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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사랑해 (110/114)


110화 사랑해
2023.08.20.


조사실 안을 서성이는 선영의 낯빛이 창백했다.

이젠 어쩌지?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선영은 한순간 울 듯한 얼굴이 되어 탄식했다.

참고인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간다던 딸이 갑자기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될 수 있는지, 납득조차 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구속영장이 마련되어 있고 그 자리에서 수갑이 채워졌다고 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대체…….

손톱을 딱딱 물어뜯으며 탄식할 때 조사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등장한 딸애를 보는데, 선영은 하도 몰골이 해괴해서 기절할 노릇이었다.


“흐엉…… 엄마아아앙!”

선영을 보자마자 현아가 오열을 터뜨렸다. 이미 한바탕 울었던지, 눈 밑엔 화장이 녹아 번진 검은 줄이 선명했다. 앞으로 공손히 모은 두 손목 위론 금속성의 팔찌가 반짝거렸다.


“어엄마아아아……!”

“현아, 오현아! 세상에 우리 딸!”

선영은 기겁하듯 얼굴을 감싸 쥐다가 냉큼 달려갔다. 거미줄처럼 엉킨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번진 화장을 문질러 봐도 만신창이가 된 몰골은 도저히 수습 불가였다.


“오현아! 울지만 말고 똑바로 말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몰라아! 나도 몰라아아아앙!”

무엇 하나 설명하지 못한 채 현아는 울기만 했다. 경찰서가 떠나가라 통곡하는 소리에 귓구멍을 후비적대던 형사가 부연 설명을 붙였다.


“오현아 씨는 아동에게 상해를 입히고, 대신 유다정 씨에게 누명을 씌운 무고 혐의와 아동 상해죄로 구속됐습니다.”

선영은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돼! 우리 현아가 그럴 리가 없어요. 얘가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앤데, 어떻게 애한테 상해를 입히겠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믿고 싶으시겠지만, 증거가 나왔어요. 오현아 씨가 잠든 유시우 군의 몸에 상해를 입히는 장면이 원장실 내 CCTV에서 확인이 됐어요.”

“그, 그건 가짜예요! 원장실 안에는 CCTV가 없다고요.”

“자자, 저한테 이러지들 마시고 다른 증거가 있으면 제출해 주세요. 뭐, 무죄를 입증할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요.”

비관적으로 말한 형사는 10분 정도의 면회 시간이 남았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

* * *

경찰서를 나서던 선영의 거친 발길이 우뚝 멈춰 섰다. 분에 못 이긴 그녀의 손이 결국 뒤따르던 표 비서의 따귀를 갈긴다.

짜악!

절 두고 가지 말라며 울고불고 매달리는 딸애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일을 왜 이딴 식으로 하는 거야! 변호사는 왜 한 명밖에 안 왔어?!”

뺨을 얻어맞고도 표 비서는 별 동요 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변호사가 많다고 지금 당장 해결되는 건 없습니다.”

“아…… 안 돼! 우리 현아 감옥 들어가면 못 견뎌! 보석 신청 같은 거 해 봐, 응? 보석금이라면 얼마든지 낼 테니까!”

“아직 수사 중이기 때문에 보석 신청은 불가능합니다.”

이번엔 변호사가 말했다. 선영의 얼굴이 절망에 일그러졌다.


“그보다 이사장님. 지금은 회사에 먼저 들어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사? 지금 회사가 문제야?”

그녀가 짜증 섞인 투로 쏘아붙인다. 난처한 얼굴이 된 표 비서가 조심스레 상황을 설명했다.


“그게…… 현아 양의 구속 소식이 회장님 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 * *

커다란 방문을 마주하고 선 선영은 크게 심호흡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긴장으로 빳빳해지지만 애써 각오를 다잡고 벌컥 문을 열었다.


“흐어어엉, 회장니임! 우리 현아 어떡해요옹.”

선영은 남편을 부르짖으며 서럽게 흐느끼는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눈물 바람을 하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지 않을까 애먼 기대를 하면서.

