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36 – 시야를 넓히면 (6)
벌써 시트콤 촬영을 한 지도 2주째가 되었다.
TV 시트콤에는 단역으로 출연했고.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2주일 정도 촬영하면 마무리를 할 수 있는 배역이었지.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형, 우리 그럼 내일이 시트콤 마지막 촬영인 거지?”
“어, 그리고 모레는 바로 제프리 감독 영화 촬영에 가야 해.”
“오케이.”
나는 다시 대본을 든 채로 의자에 몸을 기댔고.
김 실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응?”
“너 안 피곤해?”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어, 괜찮아.”
“제프리 감독 작품만 찍을 때는 일주일에 세 번이나 두 번만 촬영가고 쉬었는데, 요즘은 일주일 내내 일하잖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할리우드가 회사처럼 근무 시간도 잘 지켜지고, 주말에도 꼬박꼬박 쉬니까. 저녁에 쉬고 주말에 쉬잖아.”
내 걱정이 가득한 김 실장의 표정을 보며.
나는 팔을 들어 몸이 가뿐하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걱정 마. 나 완전 몸 튼튼한 것 좀 봐. 하하.”
“그렇긴 한데… 그래도 밤이랑 주말에도 계속 연습뿐이잖아.”
여전히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 실장의 모습에.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답했다.
“형, 억지로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힘들 수도 있는데. 이건 내가 하겠다고 졸라서 하는 거잖아. 나 진짜 피곤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행복해.”
“정말이지?”
“응, 심지어 시트콤 촬영하고 오면, 힘든 게 아니라 힘을 얻어오는 듯한 느낌이야. 사람들 기운도 좋고, 게다가 거기서 배울 점이 진짜 많아서 좋아.”
그제야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다고 하니까 믿을게.”
“어, 정말이지.”
그는 신호가 걸린 틈을 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신 힘들면, 무조건 꼭 말해야 해.”
“당연하지!”
“그리고 이번에 시트콤 끝나면, 휴식 좀 취하자. 당분간 인터뷰도 있을 거고, 또 한창 바쁠 거야.”
나는 앞에 초록불로 바뀐 신호를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 제스처에 고개를 돌려 운전에 집중한 김 실장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늘 내 걱정에, 내 생각뿐인 김 실장.
그에게 고마운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현장.
“안녕하십니까.”
밝게 인사를 돌리며 현장을 걸어 다녔고.
불과 2주, 그러니까 일주일에 고작 두 번씩밖에.
총 네 번밖에 오지 않았지만 이미 이들과 정이 많이 든 상태였다.
“희성 씨, 왔어요?”
“네, 필릭스 감독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러게. 근데 아쉬워서 어떻게 해. 벌써 내일이 마지막 촬영이잖아.”
나는 그의 말에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맞아요. 너무 아쉬워요. 현장 오는 게 정말 좋았는데….”
그때.
“진!”
브라이언이 내게로 다가오며 소리쳤고.
필릭스 감독과 나는 동시에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오오, 브라이언. 왔어요?”
“어떻게 항상 나보다 일찍 오는 거죠?”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일찍 와서 현장 구경하려고요.”
브라이언은 혀를 내두르며 손뼉을 부딪쳤다.
“진짜 대단해. 매번 촬영 때마다 다른 배우들 연기하는 거 다 보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의 말에 필릭스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나도 감독 생활하면서, 이런 배우는 처음 봤다니까. 한국 배우가 다 이런 건가?”
필릭스 감독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이 부지런하고, 다들 대단한 편이죠? 하하.”
내 너스레에도 그는 진지하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정말 그런 것 같아. 생각해보면, 나 예전에 스태프로 함께 일했던 한국인도 엄청나게 일을 잘했거든.”
내가 한국의 모든 배우를 대표해서 온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어깨에 ‘한국 배우’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는 있었다.
그들이 나를 대표로 지정한 것이 아니어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모든 이들은 나, 진희성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 테니까.
그저 한국 배우는 저렇구나, 한국인들은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라며 평가를 내릴 것이다.
미국에 도착함과 동시에.
행동과 말투를 하나하나 신경 쓰며 조심스레 행동했고.
그 덕에 나와 마주쳤던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한국인을 좋게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감독님이 좋은 분이라, 곁에 좋은 사람들만 있나 보네요.”
그는 내 말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답했다.
“다음에 또 같이 작품하고 싶네, 희성 씨랑.”
“어휴, 영광입니다.”
“우리 그럼 오늘 촬영하러 가볼까?”
“네!”
그렇게 촬영이 시작됐고.
내 촬영은 오후였기에, 여러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보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들다가도,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엄청난 연기를 보이는 배우들.
나 역시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연기하지만.
그들의 내공은 가히 충격적일 정도였다.
함께 떠들고 웃다가도, 그들의 연기를 넋 놓고 보고 난 후에는 꼭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래, 여기가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였지.’
나는 스태프들 옆에서 브라이언의 연기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컷, 오케이!”
필릭스 감독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이 신의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고생했어요. 잠깐 쉬었다가 다음 신 바로 들어갑시다.”
“네.”
다음 신은 드디어 내 차례였고.
나는 분장을 하기 위해, 한쪽에 마련된 분장 부스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도 허술하게 만들어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이 쉬는 트레일러.
그보다 더 큰 트레일러를 개조해, 분장실을 만들어둔 형태였다.
마치 숍을 그대로 옮겨둔 것만 같은 느낌이었지.
이곳에는 많은 배우들이 아침부터 번갈아가며, 상황에 맞는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고 있었다.
