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1부
아무래도 즉흥적으로 손가락에 난 상처를 어필했던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상처에 대한 언급이 가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직후부터 묘하게 고분고분해졌다고 해야할까.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밥 위에다가 뭔가를 올려줄 때마다 부끄러워서 안절부절 못하더니만 지금은 부끄러워 하기는 해도 올려주는대로 넙죽넙죽 잘 받아먹고 있었다.
'하긴··'
내가 무려 손에 상처까지 입어가면서 만든 건데 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이렇게 되면··'
세나에게 감사를 표해야할 것 같았다.
상처라고 해봐야 살짝 찔린 수준에 불과해서 반창고고 뭐고 패스하려던 내게 억지로 그것을 감아주었던 장본인이 바로 세나니까.
세나는 알고 있었을까.
본인이 내 손가락에 직접 감아준 반창고가 가영의 마음을 흔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걸?
전복 껍데기에 찔린 건 난데 자기가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썹을 팔자로 축 늘어뜨린 채 '씨이.. 그러니까 조심좀 하지..'라고 씨근덕대며 내 손가락에 반창고를 감아주던 세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좀 묘해졌다.
생각을 억지로 다른 곳으로 돌렸던 건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슬슬 도착할 때도 되지 않았나?'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차마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고 거울을 통해 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우웅ㅡ
어디선가 휴대폰 진동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가영의 주머니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는 걸 깨달은 순간 움찔하고 위를 향해 치솟으려던 입꼬리를 빠르게 다잡았다.
'온 건가?'
보아하니 예약으로 걸어놓았던 것이 드디어 가영의 휴대폰에 도착한 듯 했으니까.
그런 내 속내를 알 리가 없는 가영은 별 생각없이 바지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몸을 덮고 있던 미용 앞치마를 손으로 살짝 잡아당겨 옆으로 젖힌 그녀가 이내 그것을 주머니 속으로 밀어넣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들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기대감으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장어 도시락과 더불어 아주 특별한 것으로 준비한 오늘의 딸감을 확인한 가영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갔던 가영의 손이 휴대폰을 손에 쥔채 그곳에서 빠져나왔고, 가영의 휴대폰이 그녀의 얼굴 앞에 자리를 잡은 건 그 직후였다.
그런 가영의 행동에 딱히 관심없는 척 샐러드 속에 젓가락을 담구고 그것을 뒤섞는 척을 했다.
그러면서 가영 쪽을 은근히 힐끔거리고 있으니ㅡ
입 안에 든 것을 우물우물대면서 도착한 것을 확인하던 가영의 눈이 확 커졌다.
살짝이지만 붉은기가 맴돌고 있던 것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건 덤이었다.
야한 거 보고 있는 중이라고 아주 그냥 대놓고 광고를 해대는 가영의 모습에 내심 쓴웃음을 흘렸다.
그 와중에 가영이 보여준 귀엽기 그지없는 행동 때문이었다.
내 눈치가 보이기라도 했는지 내쪽을 향해 힐끔하고 시선을 던져대는데 혹여나 눈이 마주칠세랴 그녀 쪽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황급히 샐러드 쪽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시선을 던져봤더니 가영이 꼴깍하고 침을 삼키며 휴대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누가봐도 휴대폰 화면 속에 들어있는 것에 정신이 팔린 듯한 가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뿌듯해졌다.
'마음에 들었나 보네.'
아마 지금 가영의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을 가능성이 큰 움짤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런데 저렇게 정신 못 차리고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니 그것만으로도 그 모든 고생들을 보상받은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코밑이 당장이라도 쓱쓱 문질러주고 싶을 정도로 근질근질거렸다.
'그나저나··'
진짜 정신을 못 차리네.
아무리 짤이 꼴려도 그렇지 아들처럼 여기는 아이가 바로 앞에 앉아있는데 대체 언제까지 그걸 들여다보고 있을 생각인 걸까.
짤이 그렇게 마음에 들면 차라리 실물을 보던가.
실물이 눈앞에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라니.
'안 되겠네.'
내가 야한 짓을 하려고 할 때마다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할 때는 언제고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처럼 야한 거에 푹 빠져있는 가영을 좀 혼내줘야할 것 같았다.
"··누구에요?"
눈을 가늘게 뜬채 가영을 향해 그리 말했던 건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으, 응?"