그 순간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파편이 그녀의 이마를 할퀴고 지나갔다. 퍼뜩 이마를 쥐자 바닥과 충돌해 흩어진 노트북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금이 가고 반쯤 떨어져 나간 노트북 화면 위로 현아의 모습이 정지된 채 깜빡거렸다. 그뿐 아니다. 공중으로 흩뿌려진 사진들이 낙엽처럼 팔랑이며 선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발치에 떨어진 사진 몇 장을 주워 든 선영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원장실 안에서 김영준과 예사롭지 않은 스킨십을 나누는 현아. 그리고 또 같은 장소에서 잠든 아이의 몸에 뭔가를 하고 있는 현아.

사진들을 보는 순간 선영은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이마를 쥔 손가락 틈으로 액체의 눅진한 감각이 흘러들지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 그런지 통증은 느낄 수가 없었다.


“회장님. 이게 다 무슨……. 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보낸 거예요?”

“지금 누가 보낸 게 중요해?!”

오 회장이 심통 난 두꺼비 같은 얼굴로 호통쳤다. 한송그룹 회장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여, 여보…….”

“대체 딸년 간수를 어떻게 했길래! 이젠 하다 하다, 어익후!”

오 회장의 솥뚜껑 같은 손이 뒷덜미를 덥석 움켜쥔다. 잔뜩 겁을 먹고 웅크린 선영은 눈알만 굴렸다.


“더 말썽 피우기 전에 당장 병원 알아봐!”

“벼, 병원이라뇨? 회장님 설마 또 현아를 병원에 넣으시려고요?”

“그거 말고 뭐 방법 있어?”

“안 돼요! 현아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무슨 아버지가 자기 딸을 병원에 가둘 생각을 해요?!”

“그럼 미친개를 목줄 없이 아무 데나 풀어 놔? 그러다가 갈 데까지 가면 나중엔 어떡할 건데!”

오 회장의 확고한 뜻에 선영은 냉큼 무릎을 꿇었다.


“회장님. 살려 주세요. 현아 우리 딸이잖아요. 현아 감옥 들어가면 못 살아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네? 제발요.”

두 손을 맞대고 싹싹 빌며 애원하자 오 회장도 성미를 한풀 꺾었다.


“당장 해결해! 이거 해결 못하면 그땐 당신하고도 이혼이니까 각오하라고!”

 

 

* * *

쉬지 않고 달려온 흰색 SUV가 어느새 시골집 초입에 다다랐다. 다정은 느티나무 아래에 차를 멈춰 세우고 시동을 껐다.

먼저 안전띠를 풀고 허리를 틀어 정혁의 안전띠도 풀며 룸미러를 향해 말했다.


“시우야. 할머니 집에 다 왔어요.”

“어…… 할머니…….”

엄마의 목소리에 꾸뻑 잠들 뻔했던 시우의 눈꺼풀이 반짝 올라간다.

정혁은 사방좌우를 수상하게 두리번거렸다. 아직 해가 다 저물지 않아서인지 지난번 느꼈던 오싹함까진 아니어도 왠지 뒷덜미가 스산했다.

평소라면 고추밭을 가로질러 갔겠으나, 잡초로 무성해진 고추밭은 도무지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아 요즘엔 조금 멀더라도 돌아오는 길을 애용했다.


“엄마, 어디 계세요? 시우 왔어요.”

녹슨 대문을 뛰어넘으며 다정은 소리쳐 엄마를 불렀다. 그 뒤로 정혁이 한우 꽃등심 세트를 들고 따라왔다.

엄마, 엄마 부르자 머지않아 정애가 집채 뒤편에서 달려 나왔다.


“워매. 내 강아지 오면 온다고 말을 허지.”

“할머니이!”

귀여운 손자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정애가 흐뭇하게 웃는다. 그러며 오랜만에 딸의 얼굴도 유심히 보는데, 어째선지 통통하던 뺨이 아주 홀쭉해져 왔다.

정애가 걱정스러워 물었다.


“애미 뭔 일 있는 겨?”

“아니, 일은 무슨.”

다정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잡아떼지만, 그럴수록 정애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그럼 어째 그려? 얼굴이 홀쭉하잖여. 경찰서 짓느라 많이 힘들었던 겨?”

