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1부
지나가 자괴감에 젖어 몸서리를 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건 유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나와는 그 이유가 좀 달랐다.
지나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이유가 자괴감 때문이라면 유한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이유는 기대감 때문이었으니까.
'시발 어떡하지.'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기대가 되서 미칠 것 같았다.
내심 점심시간이라 내정해두었던 1시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랬다.
시계에서 째깍째깍하는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심장도 거기에 맞춰서 두근두근대는데 솔직히 걱정마저 될 정도였다.
이러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으니까.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이제 몇 분 뒤면 1시인데 열릴 생각이 없어보이는 원장실의 문을 힐끔힐끔대며 혹시라도 머리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옷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부지런하게 점검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양반은 못 되었던 모양인지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11시 30분 타임으로 예약했던 손님이 가영과 함께 원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다음에도 또 부탁드릴게요."
가영의 솜씨가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일까.
누가봐도 굉장히 흡족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얼굴을 한채 내쪽으로 다가온 손님을 빠르게 처리해서 보낸 뒤 그대로 카운터를 빠져나와 가영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니 내 접근을 인지한 가영의 얼굴이 살짝이지만 달아올랐다.
"얼른 가요."
"자, 잠깐만 앞치마만 벗고···"
직원들의 눈치가 보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허둥지둥하며 원장실 안으로 도망친 가영이 이내 앞치마를 벗고 나타났다.
덕분에 얇은 스웨터와 흰색 스키니진으로 감싸인 매혹적인 육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모습이 묘하게 야해서 그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솔직히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누가봐도 한껏 차려입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나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평범한 복장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내게 있어 이건 데이트지만 가영에게 있어 지금부터 할 건 그냥 내게 점심을 사주는 것일 뿐일테니까.
그 간극의 존재가 아쉬웠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겠지.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간극이 메꿔지지 않겠는가.
"가요."
해서 자꾸만 얼굴 위로 떠오르려고 하는 아쉬움을 꾹 눌러 숨기며 앞장을 섰다.
그렇게 가영과 가게를 빠져나가려 하니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을 발견한 주연이 아는 척을 해왔다.
"응? 식사하고 오시려고요?"
"네, 점심 사준다고 하셨거든요."
그러니 끼어들 생각이걸랑 접으라는 뜻으로 단호하게 선을 그어준 뒤 무슨 죄라도 지은 것마냥 주춤주춤하고 있는 가영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가영의 미용실이 자리하고 있는 건물을 빠져나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꼴깍하고 작게 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뒷쪽에서 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유한아."
"네?"
"혹시 먹고 싶은 거 있니···?"
그리 묻는 걸 보니 따로 메뉴를 생각해두거나 그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먹고 싶은 거요? 흠, 글쎄요."
"그, 비싼 거도 상관없으니까···"
"고모는요?"
"으, 응?"
"혹시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있으면 그걸로 하자는 뜻으로 그리 말하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영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고모는 아무거나 괜찮아. 그러니까 유한이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저도 그래요."
가영의 말을 중간에 잘라내며 그리 말하니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물음표였다.
그에 몸을 살짝 움츠린채 서 있는 가영을 향해 성큼 다가서며 배시시 웃어보였다.
"고모랑 같이 먹는 거면 뭘 먹어도 맛있을 것 같거든요."
가영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동시에 입술을 한 차례 부르르 떤 가영이 이내 그것을 꼭 깨물었다.
그에 맞춰 입술 아래 작게 찍힌 점이 움찔움찔대는 게 귀여우면서도 야했다.
"아, 그러면 좀 돌아다녀 볼까요? 그러다보면 땡기는 게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래."
어색한듯 하면서도 간질간질한 이 분위기 속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었던 것일까. 가영이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언제 주춤거리고 그랬냐는 듯 성큼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아, 그 전에 잠시만요."
그런 가영의 앞으로 끼어들어 그녀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움찔하고 당황하고 있는 가영을 향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유, 유한아···!"
아직 가게 근처이니만큼 혹시라도 자신의 얼굴을 아는 누군가가 나와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걸 보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일까.
