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208)화 (208/303)

208화 #36 – 시야를 넓히면 (5)

“형, 어떻게 됐어?”

전화를 끊고 내게 터벅터벅 걸어오는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하아… 우선 한 본부장님이 다시 전화 주신대.”

그의 표정과 말투만으로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회사에서 시트콤에 출연하는 걸 반대한다는 것을.

김 실장의 한숨 섞인 말투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지.

“고민하고 나서 연락 주시려는 건가?”

“응, 그것도 있고. 지금 옆에 누가 와 있는 것 같더라고. 보내고 다시 연락하실 것 같아.”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반응은 많이 안 좋아?”

그는 내 말에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역시나.

할리우드에서 나와 함께하는 김 실장도 시트콤 출연을 반대했는데.

한국에서 업무를 보는 한 본부장이 단번에 허락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을 굽힐 수는 없었다.

한 본부장과 회사를 설득해야만 한다.

반드시 출연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한 시간쯤 시간이 흐르고.

지이잉.

김 실장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희성아, 회사에서 연락 왔다.”

“응, 통화하고 와.”

평소 회사 전화는 내가 들리지 않게, 방에서 통화한 뒤 알려주던 그였기에.

나는 당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 답했고.

“여보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다시 다가왔다.

“희성아, 이거 영상 통화인데… 한 본부장님이 같이 받으라고 하시네?”

“그래?”

LA는 늦은 밤이었기에, 편히 쉬던 터라 눌린 머리를 손으로 털어내며 화면 앞에 모습을 비췄다.

“본부장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내 인사에 그가 허허 웃으며 답했다.

-응, 희성이도 잘 지내고 있지?

“네, 그렇습니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한 본부장은 본부장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 인사는 이쯤 하고. 바로 이야기 좀 해보자고.

“네.”

-그래서 TV 시트콤? 거기에 갑자기 출연하겠다고?

미간을 찌푸리고 묻는 한 본부장의 말에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깐 나오는 단역이기는 하지만 제가 꼭 출연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단역인 그 역할에 왜 가느냐고.

한 본부장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니, 할리우드까지 가서… 그것도 주연에 가까운 좋은 조연 배역을 받았잖아. 거기서 갑자기 단역으로 시트콤에 출연하겠다는 게 무슨 소리냐는 거지.

나는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경험을 더 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내 말에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를 설득하듯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야. 희성 씨 경험이면 충분해. 한국에서 단역부터 시작해서 조연, 주연까지 안 해본 게 없잖아. 차근차근 올라가서, 할리우드까지 진출했는데 갑자기 무슨 단역이냐는 말이지.

그의 설득에도 내 마음은 너무나 굳건했다.

“하지만 본부장님, 제가 경험한 건, 한국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할리우드에 와서 처음으로 연기를 하니까, 모든 게 너무 낯설고 새로웠습니다. 한국에서 그 시간 동안 연기하며 배웠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당연히 그러겠지. 시장 자체가 다르니까.

“그러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경험을 더 쌓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가, 망설이는 한 본부장을 향해 의지를 불태우듯 말을 이어갔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제가 부족하다는 걸 너무나 느꼈어요. 저는 더 유명한 배우, 더 연기에 미친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단역이기는 하나, 주연을 맡은 것만큼 많은 것을 배워 가겠습니다.”

-하아….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에게 말했다.

“한 번만 허락해 주십시오, 본부장님. 제가 TV 시트콤에 나가길 잘했다, 이야기를 듣게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꼭 하고 싶습니다.”

내 말을 끝으로, 한국과 미국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휴대 전화 화면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한 본부장은 한숨을 참아내는 듯한 얼굴을 계속해서 보였고.

무언가를 노트에 끄적대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네, 본부장님.”

-옆에 김 실장도 있나?

그의 물음에 화면에 잡히지 않게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 여기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김 실장이 옆에서 잘 케어해주고, TV 시트콤 한번 해봐.

한 본부장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어, 이렇게 연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데, 회사에서 무슨 수로 말리겠어. 노는 것도 아니고, 일하고 싶다고 허락해 달라는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 실장은 그쪽이랑 컨텍하고, 추후 내용은 바로 보고해주고.

“예,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 실장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한 본부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출연하는 대신, 할 게 있어.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시트콤 나가는 대신에, 우리 쪽에서 보도 준비할 테니까. 인터뷰 몇 개는 진행해야 돼. 할 수 있지?

“네, 근데 어떤 인터뷰를 하면 되는 겁니까?”

-희성이가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는 기사가 싹 돌았는데, 갑자기 TV 시트콤에서 단역으로 나오면 안 되잖아. 할리우드에서 바닥부터 시작한다는 느낌을 주면 안 되니까, 인터뷰 좀 여러 개 해둬야겠어.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외쳤다.

“알겠습니다!”

-그래, 거기는 늦은 밤일 텐데, 둘 다 얼른 쉬어.

“네, 들어가십시오. 본부장님.”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김 실장에게 소리쳤다.

“형, 됐어!”

