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미안하다는 말 대신
(111/114)
111화 미안하다는 말 대신
(111/114)
111화 미안하다는 말 대신
2023.08.24.
가을의 밤이 깊어갈수록 밤하늘에 두둥실 차오른 달도 더 환하게 빛이 났다.
사랑해, 라며 속삭이고 멀어지는 고백에 가슴이 뛰었지만, 다정은 달빛을 머금어 말간 얼굴로 그저 웃기만 했다.
그쯤 되자 정혁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안달이 나 보채기 시작했다.
“사랑한다고.”
“나도 차정혁 씨 좋아해요.”
다정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그의 얼굴이 더 부루퉁해졌다.
“난 사랑해인데 유다정은 좋아해야?”
“강요한 대답은 진심이 아니에요. 그리고 난 아직 좋은 게 다예요. 그게 진실이라고요.”
치, 하고 섭섭한 내색을 하는가 싶던 정혁이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해. 내가 미안한 게 많으니까.”
어째선지 계속 자책하고 있는 듯한 어감이었다. 다정이 그의 뺨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습관인 거 몰라요? 너무 자주 하면 진실성이 안 느껴진다고요.”
나무라는 투로 말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는 미안해는 다 진실이야.”
“중요한 건 듣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거죠.”
“어떻게 느껴도 할 수 없어.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까.”
고집스러움에 다정이 인상을 썼다. 그러며 그의 얼굴을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건데요?”
“유다정을 죽을 만큼 사랑한 거?”
그걸 몰라서 묻냐는 듯 그의 눈썹이 슥 올라간다. 다정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게 사실이니까.
유다정을, 그리고 유시우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돌이켜봐도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래도 만약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모자는 아무 탈 없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가 아니었다면 최근 겪어야 했던 일련의 불행들 역시 절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아니, 불행이란 단어는 비약이 지나치다. 차라리 5년 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보낸 죄로 치러야만 하는 대가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정혁이 한송과의 정혼을 엎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벌써 오래였다. 그랬음에도 더 일찍 파혼을 선언하지 못한 건, 그로 인해 불어닥칠 후환 때문이었다.
어떤 시련이 닥칠지 충분히 예견되고도 남는데, 모자를 그 시련 속으로 밀어 넣을 자격에 제게 있나 하는 고민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 점을 염려해 갈팡질팡 망설인 건 사실이나,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왔다.
하나 빗나간 거라면 예상하고 있던 시련의 진원지였다. 당연히 박 회장이 훼방을 놓을 줄 알았다.
그래서 할머니를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대비책까지 세웠는데, 오현아라는 지뢰밭이 나타났으니 뜬금없을 수밖에.
정혁은 제 뺨을 감싼 채 지그시 향하는 다정의 눈동자를 깊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해?”
“그냥요. 앞으론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사이가 되면 어떨까 하고요.”
정혁은 피식 웃었다. 그러며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즉각 실천에 옮겼다.
“고마워.”
“나도, 고마워요.”
밤하늘 아래 펼쳐진 오붓한 시간은 쌀쌀함에 다정이 어깨를 감싸 쥘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대신 애틋하게 나누는 눈길만은 정애가 보아 둔 이부자리로까지 이어졌다.
사위가 캄캄했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서로의 얼굴을 또렷하게 담아냈다.
팔베개를 베고 바라보는데 마주 보던 정혁이 뜬금없이 킥, 하고 웃는다.
“유다정. 나 옆구리 데일 것 같아.”
어처구니가 없어 하는 목소리에 다정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20년 전 공사한 구들장이 너무 얇게 깔렸는지, 두툼한 요를 깔고 누웠는데도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었다.
여하튼 그냥 뒀다가 옆구리에 화상을 입기 딱 좋았다.
“잠깐만요.”
다정은 너무 우스워서 한참을 웃다가 이불 밖으로 기어나갔다. 그러곤 문간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 온도조절기를 살폈다. 예상대로 온도는 MAX로 설정되어 있었다.
적당히 온도를 줄이고 돌아서자 정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불을 활짝 들어 올린다. 다정은 냉큼 기어 동굴 속에 쏙 몸을 묻었다.
“우리 추울까 봐 엄마가 온도를 엄청 높여 놨나 봐요.”
