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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파이팅 (81/114)


81화 파이팅
2023.05.11.



 
토끼반 담당 선생은 앳된 얼굴로 선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다운 미소였다.

그녀는 상담 테이블 너머로 나란히 앉은 원아와 학부형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전체적인 사이즈와 분위기, 조숙한 정도만 다를 뿐, 놀랍도록 똑 닮았는데 막상 부자지간은 아니라고 하니 약간 혼란스러웠다.

토끼반 선생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물렸다.


“아버님……은 아니라고 하셨고, 그럼 누구……?”

“글쎄요. 조만간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관계를 정의하기 어렵네요.”

정직한 어조와 매끄러운 말투.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토끼반 선생은 아, 하고 탄식하며 예의상 고개를 주억거렸다.

좌우로 빠르게 왕복하던 선생의 눈동자가 말똥말똥 눈을 깜빡이고 있는 시우에게 향했다.

이럴 땐 순수의 결정체에게 물어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했다.


“시우야, 이분은 누구셔?”

“호랑이 아저씨!”

시우가 만세를 부르며 천진하게 소리쳤다.


“호랑이 아저씨?”

“네! 어…… 호랑이 아저씨는, 그러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시우가 이내 짹 하고 외쳤다.


“엄마 남자친구예요!”

마침내 명확하게 밝혀진 관계성에 선생은 짧은 숨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조직에 몸담고 있다 보니,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자신의 좁은 시야를 반성하며 토끼반 선생은 다시 한번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그러시구나.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선생님. 저거 말입니다.”

선생의 물음에 정혁이 한쪽 벽면을 눈짓했다. 현관 게시판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포스터가 교실 벽에도 붙어 있었다.

덩달아 선생도 체육대회 포스터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눈을 깜빡거리는 선생을 향해 정혁은 몹시도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참가 신청서를 쓰고 싶습니다.”

 

* * *

거창한 과정을 예상한 것과 달리, 가족과 함께하는 체육대회 참가 신청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이 났다.

참가 신청 겸, 다소 난해한 상담을 끝마치고 교실을 나서기 무섭게 시우가 꾸뻑 허리를 접어 배꼽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시우 어린이도 잘 가요.”

씩씩한 인사에 토끼반 선생도 토끼처럼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기도 잠시, 보호자에게 옮겨간 선생의 미소가 어색해졌다.


“그럼…… 저기, 안녕히 가세요.”

뭐라고 호칭해야 할지 난감한 듯 우물거리던 선생이 가까스로 인사를 했다. 그에 정혁은 까딱 고개만 숙인 뒤 돌아섰다.


“유시우, 가.”

손가락을 내밀자 고사리손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검지를 움켜쥐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하는 길에 정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유시우.”

“네에!”

“무슨 색 좋아해?”

“어…… 시우는, 핑크!”

“진짜?”

오, 하고 정혁이 감탄사를 흘렸다. 내 아들의 컬러 취향이 생각보다 세련됐다는 생각을 할 때 시우가 물었다.


“아저씨는요? 아저씨는 무슨 색 좋아해요?”

대각선으로 눈길을 내린 그의 입꼬리가 우쭐하게 미끄러졌다.


“난 블랙. 남자는 블랙이야.”

“불뤡?”

시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혁이 눈썹을 으쓱했다.


“빨강이 영어로 뭐야?”

“레! 드!”

“노랑은?”

“옐로우!”

“깜장은?”

“깜장, 어…… 블랙!”

그제야 알았다는 듯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옳지. 유시우 똑똑해.”

무던히 던지는 칭찬에 유시우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는다. 유치를 활짝 드러내고 웃는 모양을 보며 정혁도 피식 웃었다.


“새 차 뽑으면 핑크로 튜닝해 줄까?”

“어? 투닝?”

“휠은 티타늄으로 레이어드해서 핑크로 도색해 줄게.”

“티탄……?”

“방향제는 어떤 걸로 할래? 난 요즘 머스크 계열이 좋더라. 남자의 향기라고 할 수 있지.”

“마스크?”

“유시우는 무슨 냄새 좋아해?”

드디어 알 만한 질문이 들리자 시우가 적극적으로 대답을 생각했다.


