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장모 사랑은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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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장모 사랑은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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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장모 사랑은 사위
2023.08.27.
다정은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클리닉 건물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얼굴이 너무도 반가운 까닭이었다.
“수경 씨가 어쩐 일이에요? 참, 클리닉 소개해 줬다는 말은 들었어요. 고마워요.”
“뭘요. 우리 집 식구들 다 사이코패스라고 말했잖아요. 막내 고모가 아동 심리학 전문의예요. 여기 원장이고.”
수경이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의사라면 치가 떨린다는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얘긴 들었어요. 언니야말로 그런 큰일 치르고 괜찮은 거예요?”
“네, 덕분에요.”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더니, 살다 살다 그런 상또라이는 또 처음 봤어요.”
생각할수록 기가 찬다는 듯 수경이 헛숨을 뱉었다. 오현아를 처음 본 건 명한유통 신사업 추진 기념행사 때였다. 차정혁의 약혼녀랍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는데 참 꼴불견이란 생각을 했더랬다.
“오현아인지 오징어인지, 처음 딱 봤을 때부터 느낌이 안 좋았다니까요. 어쨌든 잘 해결돼서 천만다행이에요.”
특유의 입담으로 위로를 한 수경이 문득 아래로 눈길을 떨궜다. 눈이 마주치자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시우가 꾸뻑 배꼽 인사를 했다.
“예쁜 누나! 안녕하세요.”
“시우도 안녕. 우리 잘생긴 꼬마는 괜찮아?”
“네! 시우 다 나았어요! 어…… 일곱 밤! 아니, 열 밤 자고 나서 다시 유치원 갈 거예요!”
시우가 열 손가락을 애매하게 접었다 펴며 씩씩하게 소리쳤다.
“잘 됐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밥 먹어요. 시우한테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었거든요. 시우는 뭐 먹고 싶어? 예쁜 누나가 쏠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도 좋아.”
“어…… 짜장면!”
만세 하며 자장면을 외치는 시우를 보며 다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제가 없는 동안 애한테 뭘 먹였길래, 다섯 살짜리 최애 메뉴가 자장면이 된 건지 모를 일이다.
세 사람은 근처에 있는 파스타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장면이 먹고 싶다던 아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되고 말았다.
“그동안 수경 씨하고 얼마나 통화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연락처를 몰라서 너무 아쉬웠어요.”
두 번이나 만났고, 만났다 헤어질 때면 으레 연락처를 주고받기 마련이었다. 한데 희한하게도 매번 그 전에 불상사가 일어나는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연락처를 물어볼 수가 있어야 말이지.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연락처를 모르네요.”
지금 막 깨달았다는 듯 수경이 소리 내어 깔깔 웃었다. 언제봐도 한결같다는 생각에 다정도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차정혁한테 물어보죠.”
“그러게요.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다정이 습관처럼 콧등을 찡그려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정혁에겐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워낙 샘이 많아야 말이지.
괜한 오지랖이라도 도준과 관계된 거라면 질투심에 삐딱해지고 보는 성미라 아예 시작을 안 하는 게 옳다는 판단이었다.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가 서빙되었다. 다정은 피자 한 조각을 덜어 시우의 앞접시로 옮겨 주었다.
그리고 수경의 접시에도 피자 한 조각을 덜어 주는데, 문득 옆자리에 있던 그녀의 핸드백이 눈에 잡혔다.
가방 위로 뭔가 삐쭉 튀어나와 있는데, 한눈에 봐도 유명 항공사의 항공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째선지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저…… 수경 씨 어디 가요?”
다정이 항공권을 눈짓하며 묻자 수경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차정혁이 그것도 얘기 안 해요?”
“그 사람, 묻지 않으면 시시콜콜 자기 얘기는 안 하는 타입이라서요.”
수경이 알 만하다는 듯이 턱을 끄덕거렸다.
“별건 아니고 이틀 있다가 일 때문에 뉴욕에 들어가거든요. 대학 졸업하고 M&A 관련된 일만 쭉 해 왔거든요. 이번에 차정혁이 새로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엄청 능력 있다는 얘긴 그 사람한테 들었어요.”
“차정혁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수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대체 대인관계가 어땠길래, 하나같이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저…… 수경 씨. 이런 말 조심스럽지만 도준 선배랑은 어떻게…….”