내 말에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휴, 진짜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데 누가 무슨 수로 너를 막겠냐.”

나는 헤실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

며칠 뒤.

나는 브라이언이 출연 중인 시트콤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20부작 이하인 드라마와는 달리.

시트콤은 인기에 따라 몇 달을, 길게는 몇 년을 계속 방영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본이 완결까지 나 있는 것이 아니었지.

내가 출연 확정을 짓고 나자,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내가 출연할 대본이 나왔고.

나는 제프리 감독 작품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시트콤 연기를 준비했다.

“진!”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반기는 브라이언의 모습.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 앞으로 다가왔다.

“브라이언, 왜 여기에 있어요?”

“진, 온다고 해서 인사하려고 기다렸지.”

그는 내 손을 잡아 악수를 하며, 반가움을 표했다.

“고마워요. 브라이언이랑 같이 연기를 하게 돼서 너무 기뻐.”

브라이언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진이랑 내가 함께 연기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우리는 함께 눈을 맞추고는 감격에 젖었다.

내가 브라이언을 처음 보고, 그의 연기에 감탄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함께 같은 작품에 출연하게 될 줄이야.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내가 그날 브라이언의 연극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날 저녁에 그 바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그와 함께하지 못했겠지.

브라이언과 친구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는 내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요. 안에 배우들이랑 감독님, 스태프들 소개해 줄게요.”

“좋아요.”

우리는 서둘러 현장으로 향했고.

한데 모여 있는 스태프들과 배우를 향해 브라이언이 소리쳤다.

“여기 한국의 최고 배우, 진희성 배우 왔습니다!”

그의 말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손뼉을 부딪쳤다.

짝짝-.

그러고는 환호와 함께 나를 반겼지.

“반가워요.”

“나 한국 배우는 처음 봐. 잘생겼네요, 희성 씨.”

그들은 한 명씩 내게 코멘트를 붙여 인사했고.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 역시 그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춰 인사를 보냈다.

브라이언은 마치 내 매니저처럼, 대변인처럼 그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진은 한국에서 엄청 유명한 배우예요. 지금 제프리 감독의 영화 촬영 중인데, 거기서도 엄청난 배역을 맡고 있어요.”

“이야, 제프리 감독이랑 같이 촬영 중이에요?”

“오오, 제프리 감독?”

옆에 있던 배우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물었고.

“네, 좋게 봐주신 덕에 열심히 촬영하고 있습니다.”

제프리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조금 달라졌다.

조금 전, 그저 단역으로 왔다고 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

이제야 내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브라이언은 그들의 반응에 신이 났는지, 내 소개를 이어갔다.

“그리고 진은 거기서 비중도 높은 역할인데, 여기에 출연하게 된 건 할리우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그는 나를 좋게 포장해 줄뿐더러,

주변 배우들과도 화목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잘했어요. 영화도 좋지만, 이런 시트콤도 경험해 봐야죠.”

“맞아요. 우리 잘 지내봐요.”

그들의 환대에 나는 활짝 웃었고, 기분 좋게 촬영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뒤.

촬영 시작을 알렸고.

나는 브라이언과 함께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 연습 좀 했어요?”

“네, 열심히 했는데 NG 안 내도록 잘해봐야죠.”

그때, 필릭스 감독이 다가와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 섰다.

“그럼 가볍게 시작해 볼게요. 레디, 액션!”

카메라에 빨간 불이 켜졌고.

나는 연습했던 대로 배역에 빠르게 몰입했다.

“회사에서 민폐를 부리고 뛰쳐나간 게 너야?”

브라이언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소리쳤고.

“당신, 나 알아?”

“뭐? 당신…?”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 당신. 회사도 그만둔 마당에 내가 왜 그쪽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게 진짜!”

순간 바람이 내 얼굴로 불어왔고.

그와 눈을 마주친 채로 화가 난 눈빛을 보내야 했지만, 그 바람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당연히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지.

“컷, NG!”

필릭스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허리를 접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다시 하겠습니다.”

첫 촬영에 바람이 불어 눈이 감기고 말다니.

나는 한숨을 삼켜내며 사과했고.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그동안 작품에서 봐왔던 NG 이후의 장면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갑자기 바람을 위로 보내면 어떻게 해?”

“저도 모르게, 진희성 배우 얼굴을 보다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해요.”

“아니야. 잘생겼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하.”

강풍기를 들고 있던 스태프의 너스레.

그리고 그 말을 농담으로 함께 받아치는 감독까지.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 쪽은 촬영 현장이 꽤 딱딱하고 정적인 편이었다.

진중하고 무거운 편에 속했지.

하지만 시트콤 촬영장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깊은 친목과 따스한 화목함이 느껴졌다.

다들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즐겁게 일하는 느낌이 물씬 들었고.

모두 웃으면서 작업을 하기에, 현장 분위기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해도 촬영에 들어가면 그 누구 하나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내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데…?’

눈앞에 펼쳐진 흥미로운 현장 상황에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곳에서 연기에 대해 뭔가 더 깨닫고 배울 게 많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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