“시우는…… 쪼꼬렛 냄새요! 아저씨는요?”

“나도 쪼꼬렛 냄새 좋아. 쪼꼬렛 냄새나는 유시우도 좋고. 엄마는 무슨 냄새 좋아해?”

“엄마? 어…… 근데 엄마 냄새 대빵 좋은데!”

“그치. 엄마 냄새 대빵 좋지. 나도 엄마 냄새 좋아.”

손을 잡고 나란히 복도를 걸어 나가며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을 때였다.


“오빠!”

불현듯 소프라노 톤의 음성이 복도를 쩌렁 울렸다. 잘 아는 목소리에 정혁의 발이 멈춰 섰다. 돌아보자 어김없이 잘 아는 여자가 복도 저편에 서 있었다.


“원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현아를 발견하고 시우가 공손히 배꼽 인사를 하지만, 이내 커다란 그림자에 시야가 가로막히고 만다.

정혁은 한 걸음 옆으로 옮겨서며 시우를 제 뒤로 감추었다. 시우를 향해 날아드는 현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위험한 것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려는 본능처럼, 유해한 그 어떤 것도 제 아들에게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긴 바 없으나, 방금 시우를 향한 눈빛에서 오현아가 제 아들에게 해롭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정혁의 경계 어린 태도에 현아의 눈가를 물들인 붉은 기가 조금 더 짙어졌다.


“오빠, 나랑 얘기 좀 해.”

“…….”

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혁은 돌아서서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시우. 밖에 민 실장 아저씨 기다리고 있어. 가서 야옹팡 하게 휴대폰 빌려달라고 해.”

“네에! 원장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야옹팡 소리에 신난 시우는 잽싸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곤 현관을 향해 와다다 달려갔다.

현아의 눈초리가 그 뒷모습을 또 한 번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다 저 애 때문이다. 저 애만 없으면 정혁도 생각을 돌려먹을 텐데…….


“해, 할 말.”

간결한 말투에 눈길을 들자 정혁의 냉정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아는 그를 향해 가깝게 다가섰다.


“오빠, 우리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거야?”

침착하자고 다짐하는데 어째선지 뱉는 목소리가 절박하게 울렸다. 정혁은 의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우리가, 뭘 시작이나 했던가?”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 고작 그런 여자 때문에 다 망칠 작정이야?!”

“오현아. 너랑 나, 명한이랑 한송에 대해서만 얘기해.”

다정과 시우가 언급되는 게 불쾌한 양 정혁이 나직하게 경고를 뱉지만, 현아는 아랑곳없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해? 그 여자가 대체 뭔데!”

“내 아들 엄마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

“그럼 난. 난 오빠한테 아무것도 아니었어? 우리 사이에 어떻게 그래?!”

정혁은 긴 한숨을 뱉었다. 시간이 갈수록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대화가 슬슬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현아. 자꾸 너랑 내가 특별한 사이였던 것처럼 말하네.”

“결혼할 사인데 당연히 특별하지!”

“결혼할 뻔했던 사이지. 다르게 말하면 필요에 의해서 잠깐 엮일 뻔했다가 만 사이고.”

“그따위 여자 때문에……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왜 못 해? 내가 언제 절절한 사랑의 맹세라도 하면서 네 손이라도 한번 잡은 적 있던가? 근데 그 여자랑 내 사이엔 애도 있어. 넌 아니지만, 네가 그따위라고 말하는 여자는 나한테 엄청 특별하다는 뜻이야. 알아들어?”

치욕으로 일그러진 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가만 안 둬. 내가 그 여자 가만 안 둘 거야.”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의 의미를 뒤늦게야 깨닫고 정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긴 다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큼 뻗어나갔다. 그에 흠칫 놀라 뒷걸음치는 현아를 벽으로 몰아세운 그가 바투 거리를 좁혔다.


“오현아. 다시 말해 봐.”

 

 
무미건조한 말투지만 충분한 위협이 서려 있었다.


“가만…… 안 둘…… 거라고 했어. 왜?!”

희미하게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도 현아는 오기를 부렸다. 잠잠한 눈길로 바라보던 정혁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뭔가를 조작해 현아에게 화면을 내보였다.

