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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반가웠어요 (13/114)


13화 반가웠어요
2022.09.15.



 
자신을 전무 비서실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다정에게 길을 안내하듯 앞장서 걸었다.


“차정혁 전무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거절의 여지는 없었다. 다정은 개인이 아니라, 한빛 건축 사무소를 대표해서 이곳에 있었다.

임원 전용 고속 엘리베이터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동관 23층에 멈춰 섰다. 이 빌딩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 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돌자 길게 뻗은 복도가 이어졌다.

회백색의 대리석 바닥은 빙판처럼 윤이 났고, 통창 중간중간 놓인 커다란 화분의 잎사귀는 햇살을 튕겨내며 싱그럽게 반짝거렸다.

굳게 다물린 문을 마주하고 선 민 실장이 조심스레 노크하고 연달아 문을 열었다. 다정이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었다.


“들어가 보십시오.”

“아, 네…….”

떠밀리듯 들어선 낯선 공간은 지나치리만치 고요했다. 그리고 그는 소름 끼치게 차분했다.

책상 앞에 늘어져 있는 남자의 눈은 생각에 잠긴 듯 지그시 감겨 있었다.

살금살금 발끝을 움직인 다정은 응접용 소파 근처에 다다라 허리를 꾸뻑 숙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는 말을 덧붙일까 고민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소곤대는 것처럼 작게 울리는 목소리에 남자의 눈꺼풀이 올라섰다. 고개를 똑바로 세운 그는 느리게 목을 꺾으며 다정을 위아래로 훑었다.

한동안 대놓고 관찰을 하더니, 무기질처럼 다물렸던 입술이 달싹였다.


“유다정 씨.”

“……네.”

벌서는 아이처럼 오도카니 선 채 다정은 응접용 소파의 다리 부분만 뚫어지게 주시했다.


“유다정.”

“네.”

피식, 일자로 곧게 맞물려 있던 그의 입가에 별안간 실소가 스며들었다. 냉담하기만 하던 눈에도 장난스러운 감상이 번졌다.


“유다정이었구나. 이름이.”

유다정, 유다정, 혀끝에 새기듯이 정혁은 그 이름을 반복해서 작게 중얼거렸다.

숙박부에 새겨진 깜찍한 글씨체의 잔상이 다시금 어른거렸다.

「YOO」라고 갈겨 놨던 토막 난 이름의 온전한 실체. 눈앞에 있는 이 여자의 이름. 유다정이었다.

마구잡이로 엉킨 실타래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를 발견한 것처럼 약간의 쾌감과 홀가분한 기분이 뒤섞였다.

유치원에서 여자와 마주친 순간, 오랫동안 잊고 지낸 수수께끼 같던 궁금증이 다시 부유했다.

정혁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날 자신이 잃어버린 게 뭐였는지.

그저 막연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허망한 기분에 내내 사로잡혀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느리게 턱을 괸 그가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유다정 씨 몇 살이냐니까.”

“전무님, 전…….”

“말 안 해 줬잖아요.”

소강당 안에서 당황스럽게 던져졌던 질문에는 끝내 답을 하지 않았다.

중역들이 전부 모인 자리라 토 달지 않고 보내 주더니, 결국 이렇게나 집요하게 제 앞으로 불러들였다.

다정은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며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전무님. 적절하지 않은 질문은…….”

“몇 살이냐고.”

온화하면서도 왜인지 사납다. 예전 그때처럼.

낯선 남자에게 자꾸만 눈길이 향했을 그때처럼 알 수 없는 긴장에 다정은 목이 말라붙었다.


“그게 업무와 관련된 질문인지 의아합니다만.”

“이게 어딜 봐서 업무 얘기로 들리지?”

“사적인 질문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정혁의 눈썹이 살짝 뒤틀렸다. 5년 만에 마주쳤는데,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신경을 긁는다.

유치원에서 절 보고 죄지은 사람처럼 도망쳤을 때도. 또 제 질문을 무시하고 소강당을 나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허리를 세운 그가 삐딱하게 등을 기댔다. 희미하게 머금은 장난스러운 웃음기는 어느새 지워지고 없었다.


“5년 동안 궁금해서 미치게 하더니, 끝까지 돌게 하네.”

뒤이어 혼잣말 같은 욕설이 따라왔다.

돌변한 분위기에 다정의 긴장도 고조되었다. 점잖은 차림을 하고 있어도 그가 간직한 무례한 본질은 여전했다.

