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유다정 씨
(12/114)
12화 유다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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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유다정 씨
2022.09.11.
광활한 로비 중심에 선 다정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거대한 빌딩 규모에 걸맞게 건물 구조도 엄청 복잡한 게, 확실히 대기업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2시까지 본사 9층. 늦지 말고 가 줘.”
건물 안내도를 유심히 바라보던 다정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9층이라고만 말했지, 도준은 동관 9층인지 서관 9층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도준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자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등 뒤에서 낯설지 않은 음성이 울렸다.
“유다정?”
반사적으로 돌아선 눈앞에 웬 말쑥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다정의 얼굴에 놀람과 얼떨떨함이 동시에 스쳤다.
“세상에! 성우 선배? 이게 얼마 만이에요?”
“5년도 넘었지? 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여전하네.”
이성우. 도준과는 동창이고 역시나 다정에겐 학과 2년 선배였다.
“선배가 여긴 어떻게……? 참, 선배 명한건설로 이직했죠? 도준 선배한테 얘긴 들었어요.”
“나도 도준이가 너랑 같이 일한다는 말은 들었어.”
“혹시 MH 백화점 건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됐네. 이번 일 프로젝트 개발팀에 배정됐거든. 전국 지점 리모델링까지 싹 다 하려면 골치 좀 아프겠어.”
설계 공고를 낸 곳이 명한유통이니, 시공은 그룹 계열사인 명한건설에서 맡는 게 당연했다.
MH 백화점은 기존 명한 백화점의 구닥다리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새롭게 개편되어 추진하는 사업이었다.
강변에 확보한 부지에 본점이 들어설 예정이고, 입찰이 확정되면 설계 변경이나 시공 등은 명한건설과 협업으로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그룹 내에서 자체로 설계와 시공이 가능하면서도 공고를 낸 이유는, 그만큼 대대적인 사업임을 대외에 홍보하고자 하는 취지가 강했다.
이번 일을 따내면 앞으로 전국에 분포한 명한 백화점의 리모델링이나 신축 설계에 컨소시엄 형식으로 한빛을 참여시킬 확률도 높았다.
반가운 기색이던 성우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오늘 도준이가 오는 줄 알았는데?”
“도준 선배가 일이 생겨서요.”
“여전히 잘되나 봐?”
“대표님이 워낙 유능하잖아요.”
다정이 너스레를 떨며 웃자 성우도 싱겁게 웃었다.
장소를 몰라 헤맸다고 말하자 성우는 동관 9층에 마련된 소강당에서 설명회가 진행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목적지가 같은 터라 두 사람은 함께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방문 목적을 말하자 목걸이형 출입증이 지급되었다.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성우가 물었다.
“근데 너 결혼했다며. 왜 안 불렀어? 섭섭하게.”
“결혼……이요?”
다정이 의아해하자 성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애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아‥… 네. 맞아요. 아이 있어요.”
다정은 너그럽게 긍정했다. 어련히 도준에게 들어 알고 있겠거니 했다.
“얼마 전에 와이프랑 백화점에 갔다가 장난감 코너에서 도준이 봤거든. 이 자식이 나 몰래 언제 결혼했나 했더니, 네 아들 선물 고르는 거라고 하더라고.”
“네.”
동문 중 다정의 사정을 아는 이는 도준이 유일했다.
바쁘게 살다 보니 동기 모임이나 동문회에 참석할 기회가 없었을 뿐, 일부러 감추려던 건 아니었다.
물론 말 많고 탈 많은 집단이라 다른 의미로 떠벌려서 좋을 게 없긴 했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성우가 덤덤하게 대화를 연결했다.
“그래서, 애는 몇 살이야?”
“다섯 살 됐어요.”
“그럼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겠네. 애 키우느라 그동안 얼굴 한번 못 비쳤구나. 하긴, 우리 와이프만 봐도 애들한테 치여서 안쓰러울 때가 많아.”
“선배 아이들도 많이 컸겠어요.”
“큰 애는 3학년 됐고, 둘째는 내년에 입학. 막내는 아직 젖먹이.”