나 또한 다음 신을 촬영하기 위해 분장실로 발길을 옮겼다.
잠시 쉬는 시간인 터라, 분장실에는 앞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배우.
그리고 나와 함께 다음 신을 촬영할 배우들이 모여 나란히 준비하고 있었고.
“희성 씨, 왔어요?”
그들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네, 다음 신이 우리 다 같이 찍는 거죠?”
나는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배우들을 향해 물었고.
그들은 미소와 끄덕임으로 내게 답했다.
이 시트콤의 대부분 사람들이 함께 등장하는 단체 신.
그 장면에서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얼굴이 노랗게 뜬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야 했다.
시트콤이다 보니, 모든 장면에 웃음 포인트가 하나씩 존재했지.
“희성 씨, 이쪽으로 앉으세요.”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착석했고.
그는 내 다음 촬영 대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장면 헤어는 지난 신과 같은 머리로 할게요.”
“네.”
“그리고 메이크업은… 어?”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본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표정에 곧장 입을 열었다.
“좀 노랗게 보이도록 얼굴에 칠을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자 스태프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읊조렸다.
“옐로 스킨….”
그때.
옆에 있던 배우를 포함한 스태프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고.
순간 자신의 말에 놀란 그가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오오… 너무 죄송해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바라보며 내뱉은 말.
‘옐로 스킨.’
단순 직역으로는 그저 노란 피부였지만.
나쁘게 해석하자면, 동양인들의 피부색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비하하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동양인 비하의 단어였다.
하지만 내가 이번에 분장해야 하는 피부가 공교롭게도 노란 피부였고.
대본에도, 그리고 연출에도 그런 비하적인 부분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얼굴이 노랗게 질리는 황달 같은 느낌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니까.
메이크업 스태프 역시 그것을 말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비하 단어를 내뱉었다는 사실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내게 연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죄송합니다. 전혀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오히려 주변에 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그와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나는 이런 시선이 더 나쁘게 느껴졌다.
‘옐로’라는 그 비하 단어가 있기에.
지금 이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저 노랗다는 뜻으로 쓰였다면, 이 스태프가 말을 내뱉고도 놀라거나 사과할 일은 없었겠지.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그에게 발끈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제프리 감독 작품에 함께 출연하는 리암 배우.
그는 실제로 내게 동양인 비하 단어를 사용하고, 나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이 스태프는 그럴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손을 허공에 가로저으며 내게 연신 사과를 내뱉었고.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그에게 답했다.
“악의적인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아니까 괜찮아요. 당신도 내게 그럴 의도로 말한 거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런 단어 자체가 동양인 비하로 쓰이는 것도 우습잖아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히려 저한테 옐로라는 단어가 붙는 말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네요. 그저 노란색이라는 단어일 뿐인데… 같은 사람을 피부색으로 가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요.”
내 말에 끝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브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짝짝-.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
나는 그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빼꼼 내밀어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한 배우가 나를 향해 손뼉을 부딪치고 있었다.
“이야, 너무 맞는 말만 해서, 자연스레 박수가 나왔어요.”
그를 따라 주변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저게 맞는 거지.”
“응, 대체 인종 차별이 왜 있는 건지, 진짜 미개하다니까.”
“저 배우, 인식이 장난 아닌데?”
그렇게 나는 그들의 말에 씩 멋쩍게 웃으며, 메이크업을 끝까지 받았다.
***
다음 날.
시트콤 마지막 촬영을 이어갔고.
“컷, 오케이!”
해가 저물기도 전에 촬영은 끝이 났다.
오케이 사인과 함께 다가오는 배우들.
브라이언의 손에는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진, 고생했어요!”
나는 그 꽃다발을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떡 벌렸다.
“우와, 이게 뭐예요?”
고작 2주 출연한 나에게 고생했다는 꽃다발이라니.
그의 정성과 나를 아껴주는 마음에 감동했고.
다른 배우들 역시 손뼉을 부딪치며 내게 말했다.
“희성 씨, 너무 고생했어요.”
“희성 씨와 함께 연기해서 정말 즐거웠어요.”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하는 그들에게, 나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동안 다들 잘 챙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챙겨주긴요. 워낙 연기를 잘하니까.”
나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깊게 접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여러분의 연기를 보며 많이 배우고 느꼈어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다음에 또 같이 연기할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현장은 박수로 가득 채워졌고.
“희성 씨는 이제 바로 한국 가는 겁니까?”
내 옆에 있던 배우의 말에 브라이언이 나 대신 답을 내뱉었다.
“아니, 진은 지금 제프리 감독님 작품을 찍고 있어서 아직 한국에 가려면 멀었어요.”
“오오, 그럼 우리 또 얼굴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요. 언제든 연락주시면, 만날 수 있죠.”
“우리 자주 연락하고 지내요.”
브라이언은 자신의 휴대 전화를 들고 흔들며 그들에게 말했다.
“요즘 SNS에 메시지 기능이 좋아서, 저는 진이랑 자주 연락해요. 하하.”
“정말?”
“그럼 나도 희성 씨랑 SNS 친구 할래. 아이디가 뭐예요?”
“오오, 나도, 나도!”
그들은 각자 휴대 전화를 꺼내 SNS를 열었고.
우리는 서로의 계정을 확인하며 팔로우를 맺었다.
그렇게 나는 시트콤 단역 배우로서의 성공적인 마무리와 동시에.
SNS 팔로우에 할리우드 배우들이 차례로 쌓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