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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하룻밤의 기억 (11/114)


11화 하룻밤의 기억
2022.09.08.



“어? 엄마다! 엄마아―!”

아이의 작은 발이 제자리를 폴짝폴짝 뛰었다.


“엄마아!”

“시우야.”

헐레벌떡 달려온 다정은 무릎을 굽히고 시우를 힘껏 보듬어 안았다.


“엄마가 늦어서 미안해. 우리 시우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하나도 안 기다렸어요. 어…… 이모는?”

“이모가 바쁘대서 엄마가 왔죠. 이모 아니라서 섭섭해?”

다정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숨을 꿀떡 삼킨 시우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어! 아니! 시우는 엄마가 세상에서 쩰 조아!”

여우 같은 아들의 애교에 절로 웃음이 났다. 다정은 시우의 뺨에 맹렬한 기세로 뽀뽀를 퍼부었다.


“엄마도 시우가 세상에서 쩰 조아!”

아이 말투를 따라 과장되게 떠들어 대는 여자를 보며 현아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마침 잘되었다. 정혁에게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안 그래도 유치원 규모를 자랑하려던 계획이 물 건너가 아쉽던 차였다.

현아가 도도하게 팔짱을 꼈다.


“얘가 그쪽 애였어요?”

쌀쌀맞은 첫마디에도 다정은 상냥하게 웃었다.


“원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우리 시우 맡겨 놓고 인사가 늦었어요. 참, 이사장님도 안녕하시죠?”

시우가 한송 사립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현아의 모친이자 재단 이사장인 선영의 도움이 컸다.

고마운 마음에 안부를 챙기지만, 현아는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어머니! 하원 시간 잘 맞춰 주셔야죠. 애 혼자 있다가 잃어버리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유치원에 타격이 얼마나 큰 줄 알아요? 늦을 거면 전화를 하든가요!”

어린 아가씨의 훈계에도 다정은 방싯방싯 웃기만 했다. 엄마가 되어 아이 교육과 관련해 몸을 바짝 낮추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죄송해요, 원장님.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차가 막힌, 바람에…….”

명랑하기만 하던 다정의 목소리가 별안간 흐트러졌다. 흠칫 들썩인 눈동자 역시 작게 흔들렸다.

오현아 원장과 나란히 선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귀신이라도 본 양 다정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을 때 다정은 저도 모르게 시우를 슬그머니 제 뒤로 끌어다 붙였다.

마치 혼자만 간직해야 할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5년 전 그때처럼.

햇살이 무르익은 초여름의 오후였다.


 


“……죄, 죄송해요. 원장님. 다음부턴 미리 연락 드릴게요.”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을까, 불안했다.

황급히 시선을 떨군 다정이 시우의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시우야. 인사해야지.”

“원장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시우가 꾸뻑 배꼽 인사를 했다. 다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우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맞쥔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어…… 엄마.”

빠른 보폭에 시우가 휘청거린다. 다정은 걸음을 늦추는 대신 버거워하는 시우를 번쩍 안아 들고 속도를 유지했다.

주차장을 향해 내달리는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였다.

아이를 안고 달아나듯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에 정혁의 눈길이 오래도록 머물자 현아가 뾰로통하게 입을 내민다.

비록 애 딸린 여자라도 그의 눈길이 다른 여자에게 향하는 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오빠, 뭘 그렇게 봐? 아는 여자야?”

새침하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도 정혁의 무심한 눈길은 먼 방향만 주시할 뿐이었다.

* * *

시우가 잠든 걸 보고 산책 겸 집을 나선 다정은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솔이의 카페로 향했다.

「Caffe, Sol.」

사람들은 모를 거다. 의미심장해 보이는 저 단순한 상호가 순전히 자기애 충만함에서 탄생했다는 걸.

딸랑.

도어벨이 울리자 솔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이 시간에 웬일이야? 시우는?”

“재워 놓고 잠깐 바람 쐬러. 근데 밤에도 여전하네. 금방 부자 되겠어.”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카페 안에 머무는 손님이 적지 않았다. 주 손님은 직장인이지만, 오피스텔 건물이다 보니 밤에도 손님이 꾸준했다.