“그날 본 대로예요. 깔끔하게 끝났고 완전히 정리됐어요.”
“정말……이에요?”
다정의 얼굴에 아쉬움이 그득했다.
“언니 신경 쓰였나 봐요?”
“네, 솔직히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도준 선배가 수경 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남다르기도 했고요.”
“그럼 뭐 해요? 그 남자는 여전히 언니밖에 모르는데.”
“…….”
노골적인 반박에 다정은 할 말을 잃고 신음을 삼켰다. 이만큼이나 솔직하면서도 그 안에 감정을 전혀 담아내지 않으니 그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이쯤 되면 다정을 원망하고도 남았을 테다. 그러나 수경은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제삼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너무 쿨하기 때문일까. 그녀의 이성적인 면면을 멋지다고 느끼는 동시에 오히려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준 선배한테 오랫동안 많은 도움을 받고 의지했어요.”
저도 모르게 시작된 말은 다정의 진솔한 속마음이었다.
“내 탓이 커요. 지금껏 전혀 몰랐다고 말해 왔지만, 어쩌면 선배의 감정들을 모른 척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래야만 선배가 베푸는 친절과 호의가 부담스럽지 않을 테니까요.”
“언니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그 남자가 언니를 생각하는 마음인 거죠.”
“선배는 아마 연민이었을 거예요. 나도 은연중에 선배를 의지했던 거고요. 하지만 수경 씨를 향한 감정은 달라 보였어요.”
“어떻게 다른데요?”
수경이 호기심을 보였다. 다정은 눈을 홉뜨고 느낀 바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뜨겁다고 할까요? 오랫동안 봐 왔지만, 도준 선배랑 뭔가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은 전혀 매치가 안 되거든요.”
“언니가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수경이 너그러운 웃음을 그리며 본론만 간단히 하라 독촉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린 아직 연민과 사랑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서툴다는 거예요. 나 역시 그걸 요즘 배워 가는 중인데, 선배한테도 그걸 가르쳐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이 수경 씨였으면 더 좋겠고요.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잖아요. 단지 서툴 뿐이에요.”
“언니 말이 맞아요. 권도준 씨 괜찮은 남자고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 점이 좋아서 구애했던 것도 맞고요. 근데 나 같은 사람은요, 가치가 없는 것에 내 감정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요. 내 인생을 통틀어 그 남자와 함께 있었던 시간만큼 소모적이고 무의미했던 순간은 없어요. 완벽한 투자 실패였다고요.”
“…….”
다정은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지금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 선배가 그런 멍청이라 미안해.’라는 표정을 짓는 것뿐이었다.
* * *
휴대폰 화면을 만지작거리며 정혁은 따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며칠 만에 짬을 내어 다정과 데이트라도 할까 해서 근처에 와 전화를 했더니,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거다. 아들도 함께 가는 중이란다. 그쪽에서 애를 데리고 와도 좋다고 했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바로 눈앞에 있는 저놈의 아버지 말이다.
“상견례?”
준호의 말에 정혁이 휴대폰에 꽂혀 있던 눈을 위로 치떴다. 말은 없지만, 눈가가 경직되는 걸로 봐선 친구의 결혼 소식이 달갑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소개해 주지 않았느냐. 정작 소개해 준 유다정과 난 한참 멀었는데, 네까짓 게 뭔데 벌써 결혼을 하느냐. 대략 그런 말이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나 아버님 앞에서 실수한 건 아니겠죠?”
한껏 단아하게 차려입은 솔이가 상기된 뺨을 감싸며 걱정스레 말했다. 준호는 흡족한 얼굴로 도리질을 쳤다.
“실수는요, 전혀요. 아버지가 엄청 좋아하셨어요.”
“좋아하셨다고요? 하지만 절 보며 한 번도 웃지 않으셨단 말이에요.”
“우리 아버지 원래 예쁜 여자만 보면 긴장해서 굳어요.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그럼 이제 장모님께 말씀드려서 상견례 날짜 잡아요.”
솔이와 준호는 한창 결혼의 꿈에 부풀어 자신들의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다.
들어 봤자 속만 상하지. 정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클라이언트 미팅이 끝났다는 다정의 연락만 애가 타게 기다렸다.
유시우라도 놓고 갈 것이지, 심심해 죽을 맛이었다.
시간은 따분하게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딸랑, 도어벨을 울리며 민 실장이 카페로 들어왔다.
