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1부
생각은 좀 해봤냐니.
말을 할 거면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하던가 앞뒤를 다 잘라놓으면 나보고 대체 어떻게 알아들으라는 걸까.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기 무섭게 일전에 세나로부터 받았던 제안의 내용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방송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지.
겸사겸사 같이 스트리머 대난투인지 뭔지도 출연하고 말이다.
이런 말을 하면 세나한테 참 미안하긴 하지만 생각해본 적은 딱히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요 며칠동안 내 머릿속은 지나 전용이었으니까.
지나와, 지나와 관련된 것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던 탓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 자체가 없었다.
진실은 그랬지만ㅡ
"알겠어. 하지 뭐."
세나의 물음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수락의 뜻을 밝혔다.
애초에 생각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더 많은 정력제, 아니 캐쉬가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면 10개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더라.
나는 '무려' 열 개라 생각했는데 지나를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으니까.
'무려' 열 개가 아니라 '꼴랑' 열 개였다는 걸.
뿐만 아니라 여유가 된다면 정력제말고 다른 것들도 좀 구매해서 써먹어보고 싶었고.
'눈 여겨봐둔 것도 몇 개 있고.'
그러니 어떻게든 돈 나올 구석을 마련해둬야만 했고, 그 점을 고려하면 방송을 시작해보는게 어떻냐는 세나의 제안은 내게 있어 차선, 아니 사실상 최선의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단순히 돈만 보고 방송을 시작하는 거라면 아무리 좋아도 차선 수준에 그쳤겠지만, 내가 방송을 시작하려고 하는 데에는 돈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건 세나하고도 관련이 있었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마치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세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진짜?"
"못 믿겠으면 하지 말까?"
"응, 안 물러줘. 낙장불입이야."
대체 콘텐츠 제작 지원권이 얼마나 가지고 싶었길래 벌써부터 저렇게 김칫국을 왕창 들이키고 있는 걸까.
공방이 열리려면 아직 삼주 정도 남은 걸로 기억하는데 세나의 표정만 보면 이미 우승을 확정지은 듯 했다.
뭘 믿고 그토록 확신하는 건지 나야 도저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세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확 변하니 옆에 앉아 우리 둘의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던 가영의 얼굴 위로 의아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둘이 또 방송 같이하기로 했니?"
"으, 응? 아, 응!"
그와 함께 던져진 물음에 세나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럴 수밖에.
다른 이도 아니고 가영을 상대로 거짓말 비스무리한 걸 하려니 마음에 편치 않을테니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전에 그와 관련해서 세나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만약 내가 그녀가 제안한대로 방송을 시작하게 된다면 당분간은 그 사실을 좀 숨겨줄 수 있겠냐고 부탁아닌 부탁을 해두었으니까.
방금 가영의 물음에 적당히 얼버무린 것도 분명 그것 때문이었으리라.
물론, 계속 숨기긴 힘들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집이 넓긴 해도 결국 같은 공간이니만큼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아직 정해진 것 하나 없긴 하지만 하루의 태반을 바깥에서 보내는 가영과는 달리 나와 이래저래 시간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 지나는 아마 금방 눈치채지 않을까.
그렇기에 언젠가는 내 입으로 직접 밝힐 생각이었다.
'일단 맛부터 좀 보고.'
어쩌면 몇 번 해보고 나랑은 너무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 접을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설레발을 떨긴 좀 그렇지 않은가.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했던 건 그래서였다.
아무튼 그렇게 세나의 제안을 받아들이니 세나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왜 존재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역시 방송하고 관련이 있는 문제라서 그런 걸까.
밥 먹고 방에 드러누워 쉬고 있으니까 바로 올라오더라.
쿵쿵쿵ㅡ!
"헥, 야! 문 열어!"
거 계단이라고 해봐야 스무 개도 안 되는데 뭘 또 저렇게 헉헉대는 걸까.
멀쩡한 손 내버려두고 굳이 발로 문을 걷어차대는 이유는 또 뭐고.
지나의 흔적이야 아까 방으로 올라오자마자 전부 치워버린지 오래였기에 궁시렁거리면서도 거리낌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렇게 문앞으로 다가가 굳게 닫혀있던 걸 열어제끼고 보니 세나가 왜 그토록 헉헉댔던 건지를 알 수 있었다.