한동안 무겁게 응시하던 정혁의 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한풀 기세가 꺾인다.

오다가다 스친 여자였다. 오다가다 다시 마주쳤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울 일인지 스스로가 의아했다.

생각해 보니 바짝 날을 세운 제 꼴이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뭐 됐어요. 내가 따로 알아보면 되지.”

“부르신 용건이나 말씀해 주세요.”

다정은 가까스로 불쾌한 심경을 억누르고 말했다.


“아니, 그냥 궁금하더라고. 애인하자고 꼬드겨 놓고 다음 날 감쪽같이 내뺀 여자가 이름은 뭔지, 또 몇 살인지, 또…… 왜 그랬는지.”

나른하게 올라선 눈빛이 다정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왜 그랬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왜 도망쳤냐고.”

다정은 입안 살을 지그시 씹었다.

도망. 겁이 나서 도망친 게 맞았다. 설마 그에게도 그렇게 비추어졌을 줄은 몰랐지만.


“말했지. 손해 보고 못 산다고.”

긴 손가락이 어그러진 눈썹을 결대로 쓸었다. 그랬음에도 불편하게 일그러진 눈가는 펴지지 않았다.


“궁금해서 한동안 잠을 못 잤어 내가. 이 여자가 무슨 목적이었을까, 하고.”

“전무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전 한빛 건축 사무소를 대표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업무상 필요한 질문만…….”

피식거리는 웃음이 다정의 말을 차고 들었다. 그럴듯한 단서라도 잡은 양 그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상한데?”

“……네?”

“그렇잖아. 내가 유다정 씨하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키스를 하재. 아니면 잠을 자재.”

거침없는 언사에 다정의 귓가로 뜨거운 열기가 모여들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시치미를 뗄 일인가 해서.”

“…….”

“정말 뭐 감춰 놓은 거라도 있어요?”

다정의 목으로 숨이 꿀떡 넘어갔다. 용수철이라도 달린 양 심장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런 거 없습니다.”

“수상하게.”

쯧, 못마땅하게 혀를 차더니 이내 힘이 풀린 눈이 곱게 웃었다.


“쫄지 마요. 그냥 궁금해서. 내가 어릴 때부터 궁금한 건 잘 못 참아. 그래서 공부를 더럽게 잘했어. 파고파고 계속 파면 결국 답이 나오더라고.”

자신의 집요함을 시험해 보고 싶다면 계속 입을 다물어도 좋다는 압박이 다정의 목을 졸랐다.

어쩌면 발뺌을 하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정은 그가 이 이상 자신을 파헤치길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순순히 인정하고 원하는 답을 주는 편이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거다.

다정은 빠르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곧장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했다. 지극히 거래처의 중요 관계자를 대하는 자세였다.


“그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급한 용무가 있어서…….”

“그래요, 그랬겠지.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려면 급했겠지.”

이번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무료하게 뱉어낸 말은 그냥 비아냥 수준이었다.

다정은 눈앞의 남자가 다 큰 성인인지, 아니면 종잡을 수 없는 사춘기 남자애인지 약간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런 남자를 상대하고 있으려니, 다정도 서서히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걸러낼 틈도 없이 따지고픈 말이 튀어 나갔다.


“오래전 일입니다. 그 일이 이렇게까지 하실 만큼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내가 완전 손해 봤잖아.”

“전무님, 대체!”

“아니, 결혼했으면 물어내라고 할 수가 없잖아. 6일이나 남았는데.”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근사한 얼굴과 정갈한 표정을 하고서 그는 민망한 주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다.


“결혼까지 했는데 계약 위반으로 고소하기도 뭐하고. 그죠, 유다정 씨?”

“전무님, 불쾌합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저 남편 있어요. 다신 이런 부적절한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이런 일이 또 있다면 정식으로 조치하겠습니다.”

순한 눈에 힘이 잔뜩 실렸다. 그러면서도 정작 노려보지 못하는 눈을 마주하며 정혁은 실소를 흘렸다.


“여전하네.”

여전히 강아지풀 같은 여자였다.

간지럽긴. 자꾸 장난 걸고 싶게.


“그래요, 그러죠. 그만 가 봐요.”

어느새 정갈하게 표정을 되돌린 그의 입가에 부드럽고 그윽한 미소가 물렸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유다정 씨.”