다정은 새삼 열심히 산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5년 전엔 고작 다섯 개에 지나지 않던 테이블이 열다섯 개로 늘었으니,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 부를 만했다.

친구 찬스로 공짜 커피를 받아든 다정은 통창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밤의 정취를 감상했다.

그러던 중 다정의 눈에 수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건장한 남자 손님을 대하는 솔이의 태도가 어쩐 일로 사근사근했다.

평소 손님에게도 왁왁대며 걸쭉하게 말하는 솔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어딘가 확실히 달랐다.

다정은 자리로 돌아가는 남자를 슬쩍 곁눈질했다. 남자는 또 다른 남자 일행과 함께였는데, 둘 다 우락부락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솔이는 남자들 테이블을 틈틈이 힐끔거렸다. 뭔가 있지 싶어 슬그머니 다가간 다정이 주문대에 팔꿈치를 걸쳤다.


“어후, 되게 건강해 보여.”

넌지시 운을 떼자 솔이의 얼굴에 엉큼한 웃음이 번진다.


“건강하기만? 얼굴도 잘생겼지.”

고개를 갸웃한 다정은 다시 한번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아무래도 잘생겼다는 말은 동의하기 망설여졌다.

남자는 주걱턱에 콧대가 낮았다. 입술은 두툼하고 송충이 같은 눈썹은 시커먼 데다가, 부리부리한 눈은 느끼할 만큼 쌍꺼풀이 짙었다.

다정은 고개를 잘잘 저었다. 오래 지켜봤지만, 얼빠를 자처하는 솔이의 변덕스러운 취향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근데, 저 정도면 밸런스 파괴 아니니?”

밤톨처럼 작은 머리에 비해 우락부락한 몸을 보며 다정이 난감한 표정으로 이견을 제시했다.

맘껏 짖으라며 솔이는 입만 비죽 내밀었다. 다정이 채근했다.


“대체 누군데 그래?”

“우리 건물 피트니스 센터 있잖아. 거기 트레이너.”

“어쩐지. 몸들이 아주…….”

다정이 작게 감탄하는 사이 솔이의 말이 이어졌다.


“나 어제부터 운동해.”

“운동? 얘, 너 영업 당한 거 아니니?”

“영업 좀 당하면 어때? 운동해서 남 주니? 운동하면서 매력 어필 좀 하면 지가 안 넘어오고 배겨?”

다정은 얕은 한숨을 뱉었다.


“친구야. 자신감이 지나친 거 아닐까?”

“왜? 나 안 이뻐?”

솔이가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며 물었다.

솔직히 카페에서 썩긴 아까울 만큼 봐 줄 만했다. 키도 크고 늘씬한 솔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시원시원한 미인형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일수록 낯간지러운 칭찬엔 인색한 법.

대답을 망설이자 솔이가 눈을 흘겼다.


“대답 잘해. 시우 안 봐 주는 수가 있다.”

“치사하게 애 갖고 협박하냐?”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뭔들 못할까.”

투덕거리기도 잠시, 시우가 언급되자 다정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있잖아…… 나 그 남자 만났어.”

“그 남자? 그 남자가 누군데? 잘생겼어?”

“응. 잘생겼어.”

논점을 벗어난 질문에 성실히 답했지만, 왜인지 다음 말은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입술만 잘강거리고 있자 독촉이 날아든다.


“잘생겼다고? 누구누구?”

다정은 잘근 깨물던 입술을 놓고 겨우 말을 뱉었다.


“시우…… 아빠.”

“……!”

쩍 벌어진 솔이의 입에선 잠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였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표정에서 전해지는 중압적인 분위기와 깊은 눈동자는 한순간도 잊힌 적이 없었다.

틀림없다. 제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였다.

장승처럼 굳어 있던 솔이의 입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 어디서?”

“시우 유치원.”

“어머! 그 남자 애도 그 유치원에 다니는 거 아니니?”

“글쎄…… 입학식 때 못 봤던 거 같은데.”

“입학식 때는 엄마만 왔겠지.”

“그런가?”

“앞으로 유치원에서 계속 마주치는 거 아니야?”

다정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그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뭐래?”

“아무 말도. 못 알아본 것 같기도 하고…….”

다정은 유치원에서 마주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심드렁한 얼굴에선 놀람이나 반가움, 내지는 그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었다.