휴대폰도 안 터지는 산골 오지에서 경찰서를 짓는 사연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출장이 길어서 그렇지, 뭐. 이제 끝났으니까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대충 둘러댄 다정은 정애를 꼭 끌어안았다. 아들 냄새를 맡을 때도 그러더니 엄마 냄새를 맡자 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엄마아…….”

“옴마야? 야가 왜이랴?”

“왜 그러긴. 너무너무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지.”

정애가 별스럽단 얼굴을 하지만, 다정은 개의치 않고 엄마의 품을 파고들었다.

진짜다. 인생 끝날 것처럼 차가운 철장 안에 한 일주일 갇혔다가 나와 보니 마치 새로 사는 듯한 기분이었다. 덤으로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우리 차 서방 배고플 거인디?”

뒤늦게야 걱정이 된 정애가 끙차, 하고 아픈 허리를 쥐며 주방으로 돌아섰다.

청주 집에 처음 온 정혁은 문화재를 보듯 집 구석구석을 훑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가 가장 놀란 건 대청마루와 이어진 저편에 부엌이 있다는 거다.

촛불을 켜고 살 줄 알았더니 전기는 들어오는 모양인데, 싱크대에 가스레인지, 그리고 일반 냉장고에 김치냉장고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여하튼 아궁이에 장작을 때지 않는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마루 한편에 놓인 다홍색의 유선전화기는 더 놀라웠다.

깡시골이라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지. 나름 신문물로 포진되어 있는 게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저녁을 먹고 밥상을 들어 나른 지가 언제라고 정애는 광주리 가득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시우가 노랗고 탱글탱글한 씨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엄마! 옥수수!”

“우와, 맛있겠다.”

평상에 둘러앉아 옥수수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근히 기대하는 게 있는지 정애가 자꾸만 집 안 벽시계를 힐끔거린다.


“벌써 11시가 넘었는데, 자네는 워쩌까나?”

“당연히 자고 가야죠. 저 차도 없고 운전도 못 해요.”

옥수수 알맹이를 갉아 먹다 말고 정혁이 깁스한 팔을 들어 보였다. 정애의 입가에 대번에 웃음이 번진다.


“그려. 잘 생각혀써. 내 안방에 이부자리 봐 둠세. 가만, 어디 새 이불이 있을 거인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정애는 이번에도 끙차, 하고 일어나 쉴 새 없이 뭔가를 사부작거렸다.

저녁을 해치우고 후식으로 옥수수까지 먹고 나자 시우는 하품이 쏟아졌다. 초저녁잠 많은 정애도 딸네 이부자리를 봐 놓고 일찌감치 건넛방에 몸을 눕혔다.

잠이 와 죽겠는 시우는 자연스레 할머니 품을 파고들었고, 며칠 새 참 많은 일을 겪은 남녀는 한동안 시린 밤하늘만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야경이 없기 때문인지, 서울의 밤하늘과 달리 쏟아져 내릴 듯 무수히 많은 별이 밤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차정혁 씨. 무슨 생각 해요?”

평상에 나란히 앉아 꽉 찬 달을 올려다보던 다정이 물었다. 그러자 정혁이 피식 웃기부터 한다.


“여기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

어쩐지 작위적인 대답이란 생각에 다정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관둬요. 진짜로 살라고 하면 불편해서 하루도 못 살 거면서.”

“그걸 유다정이 어떻게 알아?”

“난 우리 집인데도 못 살 거 같거든요.”

“난 괜찮아. 유다정이랑 유시우만 있으면 불편해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무릎을 끌어안은 다정은 고개를 꺾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철부지 도련님이 며칠 새 철이 들어 버린 느낌이지만, 이젠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다.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자 밤하늘만 올려다보던 정혁의 눈길이 돌았다. 눈이 마주쳐서 웃자 그도 무릎을 당기며 조금 더 거리를 좁혀 다정을 마주 보았다.


“미안해.”

너무 뜬금이 없어서 다정은 그냥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그가 다시 속삭였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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