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1부
그런 식으로 유한이 가영과 지나의 도움을 받아 명경지수와도 같은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 유한과는 다르게 세나는 초조함에 휩싸여있었다.
초조함의 원인이야 말할 것도 없이 유한이었다.
정확히는 유한과 유한의 행동으로 인해 피어난 것이라고 해야할까.
처음에는 이렇다할 존재감조차 없어서 그 주인조차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어느새 산만큼 쌓여서 세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씨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것도 잠시, 결국 그런 식으로 시간을 때우는 데에도 질려버린 세나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얼굴 가득 머금은채 들고 있던 것을 거칠게 침대에다가 내려놓았다.
졸지에 꿀밤을 한 대 얻어맞게된 침대가 삐걱하는 소리를 내며 이러면 곤란하다고 호소해왔지만 세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눈을 흘기기 바빴다.
문이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것도 잠시, 이것도 다 헛짓거리라는 걸 깨달은 세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침대에다가 몸을 뉘였다.
"에효···"
단적으로 말하자면 심심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것도 이제 질려버렸으니까.
컴퓨터는 당연히 무리겠지만 어떻게 방에 있는 노트북이라도 하나 챙겨줬다면 그걸 가지고 놀 수 있기라도 했을텐데 손이 이렇다보니까 그마저도 허락받질 못했다.
거기에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기도 좀 그렇다보니··· 조금씩 답답함이 쌓여만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정말 사실대로 말하면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 진짜 원인이란 다름아닌··· 최근들어 유한이 보이는 몇 가지 행동들이었다.
유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는 짓만 보면 꼭 이쪽을 유혹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 그런 것치고는 담백한 느낌이 강했으니까.
"으으···!"
그것 때문에 이쪽은 진짜 죽을맛인데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놓고서는 자긴 아무 상관 없다는 것처럼 행동해버리니까 분노가 끓어오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퍽···! 퍽···!
어느새 반대로 돌아누워서 그나마 멀쩡한 왼손을 이용해 베개를 두들기고 있는 것도 사실은 그래서였다.
자기라고 참고 싶어서 참는 것이겠는가.
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그러고 있는 것 뿐인데 먼저 자극해놓고서는 하고 싶어지면 말하라니.
"저번에도 지가 먼저 달려들었으면서···!"
또 그러려니까 새삼 민망하기라도 했던 걸까.
그래 그런 게 틀림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쪽이 하고 싶다고 먼저 매달리는 꼴을 보려는 것이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말려죽이려는 것처럼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뭐, 솔직히 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긴 했다.
처음에는 진짜 죽을만큼 아프긴 했지만··· 마지막에는 꽤, 아니 상당히··· 좋았으니까.
다른 여자들이 왜 그렇게 섹스에 목을 매는지 알 것도 같달까.
그만큼 기분 좋으면서도 중독적인 감각이었다.
그런 걸 또 느낄 수 있다면 자존심 한 번 굽히는 것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랬다.
그러니 굽히려거든 얼마든지 굽힐 수 있긴 했지만··· 왠지 그러기 싫었다.
'보나마나 기고만장해할텐데 그 꼴을 어떻게 보냐고··· 으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치가 떨릴 정도인데 그걸 실제로까지 봐야한다?
그러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게 될지도 몰랐다.
그만큼··· 유한은 얄미울 때는 지독할 정도로 얄미운 타입이니까.
그러니 그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아야 하는데··· 참는 게 맞는데···
'미치겠네 진짜아···'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쾌락이라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을 때라면 또 모를까 유한으로 인해 그 감각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더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한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까.
알아버렸으니까.
그 짜르르한 감각이 얼마나 달콤하면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를 말이다.
차라리 쌓인 걸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그조차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유한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라해도 그랬다.
'왜 걸려가지고···!'
그럴 수밖에 없는게 일전에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했다가 그걸 유한한테 들켜버렸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막 혼자서 해결한다고 끙끙대고 있떤 현장을 적발당하거나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때 병실 안에는 자신 뿐이었으니까.
끝날 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도··· 유한은 자신이 혼자 몰래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흔적이 남아있어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는 억지로 모르는 척을 하는데 그게 사람을 더 쪽팔리고 민망하게 만들더라.
'모르는 척 할거면 끝까지 철저하게 모르는 척 하던가···!'
가끔씩 자기도 모르게 티를 내서 더 그랬다.
그렇다보니 지금처럼 병실에 홀로 남겨져있어도 섣불리···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 유한이 그 사실을 또 눈치채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때는 정말로 세계 최초로 쪽팔려서 죽은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돈 내줄테니까 옆방 쓰라고 했을텐데.
