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으음···"
"아무튼 얼른 나오기나 해. 누나가 여기서 신선놀음 하고 있는 동안 지나누나하고 나하고 고모하고 셋이서 저녁 준비 다 했거든?"
할 말이 없는지 애꿏은 입술만 오물대던 세나를 물 밖으로 끄집어내는데에는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나 가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무려 지나까지 저녁 준비에 힘을 쓰는 동안 혼자서 탱자탱자 낮잠이나 자고 있었다는 사실에 찔끔했던 것일까.
호다닥 물 속에서 빠져나온 세나가 온몸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만ㅡ
"그··· 호, 혹시 언니 화났냐?"
대뜸 그렇게 묻더라.
"응? 지나 누나? 지나 누나가 왜?"
"아, 아님 말고!"
내게 확인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찔리는 점이 없지는 않았던 걸까.
샤워 대신 머리만 대충 말리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재등장한 세나가 답지 않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나가 맡게된 임무가 바로··· 불 피우기였다.
물론, 지나한테 적당히 짬을 당한 결과였고.
일단 짬을 때려놓기는 했는데 막상 세나한테만 맡겨놓으려니까 영 안심이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내가 감시자겸 조수로 세나의 옆으로 따라붙게 되었다.
정말로 솔직하게 말을 하면··· 믿음이 가질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긴 했다.
방송 중이었다면 그나마 좀 믿을만 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잘할 수 있겠어?"
그래서 그리 물었더니만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기가 차다는 느낌이 듬뿍 담긴 코웃음이었다.
"하··· 아니, 뭐 나무 비벼서 불 피워야되는 것도 아니고 토치도 있고 숯도 있고 다 있구만 못할 건 또 뭔데?"
"음··· 일단 옆에 물이라도 좀 떠다놓을까? 혹시 모르니까···"
"아, 됐고! 거기서 얌전히 감탄할 준비나 하셔. 내가 오늘 화력이라는 게 뭔지 보여줄테니까."
믿어주고 싶어도 도저히 믿음이 가질 않아서 못 미더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만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여자로써의 뭔가가 자극받기라도 했는지 세나가 과할 정도로 자신감을 내비췄다.
그 모습을 보니까 더 믿음이 안 가는 건 대체 왤까.
'역시 물 정도는 떠다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 핑계를 대고 잠시 자리를 비우자니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것 같고··· 어쩐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아니면 필요한 거라던지···"
"필요한 거? 음··· 장갑?"
그러고 보니까 장갑같은 것도 안 끼고 있더라.
쫄보 주제에 대체 무슨 깡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장갑? 알겠어. 창고 함 찾아보고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봐."
"오야."
그렇게 창고를 뒤져서 찾아낸 장갑 한 켤레를 주머니 안에 쑤셔넣은 다음 그 근처에 있던 양철 양동이에 수영장 물을 잔뜩 채워서 세나의 곁으로 돌아갔다.
"아니, 물 안 떠와도 된다니까···"
"뭐래, 밥 다먹으면 끄긴 해야될 거 아냐."
"그래서 장갑은?"
"자."
양동이부터 내려놓은 다음에 주머니 안에 쑤셔박아두었던 장갑을 꺼내서 내미니까 세나가 꽤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내가 내민 걸 받아들었다.
"뭐야 우리나라꺼랑 생긴 게 똑같네?"
"우리나라에서 수입한 거 아냐?"
"그런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것도 잠시, 세나가 등 뒤로 돌려놓고 있었던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다가 내려놓았다.
휴대폰이라.
잠깐 창고 다녀오는 동안 동영상 사이트에 불 피우는 방법이라도 검색해서 찾아본 걸까.
'으휴···'
거의 뭐 불피우기 전문가라도 되는 것마냥 내 앞에서 허세란 허세는 다 부리더니만··· 그럼 그렇지.
그래도 몰래 예습한 효과가 없지는 않은지 불을 피우기 위한 밑작업을 하는 세나의 모습은 나름 능숙해보였다.
"올··· 좀 있어보인다?"
