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1부
찬합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것들과 똑같은 게 들어있겠지하고 생각하며 도시락 뚜껑을 열어젖힌 순간 가영의 눈으로 들어온 건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장어였다.
그렇기에 그걸 보고 가영이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유한은 알고 있을까.
이성에게 장어를 먹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특히나 남자가 여자한테 장어를 먹이는 건·· 그걸 먹고 힘내서 자길 실컷 따먹어달라고 어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야.'
유한이 보고 있기에 차마 겉으로 그러지는 못하고 속으로나마 고개를 가로저은 가영은 순간 이상한 쪽으로 뻗어나갈 뻔했던 생각을 다급하게 잡아챘다.
그럴 리 없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모를 거다.
그냥 보양식하면 떠오르는 게 장어니까 별 생각없이 이걸 고른 거겠지.
그래, 그런 게 틀림없었다.
틀림없어야 했다.
그러니 당황스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없어야하는데ㅡ
쿵쿵쿵쿵-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자꾸만 빠르게 뛰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살짝 얼굴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순간적으로 입 안이 바짝 마를 정도였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아예 잊고 살았던 감각.
그것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다른 이도 아니고 유한이라는 사실이 또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인데··
"어, 얼른··"
기껏 힘들게 만들어서 가져왔더니만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자신이 답답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대각선 방향에 앉아 이쪽을 자꾸만 힐끔거리던 유한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자기가 내려둔 도시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달칵-
도시락 통이 분리되는 소리와 함께 전복이 나왔다.
거기서 다시 한 번 당혹감을 느꼈다.
전복 다음으로 등장한 샐러드는 그럭저럭 견딜만 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새우, 베이컨, 아보카도, 그리고 토마토가 들어가 굉장히 풍성해보이는 샐러드로 가득 채워진 칸이 유한의 손에 잡혀 슬그머니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얼핏 보인 흰색의 무언가에 내심 안도했다.
보아하니 마지막 칸의 내용물은 밥인 듯 했으니까.
장어는·· 솔직히 좀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유한이 이것들을 만드는데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을 헛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에 고맙다고 말하며 식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고르게 펼쳐놓은 밥 위로 떡하니 자리하고 있던 까만색의 무언가가 눈으로 들어온 건 입을 열기 위해 서로 꼬옥하고 끌어안고 있던 것들을 억지로 떨어뜨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식사 하세요··"
열기 때문에 빳빳함을 잃고 흐물흐물한 모습이긴 했지만 그게 어떤 모양인지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모양이었으니까.
그것 때문이었을까.
그것과 비슷한 모양을 한 것이 언제 진정이 되었었냐는 듯 다시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건만 전보다 몇 배는 더 빠른 듯 했다.
··얼굴이 뜨거웠다.
꼭 마치 독한 술을 잔뜩 들이킨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덕분에 깨달아버리고 말았으니까.
유한의 마음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진심에 가깝다는 것을.
동경을 사랑이랑 착각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사춘기를 앓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유한이 보인 행동과 마음을 조금 심하게 열병을 앓고 있어서 그런 것뿐이라고 치부했었다.
당장은 좀 괴롭더라도 언젠가는 결국 나아버리고 마는 것이 바로 열병이다.
그러니 유한도 자연스레 그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유한이 조심스레 펼쳐놓은 것들을 보고 깨달아버렸다.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유한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것을.
부끄러웠다.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 유한을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이로 취급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해놓고서는 정작 아무 것도 모르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낯부끄러움과 함께 찾아온 것은 유한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입을 맞췄을 때 느꼈던 것만큼이나 강렬한 당혹감이었다.
솔직히 자신이 반응을 해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제풀에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보답받지 못하는 짝사랑만큼이나 비참하고 힘든 것도 또 없으니까.
그런 게 처음일게 분명한 유한은 더더욱 견디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허나 유한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버린 이상 이제 더는 그리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건 마치 술과 같아서 취하면 취할수록 사람을 충동적으로 바꿔놓곤 하니까.
유한이 아침마다 잠든 척을 하고 있는 자신을 상대로 하는 행동은 이미 가족이라는 선을 훌쩍 넘어버린 행동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아니, 상상하기 싫었다.
다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자신은 그런 유한의 행동을 절대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로 언젠가는 거절이라는 행위를 해야만했다.
'하지만 어떻게··?'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유한이 받을 상처가 조금이라도 작아질까.
알 수 없었다.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래서였다.
"··모?"
의아한 표정을 한채 자신을 부르던 유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은.
"··고모?"
의아함으로 물든 얼굴.
그 안에 자리한 눈동자 속에는 걱정이라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보자마자 깨달았다.
그건 가족을, 엄마를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걱정하는 눈빛에 가까웠다.
유한이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진심이 듬뿍 담긴 걱정을 받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늘 걱정하는 입장이었으니까.
한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기에 자연스레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약해지면 지나도, 세나도, 유한도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힘들어도, 앓는 소리를 내고 싶어도 꾹 참았다.
그렇게 버텼는데··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유한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니 가슴 속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쿵쿵하고 뛰던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그래 소리로 표현하면 딱 그런 느낌이었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빨개요··"
그렇구나.
난 지금 그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내가 그런 얼굴을 한채·· 너와 마주보고 있구나.
"병원이라도 가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혹시 열이라도 있으시면··"
마치 자기가 아픈 것처럼 허둥지둥하던 유한이 슬그머니 손을 뻗더니 그대로 이마를 덮었다.
그 순간 눈으로 들어온 유한의 얼굴은 아마 지금 자신의 얼굴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새빨갰다.