내게 잡혀버린 손과 더불어 몸을 흠칫하고 떤 가영이 그대로 손을 빼내려는 것처럼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잽싸게 깍지부터 끼운 다음, 아까부터 눈에 거슬렸던 것을 그대로 뽑아냈다.
"앗···!"
그리고는 꼭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니 그제서야 내 목표가 왼손에 끼워져있던 낡은 반지였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졸지에 반지를 빼았겨버린 가영의 얼굴 위로 크게 당황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챙겼다.
"이건 잠시 제가 맡아놓을게요."
솔직히 말하면 챙기는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저 멀리 집어던지고 싶었다.
허나 그러는대신 지갑을 꺼내 가영에게서 압수한 것을 조심스레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지갑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되돌린 뒤, 싱긋 웃으며 가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요."
반지를 빼앗은 게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가영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채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그녀를 데리고 근처를 돌아다녔다.
번화가라서 그런 걸까.
주변에는 정말 별의별 시설이 다 있었다.
"어? 영화관이다."
"····"
"고모, 저희 영화나 한 편 볼까요?"
"바, 밥 먹기로 했잖니···"
"밥이야 팝콘같은 걸로 때우면 되죠."
그리 말하며 그대로 영화관으로 향하려하니 가영이 황급히 손을 뻗어 내 옷깃을 움켜쥐었다.
"이, 이제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으니까··· 안 돼···"
정확히는 한 시간하고도 16분이 더 남은 상태였지만, 확실히 영화 한 편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긴 했다.
단편영화라도 상영하고 있지 않는 한 그렇겠지.
"아, 그렇네요···"
그래서 살짝 실망한 척 시무룩해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리니 뺨을 빨갛게 물들인 채 안절부절 못 하던 가영이 이내 눈을 질끈 감더니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여, 영화는··· 나, 나중에 봐도 되니까···"
"나중이요? 나중이 언젠데요?"
"으, 응···?"
"방금 나중에 보자고 하셨잖아요."
"그, 시간 있을 때···"
"···약속하신 거예요?"
그리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척 내미니 그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흠칫하고 떤 가영이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며 조심스레 손가락을 걸어왔다.
그에 만족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가영의 손을 꼭 움켜쥐고는 그대로 그녀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자, 잠깐만···!"
진짜 왜 이렇게 귀여운 걸까.
사소하기 그지없는 스킨십 하나에도 이런 식으로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라니.
허둥지둥하며 내게 잡힌 손을 빼내려하는 가영을 향해 잽싸게 덧붙였다.
"점심먹는 동안만요."
"····"
"그 시간동안만이라도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역시나 그게 걱정이 되었던 것일까.
"···그럼 모자끼리 사이가 참 좋구나 하겠죠."
그런 말을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목소리를 살짝 낮게 깔고 그리 말하니 어디선가 꼴깍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휴우하고 짤막하게 한숨소리가 들려오더니···
"···저, 점심시간 동안만이다···?"
조건부 허락이 떨어졌다.
"···네!"
그에 활짝 웃으며 가영에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러자 안 그래도 빨갛게 물들어있던 가영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지만 그녀는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누구하고 손을 꼭 잡고 있는 게 어색한지 내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기만 할뿐.
"그나저나 빨리 골라야겠네요. 뭐 먹을까요?"
그런 가영을 슬금슬금 잡아끌며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 눈에 띈 돈가스 가게로 향했다.
내 선택에 가영은 좀 더 비싼 걸 골라도 괜찮다며 살짝 난색을 표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가게 안으로 입성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와 가영을 발견한 점원이 우리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어, 어서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네."
"그럼 자리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꾸만 내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점원의 안내를 받아 가영과 마주보고 앉게 된 순간, 자리에 꽂혀있던 메뉴판을 꺼내 테이블 중간에 놓고 펼쳤다.
"종류가 엄청 많네요. 뭐로 할까요?"
"그, 아무거나 고르면···"
"아니죠. 이왕 먹는 거 맛있는 걸로 먹어야죠."
진짜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나와 단둘이 마주보고 앉아있는게 그리도 낯설었던 걸까.
묘하게 초조해보이는 가영을 상대로 단호하게 말하고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올려 근처에 있던 점원을 호출했다.
"그, 여기요."
"네? 아, 네!"
