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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따님을 주십쇼! (82/114)


82화 따님을 주십쇼!
2023.05.14.


내버리다시피 포크를 놓은 시우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꼬뿐이 할머니이!”

“아이고, 우리 강아지. 여기 있었어?”

오도도 달려와 안기는 시우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숙희는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정이 선물한 해바라기 코르사주 모자까지 쓰고 숙희는 모처럼 단장한 모습이었다.


“우리 강아지. 맛난 거 먹었어?”

“네에! 아저씨랑 시우랑! 이모랑 자기 아저씨랑 케이크 먹었어요.”

“어이구 잘했네, 잘했어. 내 강아지.”

우쭈쭈 칭찬을 아끼지 않던 숙희의 눈이 불현듯 정체 모를 두 아저씨를 번갈아 보다가 마지막으로 당황한 기색이 여실한 딸의 얼굴로 날아가 꽂혔다.


“……어, 엄마가 어쩐 일이야? 가게는?”

솔이가 묻자 빈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숙희가 푸념처럼 사정을 늘어놓았다.


“아휴, 몰러. 사거리 치킨집 여편네가 산에 가서 백숙 한 마리 먹고 오자고 꼬시길래 일찍 문 닫고 꽃단장까지 하고 나섰더니, 아 글쎄 몇 시간 만에 일이 생겼다나 뭐라나. 바람맞고 장사할 흥도 안 나서 일찍 들어가는 길에 들렀지 뭐.”

“아, 그래……?”

“근데, 뉘시래?”

숙희의 관심이 다시 두 남자에게 향했다. 시우와 딱 붙어 있는 남자. 그리고 솔이와 딱 붙어 있는 남자. 그냥 봐도 커피나 마시러 들른 보통 손님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우렁찬 인사에 숙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야, 안녕하긴 한데……. 근데 누구시길래 나더러 어머님이래?”

“저는 홍! 준! 호! 라고 합니다. 따님과 만나고 있습니다!”

“만난다면…… 아이고, 세상에!”

그제야 숙희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놀라움보다는 금맥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감격에 더 가까웠다.

자리를 차고 일어난 숙희는 냉큼 달려가 준호의 손을 붙잡고 예비 사위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우리 솔이 남자친구?”

“예! 그렇습니다. 따님과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교제 중입니다.”

어째선지 숙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 기세를 몰아 준호가 바짝 군기 든 목소리로 소리쳤다.


“장모님! 따님을 주십쇼!”

“아이, 그럼. 주고말고. 이런 총각이면 백 번도 주겠네. 호호호.”

 

 
얼른 데리고 가라며 성격 좋게 웃던 숙희는 감격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듬직하기도 해라. 인물도 훤한 게 잘생겼다 잘생겼어. 이것아. 왜 말을 안 했어?”

“그게 아직 만나는 단계라서…….”

솔이가 수줍은 듯 어깨를 배배 비틀었다.

한 남자가 요란법석을 떠는 동안 다른 남자는 평화롭고 고요하게 제 자식의 입에 케이크를 떠먹이고 있었다.


“그럼 그짝은 누구래?”

시우를 살뜰히 먹이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숙희가 의문을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정혁의 눈썹이 불편하게 꿈틀거렸다.


“엄마, 그게 있잖아……”

곤혹스러운 상황을 적당히 무마시키기 위해 솔이가 숙희의 귀에 짧게 무언가를 소곤거렸다. 숙희의 눈이 즉각 휘둥그레지더니 입도 쩌억 벌어졌다.


“아이고나!”

연달아 짝, 하고 손뼉을 부딪친 숙희는 한동안 정혁과 시우의 얼굴을 신기한 듯 번갈아 보고는 할 말 많은 얼굴로 탄식만 뱉었다.

카페에 들어서서 처음 본 순간 어딘지 예사롭지 않다 했다. 알고 봐서 짐작을 못 했지, 모르고 봤으면 영락없을 부자지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우가 아빠를 만났다는 소식을 딸에게 전해 듣긴 했었다. 저들 앞날이니 저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도 내심 잘되었으면 하고 바랐더랬다.

당장 정애에게 알려 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행여 제 엄마 귀에 들어갈까 다정이 노심초사한다기에 듣고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상 눈으로 보니 놀랍고 반갑고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혁 씨, 전에 말씀드렸죠? 시우 어릴 때부터 돌봐 주셨던 저희 엄마세요.”

솔이의 소개에 눈을 크게 키운 정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한 묵례로 감사를 표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전래동화가 은혜 갚은 까치라서, 다른 건 다 무시해도 제 아들 키워 준 은혜는 모른 척 못 한다.

시간이 흐르고 시우가 하품을 쏟았다. 낮잠을 설쳤는지, 잠이 와 죽겠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혁이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했다.


“유시우, 일어나. 집에 가서 낮잠 자게.”

그러자 시우가 잠결에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낮잠…… 어? 시우 집에 안 가는데?”