그가 다시 킥킥 웃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온도인 건 맞았다. 특히나 평생 침대 생활만 해 온 그가 방바닥에 등을 지진다는 개념이 뭔지 알기나 할까.
여하튼 정확한 웃음 포인트는 모르겠는데, 왜인지 웃겨서 다정도 자꾸만 실없이 웃음이 났다.
* * *
스멀스멀 밥 짓는 냄새가 밀려들었다. 어렴풋이 눈을 뜨자 장지문 너머로 아직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쭉 기지개를 켠 다정은 두툼한 요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양모 이불의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다 떨어진 이불 홑청을 꿰매고 있는 정애가 마음 아파 마음먹고 이불 세트를 보내 주었더니, 한번 덮은 흔적도 없이 새 이불을 딸에게 내어 주고 정애는 어젯밤에도 다 떨어진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저승 갈 때 싸 들고 갈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옆자리로 눈길을 돌렸다. 베개만 놓인 빈 이부자리가 보였다.
다정은 나른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불도 개어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거울 없이 얼굴과 머리를 대강 손으로 더듬어 정돈한 뒤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장지문 너머로 보았던 어스름 푸른 빛이 마당 위로도 어른어른 감돌았다. 밥 짓는 냄새가 이른 아침의 축축하고 찬 공기와 어우러져 더 진하게 밀려들었다.
밥솥과 국솥만 안쳐 두고 어딜 갔는지 정애는 보이지 않았다. 마루로 나가 안개로 뿌연 마당을 보자 희한한 몰골의 남자가 보였다.
어디서 났는지 맨발에 하얀 고무신을 구겨 신은 정혁이 마당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다. 자기 아들과 함께였다.
헐렁한 꽃무늬 남방에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한 정애의 몸빼 바지는 그에게 무릎이나 간신이 가릴 정도로 깡총했다.
어젯밤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밝은 데서 다시 보니 되게 비현실적이다. 물론 잔뜩 멋을 부린 영농후계자처럼 하고 있어도 본바탕만은 근사한 남자였다.
대청 아래로 내려간 다정은 슬리퍼를 꿰어신고 부자에게 향했다. 뭐 때문인지 부자는 머리를 맞대고 엄청 골몰했다.
“뭐 하는 거예요?”
쪼그려 앉은 등 뒤로 다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자 시우가 씩씩하게 배꼽 인사를 한다.
“엄마 안녕히 주무셨어요!”
뭔가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도 시우는 예의 바르고 착한 어린이였다.
“우리 시우도 잘 잤어요?”
“네에!”
싱긋 미소 지은 다정이 시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근데 두 사람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유다정 이것 봐. 귀엽지?”
정혁이 쪼그려 앉은 발치 앞에 눈길을 고정한 채 이죽거렸다. 까치가 다녀간 것 같은 머리 꼴을 하고서도 참 해맑다.
다정은 그가 가리킨 쪽으로 빼꼼 눈길을 내렸다. 그러자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하얀 솜뭉치가 눈에 잡혔다.
겨우 어미 젖이나 뗐을까. 흙바닥에 궁둥이를 깔고 앉아 순박한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 건 강아지였다.
그나저나 귀여운 수준이 보통 이상이다.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그건 정혁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다정이 아는 한 시우도 저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차정혁 씨. 뭘 그렇게 사랑스럽게 봐요? 똥개 처음 봐요?”
“어! 똥개 아닌데! 멍멍이 이름 도꾼데!”
시우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자 정혁도 눈을 흘기며 항의한다.
“맞아. 엄연히 도꾸라는 이름이 있어. 똥개라고 하지 마.”
그러니까 도꾸가 개잖아…….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귀엽고 소중한 존재를 똥개라는 하찮은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며 부자가 편을 먹고 따지는데, 말한들 무슨 의미일까.
그나저나 정말 귀엽다. 역시 개는 똥개가 제일 귀엽다.
“그런데 웬 강아지예요?”
강아지의 출처가 의아해 물었더니 애먼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정애가 뒤채 장독대 쪽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아까 전에 복영이네 가서 된장 한 숟갈 읃어 왔니라.”
웬 강아지냐 물었더니 갑자기 된장 얘기다.
“복영이네? 이장님 댁 말하는 거예요?”