"흥, 이제 알았냐? 응?"
"어디서 불 좀 피워보셨나 봐요?"
"내가 왕년에 시청자들 마음에 불 좀 지르긴 했지."
"빡치게 해서?"
"아니거든? 남청자들 말하는 거잖아. 남자 시청자!"
"뭐래··· 누나 방에 남자 시청자 거의 없다는 거 오천만 국민이 다 알고 있구만."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팩트였다.
일전에 세나의 방송하고 관련된 이런저런 수치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남녀비율이 아주 그냥 극단적이더라.
열에 아홉 수준이 아니라 백에 아흔아홉 정도가 여자인 수준이라 해야할까.
'생긴 건 참 괜찮은데 말이야···'
이 경우에는 역시 컨텐츠가 문제겠지.
노가리를 까도 같은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주제로만 까고 컨텐츠랍시고 허구헌날 게임만 해대니까 가뜩이나 적은 남자 시청자들이 그 방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나.
"예, 옛날에는 그래도 꽤···"
"암요. 그러시겠죠."
"···"
"어이, 유씨!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불이나 피워! 밥 안 먹을거야?"
"···"
"이러다가 응? 저녁대신 아침 먹겠어?"
"아, 한다고! 하고 있다고!"
휴지를 찢어발기는 손길에 감정이 듬뿍 담겨있는 걸 보면 팩트로 두들겨맞은 게 좀 아프긴 했나 보다.
아무튼 그렇게 미리 차곡차곡 쌓아놓은 장작하고 숯들 아래에다가 잘게 찢은 휴지 부스러기들을 조심스레 밀어넣은 세나가 마침내 토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써먹기 전에 시험삼아 그걸 켜보는데ㅡ
탁···!
그런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확 피어오른 불꽃에 세나가 어깨를 움찔하고 떨면서 상체를 호다닥 뒤로 뺐다.
'으이구··· 쫄았네 쫄았어.'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자기가 자기 손으로 직접 켜놓고서 거기에 쫄았다는 사실이 쪽팔렸던 걸까.
"흠흠··· 화, 화력이 괜찮네··· 새 건가?"
흠흠하고 작게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만 이내 그렇게 중얼거리더라.
그러면서 은근히 내 눈치를 보는데··· 거기에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우러지니까 가관도 그런 가관이 또 없었다.
설마 내가 뭐라도 한 마디 해주길 바라고서 저러는 걸까.
"뭐해? 불 안 붙일거야?"
"부, 붙일 거거든?"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흥."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처럼 코웃음을 친 것 치고는 휴지 부스러기를 향해 손을 뻗는 세나의 몸짓은 이 이상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니···'
누가보면 쌓아놓은게 숯이 아니라 핵폭탄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나도 세나가 다치길 원하는 건 아닌지라 조심하는 거야 좋긴 했지만··· 살짝 과할 정도로 조심스러우니까 답답해서 돌아버릴 것 같더라.
그렇게 내 속이 실시간으로 터져나가고 있던 가운데ㅡ
탁···!
토치가 세나를 쫄게 만들었던 파란 불꽃을 피워올렸다.
세나가 나름 깊숙하게 밀어넣고 있던 손을 쇽 빼낸 건 그와 거의 동시였고.
거의 토치가 켜지자마자 그걸 빼내버렸으니 아무리 휴지를 잘게 찢어놓았다고 한들 불이 붙을 리 있겠는가.
"아니··· 뭐하는데 진짜···"
"부, 붙였는데···"
"됐고, 이리줘봐."
결국 세나한테서 토치하고 장갑을 압수한 다음에 내가 직접 붙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장갑을 벗어 세나한테 돌려주니 불만이 가득해보이는 표정으로 날 향해 눈을 흘기던 세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니 내가 다 준비해놨구만···"
"네네, 알겠으니까. 혹시라도 불 안 꺼지게 잘 보고 있기나 하십쇼."
"우우···! 막타충 꺼져라!"
"알겠으니까 불이나 잘 보고 계시라고요. 불 꺼지면 다시 붙여야되고 그만큼 밥 먹는 시간도 늦어지는 거 알지?"