그야 저런 걸 들고 계단을 올라왔으니 당연히 헉헉댈 수밖에.
"비켜, 비켜!"
"아, 응."
저 컴퓨터는 또 어디서 꺼내온 걸까.
옆으로 비켜서기 무섭게 쪼르르 방안으로 달려들어와 들고 있던 것을 소파 위에 내려놓은 세나가 그 옆에 철푸덕 널브러졌다.
'으이구···'
그 와중에 컴퓨터를 내려놓는 손길만큼은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것이 좀 귀엽긴 했다.
"으아··· 개 힘들어···"
"그럴 거면 그냥 나 부르지 그랬어."
"됐거든. 약해빠진 게."
"뭐래. 내가 누나보다 힘 셀걸."
중증 집순이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까부는 걸까.
"흥, 헬스 좀 했다고 누나한테 까부냐?"
물론, 세나의 생각은 좀 다른 듯 했지만.
아주 그냥 콧방귀까지 뀌어대는게 가소릅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귀여웠다.
마치 치와와가 깝죽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그건 갑자기 왜 들고 온 건데."
"아, 이거? 송출용."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의 용도였다.
그래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리고 있으니 귀여운 배꼽을 살짝 드러내며 소파 위에 축 널브러져있던 세나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이제 모니터 들고 와야지···"
"갈거면 같이 가."
내 도움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듯 센 척은 다 하더니만 그런 것치고 내 도움을 굳이 거절하지 않는 걸 보면 힘들긴 했나 보다.
그렇게 세나를 도와 그녀가 스튜디오로 사용하는 방 구석에 고이 놓여있던 구식 방송장비들을 하나하나 내 방으로 실어다 날랐다.
뭐, 구식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세나 기준일 뿐이고 짬짬히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까 아직 대부분 현역으로 쓰이고 있는 것들이더라.
"일단 이 정도만 갖춰두면 당분간은 쓸만할 거야."
그래서 중고라도 가격이 꽤 나갔다.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하려는 사람이 쓰기에는 좀 많이 과분한 정도?
안 써서 방 구석에다가 처박아둔 장비들이 그 정도인데 세나 방에서 현역으로 구르고 있는 것들은 대체 얼마일까.
궁금한 마음에 그나마 덜 비싸보이는 것중에 하나를 콕 찝어서 저런 건 얼마나 하냐고 물어봤더니만 세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가격을 입에 담았다.
"왜? 너도 하나 사줄까?"
그러더니 대뜸 그리 묻더라.
물론, 거절했다.
어디다가 쓰는 지도 모르는데 가지고 있어봐야 돼지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 꼴 밖에는 되지 못할게 뻔했으니까.
"그래? 그래도 나중에 필요하다 싶으면 말해."
아니, 그러니까 저는 저게 뭐하는 장비인지도 모른다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세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녀를 돕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끄으으응··· 더럽게 무겁네 진짜···!"
거의 자기 상체만한 모니터를 품 안에 안아든채 앞장 서서 계단을 오르고 있던 세나가 중심이라도 잃었는지 갑자기 몸을 휘청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러니까 같이 들어주겠다고 할때 순순히 한쪽을 내놓을 것이지 왜 굳이 고집을 부려서는ㅡ
이를 악물며 박스를 받치고 있던 손 중에 하나를 떼어내어 계단에 달린 난간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배에 가져다 붙이고 있던 상자를 뒤로 내던지다시피 하면서 내쪽을 향해 기우뚱하고 기울어지는 세나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물론, 다리에 힘을 빡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내 몸을 포함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동원해서 세나의 몸을 떠받치는데 성공한 순간 졸지에 내게 몸을 기대고 선 꼴이 되어버린 세나의 귀에 대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뭐하는 거야. 진짜···! 그러니까 내가 같이 들자고 했지?"
그리 말하며 세나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살짝 주니 '으악!! 넘어진다!!'라고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세나가 흠칫하고 몸을 떨어댔다.
그 와중에 품에 안고 있는 모니터가 자기 몸보다 더 소중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온몸을 이용해 감싸고 있어서 더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한숨을 푹 내쉬니 뜨거운 것이 귀에 난 솜털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이상하기라도 했는지 세나의 움찔거림이 한층 더 격해졌다.
"···진짜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
"미, 미안!"
