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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용서하는 용기 (83/114)


83화 용서하는 용기
2023.05.18.



 
하강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바라보던 다정은 서둘러 돌아섰다.

정혁은 시우에게 가 있으라고 말했지만, 성자가 돌아갔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혼자 남아 있을 그가 걱정스러워 발걸음이 빨라졌다.

현관문 도어락을 해제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섰을 때 내부는 고요했다.

복도를 지나 집 안을 넓게 훑자 정혁이 식탁 앞에 맥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째선지 다정은 더 다가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맞쥔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다.

그런 다정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정혁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다정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안다. 성자가 며칠 동안 제집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말하지 않아서 마음이 상했을 테다. 실망했을지도 모르고, 약간의 배신감 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모른 채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들통이 난 이상 다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가능하면 그에게 아픈 기억은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요즘 들어 제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화…… 났어요?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요.”

쭈뼛쭈뼛 사과한 다정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에 정혁은 다시 한숨을 뱉었다. 그러곤 난장판이 된 주방과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을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너 바보야?”

대뜸 날아든 말에 다정이 눈썹을 씰룩였다.


“무슨 소리예요?”

“바보가 아니고 왜 이런 꼴을 당하고 있어?”

“그게…… 당했다고 할 만큼 심하게 한 건 없어요.”

“설마 저 여자가 내 뭐라도 된다고 믿은 거야?”

“…….”

다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낳아 준 사람이니 엄마가 아니겠느냐, 하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너도 내가 비참해지길 바란 건가?”

“차정혁 씨!”

울컥한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던 다정이 야속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화난 거 이해해요. 그래서 내 선에서 정리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들켜 버렸지만요. 비참해지길 바란다거나 화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래도 미리 말 못 한 건 정말 미안해요…….”

“애쓸 필요 없어. 너도 그 여자를 벌레라고 생각했잖아. 그래서 유시우한테 그렇게 말한 거고.”

“그건…….”

그건 그냥 무심코 한 말이었다. 시우가 벌레를 무서워했기에 벌레를 잡는다고 하면 다른 토를 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절대 성자를 벌레 취급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변명을 해야 하는지 다정은 골치가 아팠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지금도 봐. 유다정 넌 왜 미안해하고 있는 거야? 나한테 화를 내야지. 왜 저런 여자가 널 찾아와서 뭐라도 되는 양 행세하게 하느냐고 화를 내고 욕을 해야지. 저런 여자가 날 낳은 여자라고 실컷 비웃어 줘야지.”

그가 자기 비하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자, 다정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나라고 좋아서 그런 줄 알아요?!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시어머니라며 들이닥쳐서는 이거 해내라, 저거 해내라! 끌어내도 안 나가고 버티는 통에 경찰에 신고하고 싶은 걸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참았어. 내가!”

“글쎄! 그걸 왜 참냐고!”

마찬가지로 답답하다는 듯이 정혁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다정도 지지 않았다.


“당신 어머니니까요! 누가 뭐래도 차정혁 씨 낳아 준 엄마잖아요!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낳았으니까 우리 시우도 있는 건데! 하물며 길 가다 부딪친 아줌마한테도 막 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 어머니한테 어떻게 그러겠어요?!”

“…….”

정혁은 왜인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기도 잠시.


“누가 내 엄마야! 저 여자는 엄마도 뭣도 아니야! 유시우한테도 마찬가지고.”

“그래요? 그럼 차정혁 씨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건데요? 보통은 엄마도 뭣도 아닌 사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아요.”

“…….”

정혁은 다시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미운 감정도 기대가 있을 때 생기는 거예요. 차정혁 씨도 그리웠으니까 그만큼 어머니가 미운 거잖아요.”

“아냐…… 그런 거!”

정혁은 괴로운 듯 머리를 거머쥐었다.


“차정혁 씨. 당신한테 어머니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에요. 난 단지 자식 생각하는 엄마 마음은 다 똑같다는 말을 해 주고 싶은 거예요.”

성자를 처음 봤을 땐 다정도 그녀를 세상 상종 못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제집에 뻐기고 앉아 이래라저래라 시답잖은 잔소리를 해 대는 것도 죽을 맛이었다. 매일 밤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것 역시 그랬다.

이틀 전 새벽인가.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온 다정은 잠든 성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소파 밑엔 어김없이 맥주 캔들이 흩어져 있고 TV는 켜 놓은 채였다.

그리고 그녀가 잠결에 스르르 놓친 한 장의 사진을 보고야 말았다.

손에 쥔 채 가슴에 꼭 품고 있던 사진 속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시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니, 시우와 꼭 닮은 아기의 모습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아마도 정혁의 신생아 적 모습이라 짐작되었다. 그제야 다정은 어째서 그녀가 맨정신으로 잠들지 못하는지를 깨달았다.