음성녹음 중인 화면을 보며 현아가 와작 인상을 구겼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다시 말해 보라고.”

“…….”

막상 녹음기를 들이대자 현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정혁은 한숨을 삼키며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가만 안 두면 어떡할 건데?”

“나…… 어떻게든 오빨 되찾고 말 거야.”

두어 걸음 물러난 정혁은 다시 길게 한숨을 뱉었다. 오현아는 구제불능이었다.


“그래. 네 의지가 그렇다는데 내가 뭘 어떡해. 파이팅.”

응원하는 그의 목소리에 낙담과 체념의 기색이 어렸다.


“근데 오현아. 앞으로 아이하고 아이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너부터 의심할 거야. 그리고 네 짓이 맞으면 너 내 손에 죽어. 그러니까 무슨 짓을 벌이고 싶을 땐 백 번쯤 생각하고 저질러. 알겠지?”

“오빠!”

“그럼 원장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고개를 까딱 기울인 그는 홀연히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싸늘한 뒷등은 일말의 어떤 감정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새삼스러웠다. 지금껏 늘 저 뒷모습만 보아 왔었는데, 어째서 처음 보는 것처럼 그 싸늘한 뒷등이 이리도 야속할까. 그 사실을 깨닫자 뜨거워진 눈시울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현아는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뾰족하게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럴 순 없는 거다. 지난 10년 동안 오직 한 사람을 바라보며 달려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빼앗길 순 없었다.

* * *

딸랑. 도어벨 소리가 맑게 울렸다.

주문을 받던 솔이가 눈길을 들자 카페 입구로 훤칠한 남자가 들어서는 게 보였다. 제 아들을 품에 안은 채였다.

솔이는 웃음 같은 한숨을 흘렸다. 흙도 안 밟히고 키울 심산인지, 볼 때마다 시우를 품에서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

저렇게 한시도 떼어 놓기 싫은데, 시우 없이 지난 5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이모! 시우 유치원 잘 다녀왔습니다. 자기 아저씨도 안녕하세요.”

계산대로 다가서자 정혁에게 안긴 채로 시우가 인사했다. 늘 하던 대로 솔이는 호들갑스레 시우를 반겼다.


“꺅, 우리 시우 왔쪙!”

“시우 안녕. 시우는 오늘도 예의가 바르네.”

어느 날 생긴 친구 아들의 깜찍함에 준호도 하하하, 하고 목청 높여 웃었다.

정혁은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 통화를 시도하는데, 통 연결이 되지 않았다. 포기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그가 물었다.


“유다정 연락됩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솔이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아, 네…… 바쁜 일이 생겼대요. 지금 통화 안 될 거예요. 나중에 전화한댔어요.”

대충 얼버무리자 정혁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솔이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준호에게 향했다.

여름 다 끝났는데, 야자수 남방에 라탄 모자까지 쓰고 덩치도 큰 게 참 주책이다.


“아주 여기서 사나 봐?”

다소 한심하다는 눈초리에도 준호는 속 좋게 허허 웃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그래? 찔리면 되게 아플 것 같은데.”

고개를 절레 흔들며 정혁이 비아냥거렸다. 준호는 익숙한 양 보였지만, 어째선지 솔이는 묘한 기류를 느꼈다.

다정과 함께 있을 땐 모르겠더니, 다정이 없어서 그런가. 시우 아버님은 시비를 거는 게 일상인 남자처럼 보였다.

친구의 남친이 제 남친을 못살게 구는 꼴이 보기 싫어, 솔이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우리 시우, 간식 먹을 시간이네? 이모랑 간식 뭐 먹을지 골라 볼까?”

“네에!”

정혁에게 시우를 넘겨받은 솔이가 시우를 쇼케이스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시우에겐 조각 케이크와 우유가 간식으로 제공되었다.

시우는 열심히 먹었고, 정혁은 그런 시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준호와 솔이는 사랑놀음이 한창이었다.

그때 딸랑,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먹으면서도 요리조리 레이더를 세우고 있던 시우가 문으로 들어선 사람을 발견하고 제일 먼저 반응했다.


“꼬뿐이 할머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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