날 보고는 순간 멈칫했던 것도 잠시, 맞은 편에 앉아있는 가영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접객모드로 회귀한 점원을 상대로 메뉴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음, 로스까스도 어떠세요? 아, 남성분들은 치즈동 많이 드시더라구요."
"치즈동이면 이거요?"
"네. 아, 혹시 너무 느끼할 것같다 싶으시면 칠리치즈동도 추천드립니다."
"이거는요? 둘이 먹기에 괜찮을까요?"
"커플세트요?"
"네."
점원의 입에서 커플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맞은 편에서 움찔거림이 일었지만 모르는 척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보통 이것저것 다양하게 드시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이들 시키시더라구요."
"흐음···"
"커플세트로 하시겠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사이드는···"
"이 중에 하나 고르면 되는 거죠?"
"네."
덮밥이랑 소바랑 우동이라.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가영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져보니 커플세트가 튀어나온 시점에서 이미 한계였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던 가영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긴 괜찮으니까 내가 알아서 고르라는 걸까.
그래서 우동으로 골랐다.
소바로 하자니 바로 조금 전까지 살짝 쌀쌀한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온 탓에 영 땡기지가 않았으니까.
"커플세트에 사이드는 우동 맞으시죠?"
"네."
주문한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나왔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것을 들고온 점원을 돌려보내고 있으니 어느새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든 가영이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던 것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기 시작했다.
그런 가영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가영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던 커다란 새우튀김을 집어들어 초록색 점들이 콕콕 박혀있는 새하얀 소스를 듬뿍 찍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한입 크게 베어무니···
와사삭ㅡ
눈꽃같던 모습을 하고 있던 튀김옷이 경쾌하게 부숴져내리며 그 안에 감춰져있던 것이 혀를 뜨끈하게 적셨다.
'어우, 이 집 잘하네.'
튀김도 튀김인데 소스가 사기였다.
안에 박혀있는 초록색이 뭔가 했더니만 청양고추를 잘게 썰어놓은 것이더라.
덕분에 자칫 잘못하면 느끼해질 수도 있었던 것을 알알히 박혀있던 청양고추가 싹 잡아주고 있었다.
"고모,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호들갑을 떨며 그것을 가영을 향해 내밀었던 건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좋은 건 공유해야하지 않겠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내 행동에 가영은 어쩔 줄 몰라했다.
"고, 고모가 직접 먹을게···"
"그러지 마시고 얼른요."
그리 말하며 젓가락을 쥔 손을 살짝 흔들어보이니 그 모습이 불안해보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어쩔 줄 몰라하던 것도 잠시, 가영이 눈을 질끈 감더니 도톰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는 고개만 살짝 앞으로 내밀어서 내가 내민 것을 조심스레 베어물었다.
와삭ㅡ
그렇게 베어문 것을 오물오물거리던 것도 잠시, 가영이 놀란 듯 감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쵸? 맛있죠?"
그 타이밍에 맞춰서 가영과 똑바로 시선을 맞춘 채 배시시 웃어보이니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가영이 멈칫하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덕분에 살짝 풀어졌던 분위기가 다시금 어색하게 변해버렸지만 내겐 오히려 그 편이 기꺼웠다.
날 대하는 게 어색하다는 건 가영이 날 이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기꺼운 마음으로 식사에 임할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이제 식사도 끝났으니까···'
남는 시간을 뭘하면서 보낸다?
고민에 빠진 나와는 달리 가영은 그대로 가게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가게가 자리하고 있는 방향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길래 돈가스 가게를 빠져나오자마자 일찌감치 확보해둔 가영의 손을 잡아당겨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어디가시려고요? 고모?"
"그, 밥 다 먹었으니까···"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나온 덕분에 아직 40여분 정도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진짜 밥만 먹고 돌아가려고 할 줄이야.
안 되겠구만 이거.
"그으··· 그래도 빨리 돌아가는게···"
"아무리 그래도 소화는 시켜야죠."
그리 말하며 가영을 그녀가 향하려 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희 조금만 쉬었다가요."
싱긋 웃으며 마침 눈에 들어온 건물을 향해 가영을 잡아끌기 시작하니 가영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느새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새빨간 글씨로 모텔이라고 적혀있는 간판에 못 박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