“집에 안 가면 뭐. 노숙해? 유시우가 집도 절도 없는 거지야? 왜 집엘 안 가?”

“집에 벌레 있어서 못 가요. 벌레 잡을 때까지 이모네서 자요.”

좀처럼 영문 모를 말에 정혁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벌레……?”

 

* * *



“앗, 뜨거!”

화들짝 놀라 냄비 뚜껑을 놓친 다정은 잽싸게 귓불을 꼬집어 쥐었다. 여기저기 베이고 데인 흔적들로 낭자한 두 손은 몇 시간째 물 마를 틈이 없었다.

불을 줄이고 돌아선 다정은 휴대폰을 열고 요리의 레시피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간장…… 두 컵…… 맛술, 한 컵……. 그리고 마늘 두 큰술…….”

하,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컵과 숟가락이 어떤 사이즈를 말하는지 몰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식탁과 조리대엔 온갖 식재료들로 빼곡했다. 벌써 수 시간째 땀을 뻘뻘 흘리며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완성된 요리는 한 가지도 없었다.

이런 복잡한 요리는 해 본 일이 없어 레시피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건물 한 채를 올리는 것처럼 머리가 욱신거렸다.

어설픈 실력에 뭘 하려니 아침나절을 꼬빡 잡아먹고 가스 불에 음식을 올려 두고 나갈 수도 없어 시우의 픽업도 솔이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TV를 보던 성자가 지루한 듯 기지개를 켜다가 주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다정을 힐끗 보다가 시간을 보자 반나절이 꼬빡 지나 있었다. 어김없이 퉁박이 날아들었다.


“얘, 밥 한 끼 얻어먹으려다 굶어 죽겠다.”

“다 됐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러고도 30분이 지나서야 그럴듯한 밥상이 차려졌다.


“다 됐어요. 오셔서 드세요.”

“아이고, 배가 등짝에 달라붙어서 허기진 줄도 모르겠네.”

투덜거리며 식탁에 앉은 성자는 음식들을 눈으로 죽 훑었다. 구절판과 탕평채, 갈비찜, 육전, 잡채를 비롯해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없는 실력에 국가고시보다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다정은 왜인지 숨이 가빴다.


“됐죠? 말씀하신 거 다 차려 드렸으니까 약속대로 이것만 드시고 정말 가시는 거예요. 아셨죠?”

“얘, 내가 뭐랬니? 내 입맛에 맞게 한 상 잘 차려다 바치면, 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일단 먹어 봐야 알지.”

새침하게 말한 성자가 갈비를 쥐어 한입 뜯고는 인상을 팩 찌푸렸다.


“어후, 짜! 소태가 따로 없네.”

“짜요? 이상하네. 레시피대로 했는데…….”

다정은 뺨을 긁적였다. 갈비찜이 왜 소태가 되었는지 그녀로선 알 길이 막막했다.


“짜긴 한데 먹을 만해. 얘, 같이 먹자.”

“전 됐어요. 많이 드세요…….”

말할 기운도 없던 다정은 지친 몸을 끌고 털레털레 거실로 나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렇게 겨우 한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별안간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다정은 반쯤 감긴 눈꺼풀을 퍼뜩 밀어 올렸다.


“멀쩡한 초인종 두고 누가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나 몰라. 얘, 누가 왔나 보다. 나가 봐라.”

소태라며 타박하던 갈비찜을 뜯으며 성자가 구시렁거렸다. 현관으로 걸어 나간 다정은 무심코 문을 열다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고 말았다.

문밖에 선 남자를 보며 입을 틀어막은 다정은 자신의 등 뒤를 연신 힐끔거렸다.

바빠서 금요일에 보자던 사람이 갑자기 목요일 오후에 제집 문을 두드렸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퍼뜩 판단이 서질 않았다.

놀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그가 성큼 걸음을 밀고 들어섰다. 다정이 말릴 겨를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선 정혁은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에서 포식 중인 형체를 보며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성자가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설마 설마 했었다. 그런데.


“진짜 있네?”

정혁의 입꼬리가 어이없게 미끄러졌다. 잘 먹다가 순간 얼음이 되고 만 성자가 갑자기 딸꾹질을 터뜨렸다. 아들의 등장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정혁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나와.”

“엄마 밥 먹는 거 안 보여? 할 말 있음 여기서 해.”

나오란다고 나갈 것 같으면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성자가 고집스럽게 버티자 빤히 노려보던 정혁이 식탁 곁에 있던 다정의 휴대폰과 지갑을 주워 돌아섰다.

그러곤 곧장 다정에게 그것들을 안기며 현관 쪽으로 떠밀었다.


“유시우한테 가 있어.”

“차정혁 씨. 어쩌려고요?”

“금방 끝나. 가.”