찌푸려 웃는 그의 얼굴에 허탈함과 민망함이 뒤섞였다. 캠퍼스 CC였던 성우 내외는 속도위반으로 일찍 결혼해 벌써 아이가 셋이었다.
“언니도 잘 지내죠?”
“바가지 긁기 바쁘지 뭐. 주말에 낮잠 좀 잘라치면 여기가 하숙집이냐면서 아주 들들 볶는다. 너도 비슷하지? 남자들도 힘들어서 그래. 웬만하면 이해하고 살아 줘.”
남자들의 고달픔이 외면받는 현실을 개탄하며 성우는 탄식을 삼켰다.
다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우가 이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두는 게 맞는 건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도준이 결혼이나 남편에 대한 말은 쏙 빼고 아이 얘기만 한 모양이었다. 워낙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긴 했다.
선배가 생각하는 것과 상황이 조금 다르다고 말해 줄까도 했지만, 사담을 주고받기에 장소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에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말을 아꼈다.
“언제 남편이랑 애 데리고 모임 한번 나와. 밥이나 먹자.”
“그럴게요.”
“그럼 발표 잘해. 유다정이야 학교 때부터 워낙 잘하니까 걱정 없지만. 잘 되면 한빛하고 같이 일하겠는데? 기대할게.”
소강당 앞에 도착한 성우는 격려의 말을 남기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확인한 다정은 대기석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경쟁 업체 관계자들은 막판까지 철저한 준비로 몹시 분주해 보였다.
다정도 노트북을 펼치고 빠진 것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을 해 나갔다.
* * *
묵직하게 다물려 있던 소강당의 문이 열렸다.
앞서 들어간 업체 관계자가 만감이 교차한 얼굴로 문을 나왔고, 뒤따라 용모 단정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단을 확인한 여자가 대기석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한빛 건축 사무소 담당자분 계십니까?”
“네!”
노트북과 자료를 챙겨 일어난 다정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애써 긴장을 누르고 들어선 공간은 마치 소극장의 연극 무대를 떠올리게 했다.
정면에 대형 스크린이 있고 조도는 낮았으며, 족히 스무 명이 넘는 관계자들이 빼곡한 좌석의 전면을 관람객처럼 차지하고 있었다.
명한유통 핵심 간부들과 명한건설 담당자들이 미리 제출한 제안서를 눈으로 훑는 장면이 보였다.
끝에 착석한 성우가 눈이 마주치자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응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다수를 향해 가볍게 묵례한 다정은 곧장 빔프로젝터에 자신의 노트북을 연결했다.
옷깃에는 블루투스 마이크를 착용했고, 오른손에는 레이저포인터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방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안녕하십니까. 한빛 건축 사무소의 유다정 팀장입니다. 한빛의 사업참여 제안 시작하겠습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장내를 울리는 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
워낙 큰 사업이라 애초에 안 돼도 그만이라는 각오로 뛰어들었다. 그런 자리라면 자신의 설계를 미련 없이 맘껏 뽐내도 좋을 거였다.
노트북에 뜬 영상이 커다란 대형 스크린 위를 지나갔다. 잠시 공백을 두고 지켜보던 다정이 중앙으로 걸어 나가며 첫마디를 떼었다.
“고품격이란 무엇일까요? 값비싼 명품? 화려한 외관? 물론 그런 것들도 품격의 일환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진정한 품격은 본연의 가치가 얼마만큼 빛을 발할 수 있느냐 하는가에 달렸다는 게 저희 한빛의 생각입니다.”
말이 끝나는 지점에 3D로 구축한 건물 조감도로 화면이 바뀌었다. 이어지는 다정의 말소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한빛은 그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MH 백화점이 추구하는 고품격 가치에 적합한 디자인을 구상했다고 자부합니다. 요란하진 않지만 현대적인 외관은 도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겁니다. 그러나 결코 평범하진 않습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외관은 시시각각 변하는 강물의 흐름처럼 도심 속에서 빛을 발할 테니까요.”