"아니 엄청 뚫어져라 들여다 보시길래 중요한 문자인 것 같아서요. 대체 누구 문자길래ㅡ"
그토록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냐.
대충 그런 느낌으로 말하며 질투하는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그제서야 본인이 야한 거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일까.
열심히 우물거리고 있던 입마저도 멈춘 채 짤 감상에 푹 빠져있던 가영의 얼굴이 확 빨개지더니 '콜록!'하고 사레라도 들린 듯한 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상황.
이 와중에 딱 하나 문제가 될만한 부분이 있다면 가영이 바로 조금 전까지 입에 넣고 씹고 있었던 것이 매콤한 양념을 발라서 구운 장어였다는 것이었다.
그런 걸 입 안에 넣고 있는 상황에서 사레가 들려버렸으니 어찌되었겠는가.
콜록콜록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기침소리와 함께 가영의 얼굴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새빨간 느낌이였다면 지금은 시뻘겋다고 해야할까.
그 상태로 쉬지 않고 기침을 터뜨려대는 가영의 모습에 당황한 척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정수기에서 물을 떠다가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여, 여기 물이요."
사양할 상황이 못 됐는지 가영이 내가 내민 것을 넙죽 받아마셨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만.
고작 물 한 잔만으로 진정시키기에는 좀 쎈 녀석이기라도 했는지 건네준 컵이 텅 비었음에도 가영이 콜록콜록하고 기침을 해댔다.
그와 함께 휴대폰을 꽈악하고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지더니 그것이 그대로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어라··?'
이걸 떨어뜨려?
생각치도 못한 상황이었지만 굳이 사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얼른 가져가라고 어필이라도 하듯 5만원권이 길 한복판에 떡하니 떨어져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뭣하러 사양한단 말인가.
해서 휴대폰이 떨어지며 난 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레 그것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것은ㅡ
'오우 쉣··'
내가 옷 갈아입는 틈을 타 빠르게 만들어낸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물건 옆부분에다가 'X영이 누나전용.'를 적어놓고 잔뜩 발기한 그것을 위아래로 꺼떡꺼떡 흔들어대고 있는 짤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이 가영의 휴대폰 안에서 보란듯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 이건··"
그에 당황한 척 몸을 흠칫하고 떨어대니 하필이면 내게 들켜버린 상황이 믿기지 않기라도 했는지 눈을 크게 뜬채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가영이 황급히 손을 뻗어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가렸다.
그러더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그것을 반대로 뒤집어버렸다.
탁-!
그러면서 난 소리 뒤로 이어진 것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었다.
'와, 미친··'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
내게도 그리 느껴졌을 정도인데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당황한 상태일 가영에게는 어땠겠는가.
말 그대로 쥐라도 죽은 듯한 침묵이 꽤나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인지 가영이 자꾸만 몸을 움찔거리며 현재 본인의 심정을 몸짓을 이용해 표현했다.
그러더니 이내 입술을 꾹 한 번 깨물고는ㅡ
"유, 유한아 이건 그러니까··"
당황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걸 끝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생각치도 못하게 얻은 기회이니만큼 오히려 더 철저하게 이용해줘야하지 않겠는가.
"··누구에요?"
표정을 숨기기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이 몸을 이용해 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가영을 향해 물었다.
설마 내가 자기 말을 중간에 끊기까지 해가면서 사진에 대해 물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일까.
횡설수설 변명을 이어나가던 가영이 그것마저도 잊은 채 가녀리기 그지없는 어깨를 크게 떨었다.
"ㅡ으, 응?"
"··방금 그 사진이요."
"사, 사진이라니?"
시치미를 떼려고 하는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귀여웠다.
시치미를 뗄거면 확실하게 떼던가 입술이 당황이라는 걸 잔뜩 머금은채 파르르 떨리고 있는데 그 상태로 말하면 대체 누가 그 말을 믿을까.
"저 분명히 봤어요."
그러니 시치미를 뗄 생각이거들랑 아예 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단호하게 말을 하니 가영의 어깨가 다시 한 번 움찔했다.
거기에 대고 아예 쐐기까지 박아주었다.
"웬 변태새끼가 홀딱 벗고 꼬추 흔들고 있었잖아요."
어쩔 줄 몰라하고 있던 가영의 상대로 아예 짤의 내용까지 읊어준 순간이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당황으로 빨갛게 물들어있던 가영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수치심, 그리고 민망함.