그랬다면 나가는 돈은 두 배가 되었겠지만 이 정도로 쪽팔리고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을테니까.
'지금이라도···'
병실을 따로 쓰자고 해볼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또한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기가 좀 그랬다.
여태껏 같이 지내면서 문제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잘 지내놓고서 이제와서 방을 따로 쓰자고 하기에는 뭔가 좀 그랬으니까.
민망하달까.
그리고 환자도 아닌 유한에게 병원 측이 방을 내어주긴 할지 의문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이제 집에 가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엄마하고 언니가 어떤 마음으로 유한을 이곳에서 지내게 했는지 모르지 않다보니까 그 부분만큼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 가끔씩은 도움이 되긴 하니까.'
나름 고민을 해본다고 해봤는데 결국 또 돌고 돌아서 원점이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이··· 뭐라 설명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애매하게 답답한 것을 시원하게 뻥 뚫어버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순간 띡하고 카드 찍는 소리가 났고 그걸 듣고 내심 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못 참고 한창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면 딱 들켜버리고 말았을테니까.
"···뭐야, 왔냐? 오래 걸렸네?"
"아, 응. 지나 누나 좀 배웅하느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걸렸네."
그리 말하는 유한의 손에는 편의점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봉투 하나가 들려있었다.
"뭐냐 그건?"
"아, 이거?"
왜 묻는 말에 대답은 안하고 쓸데없이 저런 표정인 걸까.
당한 게 있다보니까 그 의뭉스러운 표정마저도 얄밉게 느껴져서 관심없는 척을 하고 있으려니 성큼성큼 다가온 유한이 들고 있던 것을 침대 위에다가 턱 내려놓았다.
"누나 선물."
"선물은 무슨···"
"싫어? 싫으면 말고."
"···됐고. 줘봐. 뭔지 보기나 하게."
선물이라며 내려놓을 때는 언제고 치사하게 회수해가려고 하길래 잽싸게 낚아채서 가져왔다.
그렇게 가져온 봉투 안에는 육포같은 걸 비롯해 간식하고 안주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짠맛나는 것들보다는 단맛이 나는 게 취향이었기에 살짝 심드렁하게 봉투 안에 든 것들을 뒤적이고 있으려니까ㅡ
"짠ㅡ!"
유한이 입고 있던 상의를 까뒤집으며 그 안에서 또다른 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러더니 그걸 살짝 흔들어보이면서 한다는 말이ㅡ
"오늘 저녁에 몰래 한잔 콜?"
그것이었다.
말해 무엇하랴.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건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원을 받고 파는 맥주들이었다.
무슨 광고촬영이라도 하듯 그 중에 하나를 꺼내서 살짝 흔들어보이는 꼴을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니가 무슨 수학여행온 고딩이냐?"
"아, 왜? 좋잖아. 콜?"
확실히··· 좀 땡기기는 했다.
유한의 손에 들려있는 캔맥주가 냉장고에서 갓 꺼낸 것처럼 시원해보여서 더 그랬다.
"들키면 잔소리는 네가 다 듣는 거지?"
"에이, 반반으로 합시다. 반반으로."
"내가 왜?"
"아이, 설마 내가 마시고 싶어서 사왔겠어? 누나가 병실 안에만 있느라 답답해하는 것 같으니까 그걸 어떻게 좀 풀어주려고 사온 거 아냐."
솔직히 그 말에는 살짝 뜨끔하긴 했지만··· 최대한 티내지 않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병실 한쪽에 있는 냉장고를 가리켰다.
"일단 냉장고에다가 넣어놔. 미지근해지만 안 되니까."
"옙."
"그··· 이것도 일단 좀 숨겨놓고."
"응? 이것도?"
'굳이?'라는 표정으로 묻길래 단호하게 반박해주었다.
"어, 구성이 딱봐도 안주잖아. 술마실거라고 티낼 일 있냐."
"아항."
눈에 안 보일 때는 얄미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 저렇게 이제 좀 알겠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해대는 꼴을 보니 아까처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지나 술자리 전 마지막 고비라 할 수 있는 저녁식사 및 회진시간마저도 무사히 지나갔고, 그렇게 바깥이 어둑어둑해지자마자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지금?"
"콜."
침대하고 병실 한쪽 구석에 있는 쓸데없이 괜찮은 접객용 테이블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그냥 테이블 쪽에서 먹기로 했다.
그 편이 나중에 치우기 편할 것 같았으니까.
"자, 깔아보아라."
"와··· 누가 보면 상전인줄 알겠네."