 

* * *

느리게 차를 몰아 진입로로 접어들자 캠퍼스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올망졸망 모여 재잘거리는 신입생들의 웃음소리에서 명랑한 활기가 느껴진다.

입가에 살풋 미소를 머금은 도준은 반쯤 내려간 차창을 완전히 내렸다.

초여름의 싱그러움과 어우러진 풋풋한 내음이 코끝으로 물씬 밀려들었다.

주차를 마친 도준은 차에서 내려 강박처럼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성큼 걸음을 떼다가 문득 손목시계로 눈길이 향한다.

3시가 훌쩍 넘은 시각. 다정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설명회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일거리를 떠넘긴 것 같아 못내 미안한 마음이 스쳤다. 아버지의 뜬금없는 호출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도준이 하고 있을 일이었다.

대외적인 일을 하느라 그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지만, 다정이 관여하는 영역이 만만치 않았다.

잘하고 있겠지. 걱정하지 않았다. 결과야 어떻든 다정이라면 잘 해낼 거였다.

총장실에 다다라 노크하고 문을 밀어 연 도준의 발이 주춤했다. 앞서 손님들이 있던 까닭이었다.


“아…… 조금 있다가 다시 올까요?”

당황스러워 반사적으로 묻긴 했지만, 형숙이 이곳에 있는 거로 보아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노형숙. 도준의 모친이었다.

그녀는 총명 미술대학 교수와 총명 아트 갤러리 관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도준은 내색하지 않고 한숨을 삼켰다.

아버지는 상석을 지켰고, 그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온화하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맞은편엔 형숙과 비슷한 느낌의 세련된 중년 여자와 앳된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무슨 상황인지 대략 감이 왔다.


“어머나, 마침 우리 도준이가 왔네요.”

형숙이 반색하며 아들을 반겼다.

도준이 멀뚱히 서 있기만 하자 형숙이 다가와 친근하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속삭여 나무랐다.


“얘, 좀 제대로 입고 오지, 꼴이 이게 뭐니?”

청바지와 티셔츠, 캐주얼 셔츠를 대충 걸치고 나타난 아들을 보며 형숙은 못마땅하게 한숨을 쉬었다.

별수 없다. 사전에 옷차림에 신경 쓰라는 언질을 주지 않았으니. 미리 어떤 자리인지 말했더라면 얼굴도 안 비칠 게 뻔했으니까.

잠시 후.

도준은 카페에 앉아 낯선 여자와 어색하게 차를 마셨다.

총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직감했었다. 이젠 모르는 여자와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마시는 것도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부모들의 공모로 선 자리에 불려 나온 여자의 이름은 이수경. 20대 중후반이고 한강 병원 이사장의 막내딸이었다.

이 자리는 한강 병원 신경외과 교수인 도준의 형 도진의 소개로 주선되었다고 한다.

차를 다 마셔 갈 때쯤 도준이 입을 열었다.


“제 차림이 좀 그렇죠. 죄송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좀 그렇습니다.”

나는 먼지와 땀내 나는 곳에서 일하는 후줄근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했다. 그런데 어째 수경의 반응이 예상 밖이다.


“뭐가 어때서요? 땀 흘려 일하는 남자 멋있다고 생각해요. 책상 앞에서 펜이나 굴리는 남자들보다 섹시하고요.”

당돌한 반응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도준은 뿔테 안경 밑으로 눈가를 한번 쓸었다.

그 어수룩한 행동을 수경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수경이라고 이 자리가 흔쾌해서 나온 건 아니었다.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했고, 대충 시간만 때울 요량이었다.

보나 마나 샌님 같은 남자가 기어 나올 게 뻔했다. 그런데 막상 등장한 남자는 예상을 뒤집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사윗감 될 인물의 됨됨이 보다, 교육자 집안과 사돈을 맺는 데 더 흥미가 있는 눈치지만, 수경은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큰 키와 듬직한 체격, 상냥한 말씨와 부드럽고 선한 인상에서 좋은 성품을 지닌 남자라는 걸 간파할 수 있었다.

멍청하고 따분한 공붓벌레들과 차원이 다를 거였다. 펜대나 굴리며 고상한 척 으스대는 남자들과는 땀 냄새부터 다를 게 분명했다.


“권도준 씨 마음에 들어요. 저랑 결혼 전제로 교제해 보는 거 어떠세요?”

보기 드물게 당차고 자신감 넘치는 여자를 두고 도준은 대답을 고민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수경 씨. 전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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