그것이 지금 이 순간 가영의 얼굴 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가영의 멘탈이 이미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체 뭐하는 새끼길래 고모한테 그런 사진을 보내는 거예요?"
마치 다른 무엇보다도 가영하고 그런 문자를 주고받는 놈의 정체를 알아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려 비속어 비스무리한 것까지 써가며 물었더니 내 비쥬얼과는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발언에 놀라기라도 한 것일까.
순간 눈을 살짝 크게 뜬 가영이 그대로 날 쳐다보길래 지지 않고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렇게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더니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다름아닌 가영이었다.
"네? 누구냐니까요?"
"모, 모르는··"
"모르는 사람이 왜 고모한테 그런 걸 보내는데요?"
그게 지금 말이 되냐고 생각하느냐.
꼭 그렇게 따지는 투로 가영을 몰아붙였다.
그랬더니 가영이 더 버티지 못하고 진실을 토해냈다.
"스, 스팸문자야·· 도박 사이트 광고··"
"··정말요? 그러면 그.. 꼬추에 써 있던 그건 뭔데요?"
"으, 응?"
"꼬추에 써 있었잖아요. 무슨무슨영이 누나 꺼라고.."
살짝 민망해하면서도 그리 따지고 드니 가영이 다시 한 번 얼굴을 확 붉혔다.
"그. 그거야·· 고모처럼 뒤에 영자 들어가는 이름은 흔하잖니··? 나영일 수도 있는 거고 다영일 수도 있고··"
거기에 수영에 소영에 지영까지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그 정도다.
그래서 일부러 모호하게 적어둔 거다.
"그, 그건··그렇긴 한데··"
그런 가영의 발언에 안도한 척 하면서도 살짝 미심쩍어하는 반응을 보여줬더니 가영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모가 거짓말하는 것 같니?"
"정말이죠?"
"으, 응··"
정말로 솔직히 말하면 누가봐도 거짓말하는 얼굴이긴 했다.
특히나 눈동자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요리조리 움직여대는 게 그랬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가 보내준 걸 반찬 삼은 적이 꽤 되니까.
찔리는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을 터.
그게 가영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지만 믿어주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리 말하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제서야 좀 안심이 되었던 것일까.
물 좀 마시고 오겠다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정수기 쪽으로 향하니 가영이 남몰래 내쉰 한숨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히죽하고 웃었다.
보아하니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어찌어찌 잘 넘겼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아직 안심하기에는 많이 일렀으니까.
왠지 모르게 가영이 내쪽을 힐끔거리고 있을 것만 같아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물을 두 잔 연속 벌컥벌컥 들이켜준 다음 다시 가영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영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으, 응?"
불쑥 들이밀어진 손 때문에 당황한 것일까.
가영이 아까 막 움짤을 들켰을 때처럼 어깨를 흠칫하고 떨었다.
"휴대폰이요."
짤막하게 용건을 밝히고는 얼른 달라는 뜻으로 손을 살짝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언제 안도하고 있었냐는 듯 가영의 얼굴 위로 다시 당혹이라는 감정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휴, 휴대폰?"
"네."
"휴대폰은 왜.."
"스팸문자라면서요. 제가 차단해드릴게요."
그리 말하며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어보이니 가영의 눈동자가 살짝이지만 흔들렸다.
그렇게 동요하던 것도 잠시, 가영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냐 고, 고모가 할게··"
"아니에요. 이런 거 잘 못하시잖아요. 제가 대신 해드릴게요."
"···"
"얼른요."
"그으··"
"고모?"
"여, 여기··"
딱 세 번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막 세 번째에 눈을 살짝 가늘게 뜨니 가영이 더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휴대폰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잠금도 해제해주셔야죠."
"으, 응··"
그렇게 확보한 가영의 휴대폰을 조작해 문자함으로 들어갔다.
"··이거 완전 상습범이네요."
"자, 자주 오기는 하더라."
"문자도 지우고 번호도 차단했으니까 이제 더는 안 올 거에요."
그리 말한 순간 가영이 보여준 반응은 농담 아니고 진짜 귀여웠다.
입꼬리가 아래를 향해 추욱하고 처진 게 시무룩함 그 자체였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극상의 반찬을 공급해주는 곳을 잃어버린 건 물론 기존에 배달된 것들까지 모두 날아간 게 그리도 가슴아팠던 것일까.
"다행이다. 그쵸?"
"으, 응·· 그렇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내 말에 맞장구를 치는 가영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