자식을 버렸으니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주홍글씨 같은 낙인 때문에 갖게 된 편견인지도 몰랐다.

매일 밤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도 어떻게 그 마음이 그에게 티끌만큼도 전해지지 않았던 걸까.

그다지 이상할 건 없었다. 진심을 표현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물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상식적이진 않았지만, 뭐가 됐든 당신 어머니는 당신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지, 만약 당신한테 해로운 일이라고 판단했다면 일확천금을 준대도 절대 이러지 않았을 거예요.”

“유다정, 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넌 아무것도 몰라…….”

“왜 몰라요? 나도 엄만데! 세상 사람이 다 손가락질하더라도 우리 시우를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요. 차정혁 씨는 안 그래요……?”

정혁은 어째선지 호흡이 가빠졌다. 아무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다정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랬을까. 단 한 번도 성자가 자식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이 짧아 세상의 기준과 상식에 어긋나더라도, 다정의 말처럼 그 마음만은 자식을 위했던 걸까.


“고작 나흘이었지만,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아니, 아니. 인정 못 해. 정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딴 여자가 자랑스럽든 말든 난 아무 관심도 없어. 근데 네가 뭔데 그걸 아량 좋게 받아 주고 있어. 나에 대한 동정 같은 건가?”

고분고분해지는가 싶더니 방심하는 사이 또 삐딱선을 탄다. 다정은 한숨을 삼키고 목소리를 조금 더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적어도 나 때문에 당신이 어머니를 더 미워하지 말았으면 했어요. 이 일을 알면 당신이 어머니를 더 미워하게 될까 봐 그랬다고요. 지금처럼요.”

“그것까지 네가 왜 신경 써.”

“내가 장애물이 되면 안 되잖아요. 언젠가 당신이 용기를 낼지도 모르는데…….”

정혁이 의아하게 눈을 키웠다.


“용기?”

“당신이…… 어머니를 용서할 용기요.”

하, 정혁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마른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 어머니도 언젠가 사과할 용기를 낼지도 몰라요. 적어도 도움은 못 될망정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골이 나 때문에 깊어지는 건 바라지 않았어요.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생각보다 털털한 성격이셔서 며칠 기분 맞춰 드리면 그냥 돌아갈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실제로 그랬다. 짧은 시간 겪으며 느낀 건 성자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다.

싫은 소릴 던져 놓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타입이랄까.

굶어 죽겠다는 둥 악독한 시어머니처럼 굴다가도 막상 차려 놓은 밥상 앞에선 같이 먹자고 권한다든가, 은근히 배려 아닌 배려를 할 땐 다정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필터링 없이 뱉은 말들이 진심이고, 성자가 정말 악독한 사람이었다면 같이 밥을 먹자는 말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쁘게 말하면 대부분 아무 생각이 없는 거고,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분명 털털한 성격이었다.


“내가 해결할 때까지 모르면 좋았겠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알게 됐으니까…… 미안해요.”

다정은 맞쥔 채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열심히 반성하는 태도를 취해 보였다.


“이리 와.”

바늘도 안 들어가게 굴더니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온화했다. 눈을 홉뜨자 잘생긴 얼굴에 서렸던 분노도 가시고 없었다.

다정은 쭈뼛쭈뼛 식탁으로 다가섰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 서자 그가 다정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풀썩 주저앉다시피 그의 무릎에 앉아 어깨를 붙잡자, 정혁이 그녀의 품에 머리를 기대 왔다.

어쩐지 안쓰러워진 다정은 그의 어깨와 등을 보드랍게 보듬어 안았다. 살살 다정히 뒷머리를 어루만져 주는 손길을 느끼며 정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미안해.”

한참 만에야 들려온 목소리가 사과했다. 다정은 도리질을 쳤다.


“차정혁 씨가 왜요? 오히려 내가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날 위해서였다며.”

중얼대던 정혁의 눈길이 난장판인 주방을 다시 슥 훑었다.


“대체 이게 다 뭐야? 그 여자 먹이려고 이걸 다 한 거야? 손목도 안 좋으면서?”

정혁이 타박하며 다정의 오른쪽 손목을 살그머니 감아쥐었다.


“다 드시면 가신다고 해서요…….”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대답에 정혁은 헛숨을 흘렸다.


“알아요. 그건 그냥 핑계였겠죠. 근데 해 드리고 싶었어요. 관심이 필요해 보였거든요. 누군가에게 어리광이나 응석을 부리고 싶으신 게 아닐까 하는……. 외로우셨던 것 같아요.”

다정의 손목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난 정말 괜찮아요.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니고 고작 사나흘이었는데요 뭘.”