“그려. 복영이네 도꾸가 엊그제 다섯 마리나 새끼를 쳤다잖여.”
“다섯 마리? 근데 얘가 왜 우리 집에 있어?”
“우리 강아지 데블고 놀라고 하나 꿍쳐 왔니라.”
그러니까 이장님 댁에 된장 한 숟갈 얻으러 갔다가 꼬물거리는 것들을 보곤 손자 생각에 강아지 한 마리를 빌려 왔다는 거다.
다정의 눈길이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손가락으로 꼬물꼬물 괴롭히고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정애가 말한 ‘우리 강아지’가 아무래도 저 남자지 싶다.
* * *
다정이 클리닉에 도착한 시간은 평소보다 일렀다. 오늘은 2주에 걸쳐 진행된 시우의 심리 치료 프로그램의 결과를 듣고 상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정은 소란하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 위에 작게 난 창을 들여다보자 앙증맞은 손으로 퍼즐을 맞추는 시우가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는 1:1로 시우를 전담 케어하는 심리치료사가 시우의 행동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종종 지켜본 바, 어떤 땐 블록을 쌓기도 하고 또 어떤 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다양한 놀이를 통해 트라우마를 진단하고 치료를 병행하는 게 프로그램의 취지라고 클리닉 측에선 말하고 있지만, 다 떠나 시우는 그저 놀이가 즐거운 듯 보였다.
되찾은 일상은 평온했다. 청주집에 다녀온 뒤 회사로 복귀한 정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다정과 시우도 평범한 일상을 되돌렸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의 생활에 충실했지만, 한 사람에게서만큼은 절대 눈을 떼지 않았다. 바로 오현아였다.
다정은 사건의 수사 상황에 수시로 귀를 기울였고, 정혁은 한송그룹의 움직임과 동향을 예의주시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잘됐다고 해야 할지, 며칠 전 오현아의 구속 소식이 갑자기 매스컴을 오르내렸다.
한송이 그룹 차원에서 방비를 했으나, 워낙 사안이 민감한 까닭에 더는 덮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재벌가의 이슈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지른 갑질과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폭로가 셀 수 없이 이어지고, 학창 시절로 거슬러 가 학폭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들의 제보와 고소장까지 줄줄이 날아들었다.
뭐가 됐든 오현아가 합당한 처벌을 피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그렇게 모든 게 제자리를 찾고 있는 듯했지만, 시우를 유치원으로 돌려보내는 건 여전히 망설여졌다.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나쁜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 시우를 돌려보내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 진지하게 고민이 되었다.
결국 고민이 끝날 때까지 시우의 등원은 무기한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오늘 오후 한송 교육재단으로부터 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중대한 범법행위가 입증된 자에게 유치원의 관리 책임을 맡기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오현아가 원장직에서 전격 해임되었다는 안내문이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그래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 * *
다정이 심리치료사와 상담을 마치고 나왔을 때, 시우는 대기석에 얌전히 앉아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딸칵, 하고 상담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엄마가 나서는 걸 발견한 시우가 의자를 폴짝 뛰어내렸다.
“엄마! 선생님이 뭐래요?”
“음, 내일부터는 여기 안 와도 된대요.”
“그럼 시우, 내일 유치원 가요?”
클리닉을 나서며 엄마 손을 잡고 살래살래 흔들던 시우가 묻는다. 대뜸 이렇게 묻는 걸 보니 시우는 유치원에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일 당장 시우를 유치원에 보낼 수 있을 만큼 다정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시우는 여기 다니는 거 재미없었어요?”
“음. 아니! 근데 유치원이 훨씬 재미있어요!”
다정은 콧등을 찡그렸다.
“그렇지. 유치원에 가면 시우 여자친구도 있고 경준이도 있고 수원이도 있으니까 유치원이 훨씬 재밌죠.”
“네에!”
“알겠어요. 그럼 엄마가 유치원 언제 갈지 생각해 볼게요.”
상담 결과 특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아 시우는 심리적 치료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소견이었다. 신기하게도 나쁜 기억은 빨리 잊는다는 거다. 누굴 닮았는지, 참 씩씩했다.
안도와 안심, 그리고 홀가분한 기분이 뒤섞였다. 돌아가는 길에 정혁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알려 주자고 생각하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때 관찰이 특기인 시우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어! 예쁜 누나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