"아잇, 팔에 금이 가서 쓸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요. 그럼."
"몰랐는데 왼손도 다치셨나봐요?"
"아앗, 왼손을 너무 많이 썼더니 손목에 무리가아···!"
"으이구··· 진짜···"
깁스 밖으로 튀어나와있는 손가락들을 이용해 왼손목을 움켜쥔채로 아파하는 시늉을 하다가 슬쩍 눈을 떠서 유한의 반응을 확인해보니 유한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살짝 눈을 흘기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한 술상이 테이블 위로 착착 차려졌고, 마지막으로 술자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술이 테이블 위로 등판했다.
"자, 이건 누나꺼."
그 말과 함께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 중에 하나를 앞에다가 척 내려놓은 유한이 참으로 양심없게도 남은 것들을 봉투 째로 챙겨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꺼."
"와, 양심 터졌네 진짜로. 그러지 말고 반띵하시죠?"
"반띵은 무슨··· 환자시면 한 캔으로 만족하시죠?"
"아, 달랑 한 캔은 좀 그렇잖아."
그리 말하기 무섭게 돌아온 건 바람빠지는 소리에 가까운 비웃음이었다.
"뭐래··· 누나 알쓰라서 한 캔만 마셔도 헬렐레하잖아."
"윽···"
팩트라서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왕 마시기로 한 건데 한 캔만 달랑 쥐여주는 건 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어서 작게 꿍얼거리고 있으려니ㅡ
"그리고 그거 대용량이라서 작은캔으로 치면 사실상 두 캔어치거든? 그러니까···"
칙ㅡ!
"괜히 취해가지고 술주정부리지 말고 그거 한 캔으로 만족하시죠?"
유한이 손수 맥주를 따서 권해왔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내심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평범하면서도 화기애애했다.
아무래도 입원 첫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보니까 분위기가 진지해지게 되면 어색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송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진짜 쏜살같이 흘러갔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한 캔밖에 못 마신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좀 아까워서 반 정도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부터는 찔끔찔끔 홀짝이고 있던 맥주도 그야말로 순식간에 바닥이 나버렸다.
혹시 더 달라고 할까봐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이쪽이 캔 하나를 비워내는 동안 유한은 무려 세 캔이나 들이켰지만.
"후우···"
일반 캔맥주에 비해서 큰 거라고 하더니만 그런 걸 무려 세 캔이나 들이켜버리니 취기가 안 오를래야 안 오를 수가 없었던 걸까.
볼은 물론이거니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채 숨을 푸욱하고 내쉬는 유한은 누가봐도 취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숨을 푹푹 내쉬던 것도 잠시, 취기와 함께 잠기운도 같이 몰려왔는지 유한이 소파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야, 잘 거면 침대가서 자. 괜히 소파에서 졸지 말고."
고개를 자꾸만 앞쪽으로 꾸벅꾸벅하는 것이 금방이라도 테이블 위로 엎어질 것 같아서 그 모습을 보다 못해 유한의 등을 퍽퍽 두들겨서 침대 쪽으로 내쫓았다.
"으응···"
취한데다가 졸리기까지 하니까 다른 생각같은 건 들지 않았던 것일까.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몸을 일으킨 유한이 그대로 침대 쪽으로 다가가 그 위에 풀썩 엎어졌다.
문제가 있다면 침대를 잘못 찾아갔다는 것 정도?
"어휴··· 저 진상 저거···"
자기 침대도 못 찾아가는 주제에 대체 누구보고 알쓰라는 걸까.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오길래 그대로 피식피식 웃고 있다가 이내 테이블 위에 남은 술자리의 흔적들을 향해 시선을 내던졌다.
"으음···"
아침 회진이라는 명목으로 찾아올 간호사나 의사한테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저것들을 치워야만 했다.
그런데··· 귀찮았다.
그새 깊게 골아떨어졌는지 피유피휴하고 울려퍼지는 유한의 숨소리가 자꾸만 귓속으로 흘러들어와서 졸리기도 했고.
"에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치우지 뭐.
아침 회진이라며 찾아오는 건 보통 열 시니 그 전에만 일어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상대로 지켜질리 없는 약속을 남발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세나는 졸지에 눈앞에서 다른 침대에게 주인을 빼앗겨버리고만 유한의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그대로 그 위에 풀썩 엎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사실상 침대 위에 눕자마자 잠들어버렸던 세나의 눈을 다시 뜨이게 만든 것은ㅡ
'읏··· 오줌···'
꿀꺽꿀꺽 들이켰던 맥주가 빚어낸 요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