하여간 유다정은 응석이나 투정을 부릴 줄 몰랐다. 재미없게. 정혁은 그녀의 품에 다시 머리를 기대었다.

유다정 냄새가 났다. 유시우가 좋다고 말했던 엄마 냄새.


“차정혁 씨.”

“응?”

“시우 보고 싶어요.”

그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다정이 말했다. 솔이네서 재우고 등원도 제 손으로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종일 시우를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시무룩해진 목소리를 들으며 정혁은 피식 웃었다.


“데리고 올게.”

 

* * *

아파트를 나섰을 때 대기하고 있던 민 실장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내 아들 데리러 갈 거예요. 다시 데려다주고 두 사람은 들어가세요.”

정혁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 숙희의 머리에 달린 커다란 해바라기 코르사주가 눈에 띄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숙희와 준호는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어벨 소리에 솔이가 눈길을 돌렸다. 정혁의 등장에 그녀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묻는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정혁은 짧게 대답했다.


“정리됐어요. 그보다 유시우 데리러 왔는데. 유다정이 보고 싶대서.”

“아…….”

시우를 데리러 왔다고 하는 걸 보니, 별일 없이 정리가 된 게 맞나 보다.


“그런데 시우 이제 막 잠들었는데, 30분만 재우고 데려가세요.”

정혁은 목을 빼고 사위를 훑었다. 가만 보니 숙희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든 유시우가 보였다.


“자게 둬요. 그리고 유다정이 나머지 세 사람도 와서 저녁 들라고 하던데.”

정혁이 눈썹을 으쓱하며 말하자 솔이의 눈가가 꿈틀거리더니 경계하듯이 반문했다.


“저녁을……요? 왜요?”

“뭐 그냥, 음식을 잔뜩 만들었는데 먹을 사람이 없다고.”

“아, 음식을…….”

이라며 대답을 망설이던 솔이의 눈동자가 핑글 굴렀다. 그렇지 않아도 장을 잔뜩 봤다며 오전에 통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솔이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이걸 어쩌죠? 오늘은 엄마 모시고 외식해야 할 것 같아서요. 보시다시피 두 사람 할 얘기가 많아 보이잖아요…….”

말끝을 늘이며 하하 웃던 솔이는 예비 장모와 사위의 첫 대면이니만큼 몹시 특별한 날이라 외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강조했다.

정혁은 대수롭지 않게 즉각 수긍했다.


“할 수 없죠.”

“그럼 시우 깰 때까지 뭐 마시면서 기다려요. 커피 줄까요?”

“네.”

쫍, 쪼로롭.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쭉 흡입한 정혁은 외딴섬처럼 대각선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여전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숙희와 준호의 대화를 귀에 담았다.


“어이쿠, 위로 형들이 셋씩이나?”

숙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큰형님하고는 열다섯 살 차이 나고, 셋째 형님하고는 일곱 살 차이 납니다.”

준호는 해맑은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하면서도 웃어른을 향한 공손함을 잃지 않았다.

삐딱하게 다리를 꼰 채 근거리에서 그 장면을 관람하던 정혁은 반듯하게 내려놓은 준호의 무릎을 빤히 보았다. 매우 단정해 보였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딘가 확실히 건방져 보이는 태도였다. 정혁은 꼬아 비튼 다리를 풀어 준호처럼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한결 나았다.

예비 장모를 대하는 몸가짐과 자세라면 미리미리 익혀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럼 귀염을 많이 받고 자랐겠네.”

“네, 아버지는 손자 보듯 귀여워하셨고, 형들은 과장 조금 보태서 일찍 본 자식처럼 챙겨들 주셨습니다.”

“형님들은 다 출가했고?”

“네, 세 분 다 결혼해서 조카들도 있습니다. 제일 큰 조카가 열일곱입니다. 제일 어린 조카가 셋째 형님네 막내인데 엊그제가 돌잔치였습니다. 하하하.”

“아이고. 얼마나 귀여울까 그래.”

“네, 그래서 저도 빨리 솔이 씨하고 결혼해서 예쁜 딸 낳고 싶습니다!”

“어머나! 준호 씨도 차함!”

준호의 열띤 바람에 화들짝 뺨을 붉힌 솔이가 그의 팔뚝을 퍽퍽 때리며 내숭을 떨었다.

숙희는 그저 흐뭇했다.


“이 사람아! 누가 말리나. 그럼 빨리빨리 진행 시켜서 하나 낳으면 되지.”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그 안에서 웃지 않는 건 잠든 시우와 염탐하듯 귀를 쫑긋 세운 정혁뿐이었다.

정혁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하고 싶다. 결혼.

생각해 보니 저렇게 등을 떠미는 장모가 있다는 건 행운이고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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