새카맣게 그을려있는 풍경을 상상하기라도 한 것일까.

지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가영도 비슷한 걸 상상한 모양인지 이내 쓴웃음을 지어보였고.

그런 관계로 앞으로 세나는 불 피우기같이 사고를 치게 되면 위험한 사태로 번질 수 있는 노동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설마···'

이렇게 되는 걸 노리고 일부러 각을 잰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까 아까 가영이 앞으로는 이런 거 안 해도 된다고 했을 때 입꼬리가 살짝 말려올라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몰라 다시 살펴보니까 제 딴에는 불 피우는 자신의 모습이 좀 있어보인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입술을 삐죽하고 내민채 있어보일 기회를 압수당한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더라.

'그래··· 그럴 리 없지.'

"아무튼 세나랑 유한이 둘다 불 피우느라고 고생했고, 앉아서 좀 쉬고 있으렴. 금방 구워줄테니까···"

그리 말한 가영이 화로 옆에다가 가져다놓은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다가 별장 안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을 척척 올려놓았다.

"아냐, 엄마. 굽는 건 내가 할게."

"응? 지나 네가?"

"어, 그러니까··· 아까 뭐 비빔국수였나? 그거도 하신다면서? 그거나 하고 계셔요."

굳이 사양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걸까.

"그럴래 그럼?"

가영이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렇게 가영이 지키고 있던 화로 앞을 꿰차는데 성공한 지나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ㅡ

"유한아? 누나 좀 도와줄래? 잠깐이면 되니까."

다름아닌 날 자기 옆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응? 지금?"

"어, 지금."

그에 천천히 뒤로 물러나던 가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가영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 때문에라도 멈칫할 수밖에는 없었건만 지나는 가차없었다.

"뭐해? 얼른."

아주 잠깐 멈칫했을 뿐인데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된 재촉이 즉각 날아들더라.

그걸 상대로 차마 고개를 가로젓거나 그러지 못했던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별개로 표정만큼은 단호했기 때문이었고.

"아, 응."

그렇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지나의 옆으로 가서 섰는데··· 이번에는 옆얼굴 쪽으로 따끔따끔한 시선이 푹푹 박혀들기 시작했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게 그리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까 해변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놓고 야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저녁 준비를 도울 뿐이니 그렇게까지 막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판단한 것일까.

'하긴 밥도 먹어야 되니까.'

언제까지 기싸움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

쭉 굶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뭐 도와주면 되는데?"

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하길래 날 여기까지 부른 걸까.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리 물었건만 정작 요구받은 건 간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아, 별건 아니고 옆에 있다가 꼬치 하나씩 건네주면 돼."

그 말을 듣자마자 고작 그런 거나 시키려고 여기까지 부른 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밖으로 내지는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누나."

"응?"

"할 거면 장갑같은 거라도 끼고 해."

말해 무엇하랴.

지나는 지금 맨손이었다.

물론, 맨손이라고 해도 본인이 조심만하면 델 일은 없겠지만··· 원래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니까.

난 어디까지나 그 점을 걱정해서 그리 말했던 것이었는데 내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지나의 입꼬리가 위로 팍 솟구쳤다.

"왜?"

"···응?"

"혹시 누나가 데기라도 할까봐 걱정되서 그래?"

"어, 뭐···"

당연한 걸 굳이 물어보는 저의가 뭘까.

괜히 사람 부끄럽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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