"됐고, 얼른 똑바로 서시기나 하시죠. 지금 무거워서 팔 끊어질 것 같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리 말했던 건 묘하게 어색해지려고 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계단 밑으로 굴러간 상자도 다시 주워야했고.
"뭐, 뭐래··· 그 정도는 아니거든?"
"아니기는 무슨··· 누나도 운동 좀 해. 진짜."
"뺄 살이 있어야 하지."
"뺄 살이 없기는 방금 만져보니까 아주 그냥 말랑말랑 하더구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만지기 딱 좋게 말캉말캉한 정도였으니까.
'그러고보면 은근 많이 먹는데도 살은 또 안 찐단 말이지···'
지나야 활동량이 어마어마하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세나는 허구한 날 집에만 있는데도 은근히 많이 먹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꾸준하게 먹는 타입이라고 해야할까.
애초에 월동 준비하는 다람쥐마냥 방 안에 간식거리를 쌓아두기까지 할 정도니 말 다했지 뭐.
그럼에도 저렇게 마른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방송할 때 쓰는 에너지가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일까.
"니가 내 남자친구냐? 내 배가 말랑말랑하든 탄탄하든 무슨 상관인데."
"그냥 신경 쓰이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니가 왜 그걸···"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몸을 팍 떨어뜨리는 이유는 뭘까.
의아한 마음에 세나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그 잠깐 사이에 계단을 무려 세 칸이나 오른 세나가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채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잔말말고 밑으로 굴러간 거나 주워와. 선이 있어야 조립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그러더니 나하고 몸을 꼭 밀착시키고 있었던 탓에 부스스하게 변한 머리카락을 거칠게 흔들면서 모퉁이 너머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2층까지 굴러내려간 것을 다시 주워서 방으로 올라가니 벌써부터 내 책상에 딱 붙어서 모양을 잡고 있는 세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야, 이것들 치워도 되는 거지?"
"응? 아, 응."
방향제부터 시작해서 아마도 전학기 참고서적이었을 것까지.
그것들을 모조리 서랍 안으로 밀어넣어 치워버린 세나가 책상 위에 자리하고 있던 컴퓨터와 연결된 선들을 하나하나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연결된 선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자유의 몸으로 거듭난 본체를 책상 밑으로 내렸다.
"그 상자 열어보면 멀티탭 있을 거거든? 육구 짜리로 하나만 줘봐."
"육구?"
"···구멍 여섯 개짜리 있잖아."
그렇게 세나의 세팅쇼가 시작되었다.
솔직히 컴퓨터 연결하는 거야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모습인데 세나 정도 되는 미모를 지닌 미녀가 땀까지 살짝 흘리면서 그러고 있으니 묘하게 볼만하더라.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입고 있는 옷이 하필 그놈의 후드티라는 것 정도?
어떻게 반팔 정도만 됐어도 더 볼만했을텐데 말이다.
아무튼 땀을 삐질삐질 흘려대길래 보기 안쓰러워서 도와주려고 했더니 거절당했다.
혼자 하는 게 훨씬 편하다나.
그래서 옆에서 보좌하는데 집중했다.
"물 좀 마시고 해 누나."
"어, 땡큐."
목이 마를까봐 물을 떠다가 가져다 바치는 건 물론, 화장실에서 수건을 챙겨와 땀을 닦아주기도 했다.
"뭐, 뭐하냐? 미쳤냐?"
"아니, 땀 흘리길래···"
"땀이야 내가 닦으면 되니까 저리가."
물론, 그런 내 행동에 세나는 온갖 질색을 다했지만.
꿩대신 닭이라고 창문을 열어 방 안을 시원하게 해보려고 해봤지만··· 세나의 모습만 보면 소용없는 듯 했다.
'하긴···'
난방을 이렇게 빵빵하게 틀어놨는데 문 좀 연다고 시원해질리가 있나.
거기에 딱봐도 두꺼워 보이는 후드티에 반팔까지 껴입고 있으니 저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려댈 수밖에.
'안 되겠다.'
세나야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가 안쓰러워서 이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 누나."
"왜."
"옷 좀 벗어봐."
그래서였다.
세나를 향해 대뜸 그리 내뱉었던 것은.
그러자 세나가 반응이랍시고 보여준 건ㅡ
쿵ㅡ!
"···뭐?!"
몸개그였다.
"아윽···!"
세나의 머리와 대차게 부딪힌 책상이 들썩들썩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