순한 눈매와 인상, 서글서글한 성품, 맹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의 순진함.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 주는 비장한 눈빛과 당당한 태도가 그녀의 프로다움을 증명하고 있었다.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안전과 실용에 집중된 세부적인 설계로 이어졌다.
“격조 높은 고객층의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신속한 서비스와 대응을 위한 동선 구조를 단순하면서도 조금 더 까다롭게 설계해 봤습…….”
자신 있게 치고 나가던 목소리가 갑자기 침몰하듯 가라앉는다.
자료에 시선을 두거나 스크린을 바라보는 이들 틈에 유독 한 남자의 그림자가 도드라져 보였다. 아니, 시선을 강탈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 뚜렷한 존재감을 인지한 순간 퓨즈가 탁 끊어진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정교하게 뻗은 눈매. 그 안에서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눈동자가 흡수되듯 다정의 각막으로 빨려 들어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다정은 나간 정신을 재빨리 수습했다.
“그렇게…… 설계해 봤습니다.”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한번 인지하자 그 존재감은 더 강렬해졌다.
사냥감을 주시하는 맹수의 그것처럼 남자의 고요한 눈빛은 집요하고 또 날카롭게 다정을 파고들었다.
“……MH 백화점만의 고품격 이미지가 저희 한빛의 상상력과 만나 어떤 놀라운 가치를 창조해 낼 수 있을지 기대되는 바입니다…….”
다음에 연결할 말이 기억나지 않아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이상으로…… 한빛 건축 사무소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깊게 숙이고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다정의 시선은 까마득한 바닥 어딘가로 곤두박질쳐 있었다.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긴장으로 떨리는 손은 레이저포인터를 놓치는 실수까지 범했다.
허둥거리며 저만치로 또르르 굴러가는 레이저포인터를 따라가 주워 들고는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비웃음이 터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쯤에서 질문이 나와야 했지만, 어째선지 무거운 정적만 깔렸다. 관계자들은 누군가의 평가가 선행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침묵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다는 제스처였다.
다정이 가까스로 눈길을 보내자 권태로운 표정의 남자가 기울어진 머리를 똑바로 세웠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한빛 건축 사무소…….”
“그거 말고. 이름.”
나른함 속에 깃든 날카로운 목소리가 동굴을 울리는 것처럼 멍멍하게 귀를 관통했다. 다정은 긴장된 입술을 살짝 축이고 대답했다.
“유……다정, 팀장입니다.”
“유다정 씨는.”
이름을 불러 놓고 아무 말이 없자 숨죽이고 있던 이들의 눈이 바삐 굴러다녔다.
무거운 긴장과 침묵이 흐르는 공간. 남자의 입술이 한참 만에야 느리게 움직였다.
“몇 살이에요?”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놓고 남자는 깍지 낀 손등 위에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흥미롭단 듯이 눈을 빛내며.
그 불투명한 눈동자의 또렷한 테두리를 응시하며 다정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 * *
긴 복도를 정신없이 내딛는 다리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휘청거렸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다정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틀대는 몸을 가까스로 벽에 기댔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한 무언가가 계속해서 어딘가를 찔러 오는 기분이었다.
알고 있었던 거다. 유치원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이상했다. 어째서 달아나고 싶은 건지. 그 남자와의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 때문일까. 심지어 그는 그 고리의 존재조차 모르는데, 어째서.
숨을 고른 다정은 급히 엘리베이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도망치듯 로비까지 내려와 출입증을 반납할 때였다.
“유다정 씨!”
별안간 남자의 음성이 울렸다. 로비를 메아리친 목소리에 다정의 어깨가 흠칫 들썩였다.
휘둥그레져 돌아보자 처음 보는 남자가 부르듯 손짓하며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유다정 씨! 한빛 건축 사무소의…… 유다정 씨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다정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남자는 잠깐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그러기도 잠시 남자가 손을 뻗어 막 교환하려던 출입증과 신분증 사이를 가로막았다.
“유다정 씨. 다시 올라가시죠. 차정혁 전무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차정혁…….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차정혁이란 사람도, 명한유통 전무이사라는 사람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았다. 그것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차정혁. 차정혁이었다.
지금 막 알게 된 아이 아빠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