그나저나 잘 타긴 진짜 잘 타더라.
장작을 높게 쌓아놔서 무슨 캠프파이어마냥 불꽃이 하늘을 향해서 막 솟구치는데ㅡ
"그, 누나?"
"뭐."
"아니 장작 좀 어떻게 해야되는 거 아냐? 너무 높게 쌓은 것 같은데."
자기가 보기에도 좀 그랬던 모양인지 세나가 손에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불 속을 막 쑤셔댔다.
물론··· 상체만큼은 여전히 최대한 뒤로 젖히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부지깽이로 불 속을 슉슉 쑤셔대던 것도 잠시, 세나가 불 속에 밀어넣고 있던 걸 밖으로 빼내며 크으하고 뭔가에 취한 듯한 소리를 냈다.
"크··· 방금 봤냐?"
"응?"
"누나가 이걸로 불 막 헤집는 거 봤냐고."
보기는 봤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솔직히 좀 있어보였지?"
"뭐래···"
그럴 거면 상체나 좀 제자리에 가만히 두고 그렇게 말하던가.
무슨 림보라도 하는 것처럼 상체를 뒤로 쭉 젖힌채로 그래놓고서는 그렇게 물어봐야 내가 돌려줄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또또 인정 못하고 억지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방금 본인의 모습이 뭔가 좀 캠핑의 프로같고 그래보였던 모양인지 세나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방금까지 불 속에다가 밀어넣고 있었던 부지깽이로 화로 옆부분을 탁 쳤다.
팅···!
그러면서 터져나온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피어오른 건···
"으악···!"
"야, 이 미친···!"
대량의 불똥이었다.
그렇게 잔디밭 위로 후두둑 떨어진 것들이 이내 잔디밭 사이로 허연 연기를 솔솔 피어올리기 시작했다.
연기만 피어오르고 끝났다면 참 좋았을텐데 애석하게도 열대의 햇빛 아래에서 잘 마른 잔디는 아주 좋은 땔감이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불똥에 불과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불꽃으로 진화를 해버렸다.
"불··· 불···!"
뭐, 불꽃이라고는 해도 크기 자체는 아직 촛불 수준에 불과하긴 했지만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 세나가 저러고 있는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어휴··· 어째 불안불안하더라니만···"
"지금 그런 거나 따지고 있을 때야···?! 불 났잖아 불···!"
"네네, 알겠구요. 그 옆에 있는 양동이나 좀 줘봐."
"아···!"
그제서야 내가 아까 떠다놓은 것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 것일까.
저러다가 고개라도 삐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퍽 격렬하게 고개를 붕붕 흔들어대던 세나가 이내 제 뒤쪽에 놓여져있던 양철 양동이를 집어들었다.
"끄으응···!"
가득 채워놓은 것도 아니건만 그럼에도 양동이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던 걸까.
낑낑대는 소리와 함께 날 향해 다가오는 세나의 걸음걸이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
저거 설마?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설마가 사람 잡더라.
은빛의 양동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물이 크게 출렁거리더니 딱 그 방향에 맞춰서 세나의 몸이 기우뚱하고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엑···!"
그러더니 이내 화려하게 나자빠지더라.
촤아악하고 물이 쏟아지며 나는 소리 뒤로 따라붙은 '태앵···!'하는 소리가 참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아니이···'
어이라는 놈이 짐을 싸서 가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가운데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일단 잔디밭을 살라먹고 있던 불은 꺼지긴 꺼졌다는 점이었다.
"뭐하는 거야 진짜···"
"씨이이···"
"어휴···"
쓰잘데기 없이 우쭐댈 때부터 어째 불안불안하더라니만 아주 그냥 사고를 종합선물세트로 쳐주시는 구만.
"턱 괜찮아? 세게 부딪혔어?"
라는 걱정어린 물음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나의 시선은 줄곧 제가 태워먹은 잔디밭쪽에 꽂혀있었으니까.
"바베큐 준비를 하라고 했지 잔디 바베큐를 하라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