“전무님. 말씀하신 겁니다.”
민 실장이 한강병원의 로고가 새겨진 두툼한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자 한강병원에서 제작한 팸플릿이 쏟아져 나왔다.
두툼한 책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브라보! 실버라이프.」
건강한 노년을 위한 건강검진 프로그램 안내서였다.
정혁이 책자를 꼼꼼히 살핀다. 준호에겐 낯설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회장님 건강검진 예약해 드리려고?”
“우리 노인넨 나 아니라도 챙겨 주는 사람 많은데 뭐 하러.”
“그럼 누구?”
진심으로 궁금한 준호가 송아지처럼 순박한 눈을 끔뻑였다.
“장모 사랑은 사위라는 말 알아?”
“사위 사랑은 장모 아니냐?”
“어쨌든 장모님한테 오래 사랑받으려면 어떡해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던 정혁이 맞은편을 향해 눈을 치떴다.
“너도 사랑받고 싶으면 동참하든지.”
* * *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명을 보며 다정은 어리둥절 눈을 깜빡였다.
발신자가 「세상에서 제일 깜찍한 우리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다정은 시우의 휴대폰을 정애에게 주었다던 정혁의 말을 떠올렸다.
사실 게임 말고는 하는 게 없는 어린아이의 손에 있느니, 혼자 사는 노인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었다. 언제 어디서 긴급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이런 걸 보면 정혁은 의외로 사려가 깊었다.
저장 명을 ‘엄마’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정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 나예요.”
반가운 목소리로 받는데 어째선지 상대 쪽 목소리는 조금 호들갑스러웠다.
『워매. 이게 다 뭔 일이래?』
뭔 일이 있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다정은 대번에 심각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엄마. 무슨 일인데 그래?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한 거예요?”
『아녀. 그게 아니라 뭔 일인가 모르겄네. 웬 총각이 나를 차에 태워다가 커다란 병원으로 데블고 왔자녀.』
“병원……?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누가 엄마를 데리고 갔다고?”
『아 글씨 차 서방이 보냈다잖여.』
정애가 너무 자연스러우니까 다정도 어느새 그 호칭이 익숙했다.
“차 서방이? 차 서방이 뭘 어쨌다는 거야?”
『나도 몰겄어. 가만있어 봐. 여기 총각 바꿔 줄텨.』
『사모님 저 김 기사입니다.』
“안녕하세요, 김 기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전무님께서 어머니를 한강병원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종합검진 예약이 되어 있는데, 대략 3박 4일 정도 휴식하시면서 검진하실 예정입니다.』
다정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가방과 지갑 따위를 챙겼다.
“한강병원이라고 했죠? 지금 갈게요.”
다급히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다시 정애가 전화를 가로챘다.
『아녀, 오늘은 종일 굶어야 한다는디, 괜히 와서 노인네 기 빠지게 하지 말고, 니는 내일이나 모레나 한참 있다가 오니라. 아이고 마침 저짝도 왔네.』
저짝?
『시우 할머니. 일찍 왔네.』
이건 꽃분 씨 목소리였다. 그 순간 전화가 일방적으로 뚝 끊겼다.
황당함에 눈만 깜빡이던 다정이 거실로 눈길을 돌렸다. 시우는 TV에서 방영 중인 해양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벨루가나 돌고래, 펭귄이나 바다사자 등 귀엽고 사랑스러운 해양 동물이 소개되었다.
그중에 시우가 호기심을 보인 건 돌고래였다. 지능이 높고 장난기가 넘친다는 설명이 제 또래 친구들처럼 생각된 모양이었다.
다정은 총총 거실로 나가 시우의 집중하는 뒤통수를 기웃거렸다.
“우리 시우, 아빠한테 전화해 볼까?”
“어! 아빠?”
휙 돌아본 시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응. 우리 시우가 아빠한테 전화해서 이따가 초코케이크 사 오세요, 해.”
시우의 무구한 눈이 엄마를 수상쩍게 바라본다. 언젠 키 안 크고 충치 생긴다고 잔소리를 하더니 오늘따라 엄마가 참 별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어…… 쪼코케이크 안 먹고 시픈데!”
“그럼 피자는? 아빠 피자 사 오세요, 해.”
“어! 배부른데!”
“야…….”
다정은 오늘따라 통 비협조적인 아들을 부루퉁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