그의 목소리가 무겁고 또 차가웠다.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두 사람만 남겨두고 가는 것이 염려스러웠지만, 다정은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해 더 말하지 않고 현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성큼 돌아서 거실로 돌아온 정혁은 성자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상체를 숙였다. 차가운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데, 별안간 웃음이 났다. 화가 나야 하는데, 우스워서 웃음이 난다.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킨 그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노인네 만났어?”

“그 노인넬 내가 왜 만나? 어디 그 노인네가 날 상종이나 하니?”

알면서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것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정혁은 피식 입꼬리를 휘었다.

그래, 아무리 급해도 박 회장이 이 여자까지 끌어들일 리 없지. 혹시나 했었다.


“그럼 누구?”

“얘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번엔 발뺌하는 기색이 여실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잡아떼? 이 일 시키면서 여기 알려 준 사람 있을 거 아니야?”

“시키긴 누가 시켜? 그냥 이래저래 알게 됐고, 내 아들 그냥 뒀다간 엄한 것한테 발목 잡혀서 팔자 망치겠구나 싶어서 쫓아온 거지. 네 엄마는 뭐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인 줄 알아?”

정혁은 거침없이 내뱉는 성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어나. 당신 있을 데 아니야.”

“싫다. 난 뭐 며느리한테 대접도 못 받니?”

“꿈도 야무지네. 아들이 없는데 어떻게 며느리가 있어?”

야멸차게 뱉은 말에 성자가 야속하단 듯이 정혁을 쏘아보았다.


“너 언제까지 이럴래? 엄마가 다 너 하나 생각해서 이러는 건데, 왜 그걸 몰라?”

“그래서 어디까지 쪽팔리게 할 건데? 나만 생각한다고? 나 낳은 날은 기억해? 내가 보고 싶어서 운 적은 있어? 평생 내가 걱정된 적 있냐고.”

“치, 부자 할머니 있는데 걱정할 게 뭐야? 네가 아무리 그래도 너 내 배에서 나왔어. 부모 자식은 천륜인데, 싫다고 애미 자식 사이가 끊길까?”

“그래. 그게 내 목을 조르고 싶게 끔찍해. 짐승도 지 새끼는 안 버리잖아. 근데 짐승만도 못한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하니까, 내가 쪽팔려서 딱 X져 버릴 것 같아. 알기나 해?”

“정혁아! 너 어떻게 엄마한테……!”

꿋꿋하게 버티던 성자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양심이 있으면 제발 꺼져.”

“그래! 내 나가마! 다신 네 앞에 안 나타나! 나 죽었대도 올 필요 없다.”

부산스레 짐을 챙긴 성자는 뒤도 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야박한 녀석. 어미 자격 없는 거 누가 몰라?

그래도 인정하기 싫었다. 시근거리던 성자는 문 앞에 서 있는 다정을 발견하곤 열이 오른 눈시울을 재빨리 추슬렀다.


“왜?! 너도 새끼 버린 죽일 년이라 나 무시하니?”

약한 모습을 들킨 게 싫어서 대뜸 싫은 소리가 나갔다.


“아들한테 대접 못 받고 쫓겨난 꼴을 보니까 고소해 죽겠지?”

그저 감정이 격해져 쏟아부은 말일지언정 다정은 재빨리 부정했다.


“아뇨, 안 그래요…….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해하는 척하지 마. 가증스러우니까.”

성자는 눈을 흘기며 돌아섰다. 사나워 보이려 애는 쓰는데, 발걸음은 달아나는 것처럼 다급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라 성자와 나란히 선 채 망설이던 다정은 더 늦기 전에 입을 열었다.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저도 알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의 인생이 더 중요했던 거잖아요. 저도 그렇거든요. 아이도 소중하지만, 전 저 자신도 소중해요. 그래서 저도 아이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이 뭔지 알아요. 그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어머니……도 그러셨던 거죠?”

“…….”

성자는 떨리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눈시울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는 건 난생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자식을 버렸다. 돌이켜봐도 참 철이 없었지. 당시엔 그게 뭔지도 몰랐다. 어렸고 무책임하게 저지른 일의 대가는 앳된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벅찼다.

비좁은 단칸방에 갇혀 아이를 돌보며 제 꽃다운 젊음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은 고되었고 미래는 암울했다. 모든 게 싫어서 현실로부터 달아나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안다. 손가락질받아 마땅하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것 역시 알았다.


“후회 안 해. 내 비록 원하는 대로 살지는 못했어도, 내 멋대로는 살았어.”

성자는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는 내 인생이 싫지 않았다고.

이렇게 큰소리라도 치지 않으면 자식까지 버리고 나가 고작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니까. 그럼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져 버리니까.

다정은 승강기 문에 반사된 성자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후회를 감추기 위해 진심마저 묻어버린 가면 같은 그녀의 얼굴이 슬프게 느껴졌다.


“후회가 없으면 된 거예요. 만약 후회가 있더라도 그건 선택한 사람의 몫이고요. 하지만 사과는 하셨어야 해요. 그 사람한테 말해 주세요.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그렇게 사과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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