그 모습이 시야 속으로 파고 들어온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니까 걱정하지 말렴."
이마를 덮고 있던 유한의 손을 잡아 몸에서 떼어내고는 순식간에 몸 안에 가득 차버린 무언가를 하나로 뭉친 다음 그것을 묻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방금처럼 누군가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아본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이라서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계속 그래선 안 되니까.
다시는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깊게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약은 꼭 드셔야 돼요··?"
그리 말한 유한이 숫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자신의 손에다가 쥐어준 건 그 와중이었다.
약을 먹으려면 우선 밥부터 먹어야하지 않겠냐며 식기 전에 먹으라는 유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숟가락을 쥔 손을 움직여 밥을 살짝 떴다.
"앗, 이, 이건·· 그·· 세, 세나 누나가 장난쳤나봐요."
그제서야 밥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척 유한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은 변명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세나도 도와줬니?"
"··네, 옆에서 자꾸 집어먹길래 그럴 거면 포장하는 거라도 도와달라고 시켰었는데."
어색하게 씩씩댈 때는 언제고 이내 살짝 안심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는 유한의 얼굴을 차마 직시할 수가 없었다.
아직 흔들린 걸 다잡지 못했는데 그런 걸 봐버리면 또 흔들릴 것만 같았으니까.
목이 메었다.
그래서 살짝 말아쥔 손으로 가슴께를 두들기고 있으려니 유한이 자리에서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자, 잠시만요··"
뭔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던 것도 잠시, 정수기를 향해 쪼르르 달려간 유한이 물이 가득 들어있는 컵을 양손으로 꼬옥하고 움켜쥔채 자리로 돌아왔다.
"천천히 드세요."
"··그래."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반찬도 집어먹어야 하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뭔가·· 두려웠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나 유한은 그런 자신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쇼핑백 안에서 젓가락을 하나 더 꺼내들길래 같이 먹으려고 하는 줄 알았건만ㅡ
"그, 이, 이거··"
도톰하게 살이 올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장어를 한 조각 집어든 유한이 그것을 그대로 숟가락 위에다가 올렸다.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덜컥하고 흔들렸다.
"그·· 식으면 맛 없어지니까··"
그럼에도 차마 기대로 가득 찬 유한의 시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조심스레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입에다가 넣고 우물거리고 있으니 이쪽의 반응을 살피기라도 하듯 힐끔힐끔 시선을 던져대던 유한이 살짝이지만 초조함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감상을 물어왔다.
"어, 어떠세요? 혹시 비리거나 그러지는·· 않죠?"
유한의 걱정과는 다르게 하나도 비리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맛있었다.
장어 특유의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겉면에 발려있는 달달하고 짭쪼름한 맛의 양념과 잘 어우러져 한 번 씹을 때마다 그 풍미가 입 안을 가득채웠다.
"··맛있네. 직접한거니?"
"네? 아, 네! 인터넷 보고 따라해봤는데··"
고작 그 한 마디가 뭐라고 얼굴 가득 띄워놓고 있던 초조함을 벗어던지고는 활짝 웃는 유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별 것도 아닌 한 마디에도 저렇게나 밝게 웃는데 나중에 자신에게 거절당하게 되면 유한이 얼마나 상처를 받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유한이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게될 바에는 차라리ㅡ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에 가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흠칫했다.
그리고는 유한과 마주보듯 앉아있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는 다시 한 번 몸을 흠칫했다.
'혹시 이상하게 보이기라도 했으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유한을 향해서 시선을 던지던 가영은 이내 눈으로 들어온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유한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전복 쪽을 향해 있었으니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유한이 방금 전에 자신이 한 행동을 보고 이상한 것을 바라보듯 쳐다보기라도 했다면 그때는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민망했을테니까.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다시는 해선 안 되는 것이기도 했고.
순간적으로나마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는 걸 유한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걸 두고 안도하던 가영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유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눈으로 들어온 어떤 것 때문이었다.
찢어지고, 베이고, 데여서 스스로 보기에도 볼품없어 보이는 자신의 것과는 달리 유한의 손은 희고 깨끗했다.
손가락도 그랬다.
흉터 투성이인 자신의 것과는 달리 유한의 손가락은 흉터라고는 하나도 없이 길쭉길쭉하게 뻗은 게 참 보기 좋았으니까.
그랬던 곳에 반창고가 감겨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ㅡ
아니,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갑자기 생겨나게 된 이유야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보나마나 이것들을 만들다가 실수를 해서 다친 거겠지.
유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면 절대 놓쳤을 리 없는 것을 이제서야 발견하고 말았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빠서 유한이 이것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를 알아주질 못했다.
그 사실이 못내 죄스러웠다.
가슴이 시큰거릴 정도로.
"··손은 어쩌다가 다친 거니?"
"이, 이거요?"
손가락의 상처를 지적하자마자 유한이 어깨를 흠칫하고 떨며 반창고로 감싸여있는 손가락을 허둥지둥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그런 유한의 얼굴에는 어색함과 초조함이 동시에 맴돌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다친 걸 빌미로 이제 밥 차리는 건 그만하라고 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저, 전복! 전복 손질하다가 껍질에 살짝 찔린 거에요."
누가봐도 갓 지어낸 게 분명한 변명이 유한의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그러더니ㅡ
"··정말 살짝 찔리기만 한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황급히 손을 내젓기 시작했다.
그런 유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 진짠데··"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살짝 몸을 움츠리고 있던 유한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 그것보다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숟가락 위에다가 버터향을 물씬 풍기는 전복을 올려놓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