솔이가 맞장구를 쳤다.


“얘! 5년 전에 딱 하룻밤이야. 어떻게 알아? 당연히 못 알아보지.”

그러고도 혹시나 해서 솔이는 한걸음 물러나 다정의 모습을 꼼꼼히 뜯어 보았다. 그리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넌 모르겠지만, 너 옛날에 되게 촌스러웠어. 지금은 머리까지 싹둑 잘랐는데 어떻게 알아? 절대 못 알아봤다에 내 손모가지랑 전 재산 건다.”

다정은 단발머리 아래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분명 5년 전 제 모습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거였다.

하지만 달라진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도 5년 전과는 여러모로 사뭇 달랐다. 그런데도.


“난 단번에 알아봤단 말이야.”

“그야 그 남자가 어디 가서 한 번 보고 잊힐 만한 얼굴이 아니라며. 시우 얼굴만 봐도 짐작이 된다. 그리고 넌 그 남자랑 똑 닮은 아들을 매일 보는데 잊을 리가 없지. 안 그래?”

“그런가……?”

“솔직히 네 얼굴이 눈깔에 각인될 만큼 소름 끼치게 특출난 건 아니니까, 안심해.”

다정은 호언장담하는 친구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솔이가 손모가지와 전 재산을 잃는 일은 제발 일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 * *



“희주 씨, 좋은 아침.”

다정이 출근했을 때, 예상대로 바지런한 희주가 먼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정신없이 도면에 파묻혀 있던 희주의 고개가 반짝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채희주. 막 대학을 졸업하고 한빛에 입사한 지 고작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신참내기였다.

아직 신입이고 관련 자격증 공부만도 벅찰 텐데, 희주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그런 열정이 다정의 눈엔 마냥 예쁘고 기특했다.

다정은 아침부터 몹시 분주한 희주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티셔츠와 청바지, 대충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며 화장기 없는 민낯이 참 예쁜 나이였다.


“팀장님. 저 L파크 현장에 좀 다녀올게요.”

출근한 지가 언제라고 희주가 도면을 챙겨 일어났다.


“수고해, 희주 씨.”

바삐 돌아서는 희주를 보는 다정의 얼굴이 감회로 젖어 들었다.

뒤꿈치가 다 닳아빠진 희주의 낡은 운동화를 보자 제 예전 저맘때쯤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장 일을 밥 먹듯이 다니는 직업이다 보니 한창 예쁠 나이에 높은 구두 한번 신어 본 적이 없더랬다.

희주가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건 가난해서도, 알뜰해서도 아니었다.

너무 바빠서 운동화가 해졌다는 자각도 없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엔 상주 직원 하나 없이 허술해 보여도 한빛 건축 사무소의 현장 규모는 제법이었다.

여러 굵직한 사업을 도맡았고, 건축주와 클라이언트는 완성도 높은 결과에 만족했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희주의 책상으로 향했다. 의자를 빼고 아래를 보자 검정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운동화는 다 해졌는데, 구두는 몇 번 신지 않아 거의 새것이었다. 딱하면서도 기특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구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의자를 밀어 넣을 때 도준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부드럽게 웃어 보인 도준이 잠깐 떨어트렸던 휴대폰을 다시 귀에 붙였다.


“오후에 일정이 있다니까요. 현장 감독들한테 설명 들으세요.”

약간 퉁명스럽게 통화를 이어 가던 도준의 입에서 체념 어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알았어요. 네.”

내키지 않는 태도로 통화를 마친 그가 곧장 다정을 불렀다.


“MH 백화점 건 말인데, 이따 대신 가 줄 수 있을까.”

“그건 선배가 전담하기로 했잖아요.”

“내가 가야 하는데, 기숙사 공사 때문에 총명대 호출.”

도준이 지겨운 얼굴로 눈가를 찌푸렸다. 총명대 호출이란, 총명대학 총장인 도준의 부친이 부른다는 뜻이었다.

백화점 신축 같은 큰 설계 입찰은 대표가 직접 참여하는 게 맞지만, 대부분 설계와 도면 작업은 다정이 했기에 큰 무리는 없을 거였다.


“2시까지 본사 9층. 늦지 말고 가 줘.”

“알겠어요, 선배. 걱정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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