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97)화 (97/303)

97화 #19 – 정해진 정답은 없다 (5)

무성한 풀숲.

휘이휘이-.

스산한 바람이 울창한 나무를 스쳐 지나갔고.

어둠이 내려앉은 이곳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밤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온통 나무와 풀숲뿐.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는 온데간데없었고, 끝없이 펼쳐진 숲만이 존재했다.

뭐지, 산속인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높은 곳은 아니었다.

평지에 이렇게 드넓은 숲이 있다고?

시골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싸한 느낌의 칠흑 같은 어둠과 높게 뻗은 나무들.

그저 거리가 온통 숲이었다.

그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내 꿈속이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그리고 여기는 몇 년도인 거야?

혹시 부족이 있는 구석기 시대 같은 곳인가?

그때 눈앞에 자막처럼 글자 하나가 떠올랐다.

‘2002년 5월 2일. 대한 민주주의 공화국’.

글자는 읽자마자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시야는 뒤틀리기 시작했다.

뭐야….

앞이 왜 이렇게… 윽!

팔뼈가 자유분방하게 뒤틀리고 있었고, 척추는 하나하나 뼈가 부서지기라도 한 듯 활처럼 휘어졌다.

“으으으으아!”

입 밖으로는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입가에는 뜨겁고 축축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

아니, 나와 같은 좀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똑바로 보이지도, 모든 형태가 온전히 보이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그저 소리가 나는 곳,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다-.

의식적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이었다.

달리고 달려도 새로운 길이 펼쳐지지는 않았다.

아까 보았던, 그리고 조금 전에도 본 것 같은 풀숲.

어수선하고 질서 없는 깊은 숲속.

본능적으로 사람을 찾아 움직이는 내 발길에 어둠 따위는 방해 요소가 될 수 없었다.

그저 이곳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몸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입맛을 다시며 코를 킁킁거리고,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꺾어댔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살아 있는 인간을 찾는 순간…!

“크으으으으-.”

그 인간의 연한 살로 돌진했고.

나를 포함한 모든 좀비 떼는 그 한 명의 사람에게 몰려들었다.

사정없이 수많은 좀비들에게 둘러싸였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인간마저 나와 같은 좀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으윽… 크으으.”

나는 곧장 그 인간, 아니 좀비가 된 그를 외면한 채.

다음 타깃을 찾아 다시 고개를 꺾어댔다.

팟-!

눈앞에 보이는 집 천장.

“하아….”

벌써 세 번째다.

이렇게 같은 장르의 꿈을 꾸는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좀비 꿈만 벌써 연달아 세 번을 꿀 수가 있는 거지?

점점 더 선명하고 뚜렷한 꿈에 온몸이 땀에 범벅이 되었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좀비 꿈.

너무나도 생생한 그 꿈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 프레임에 몸을 기대었고.

꿈의 내용을 천천히 되짚기 시작했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야.

지금껏 꿈에서 보았던 것들은 모두 연기로 소화했고.

거기에 그 꿈에서 나는 허상이 아닌, 내 과거였다.

차분히 꿈에서 보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그때.

잠깐만.

미간을 찌푸린 채, 옆에 놓인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2002년 대한 민주주의 공화국.’

분명 꿈에서 이 글자를 선명하게 보았었다.

확실하게 2002년이었다.

꿈을 꾸고 난 후, 그 꿈에 작은 장면도 잊어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착각을 하거나 잊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2002년 배경이라는 뜻인데….

“말이 안 되잖아.”

곧장 휴대 전화를 열어 ‘2002년’의 사진들을 검색했고.

그 어디에도 꿈에서 보았던 풀숲이 울창하고, 사막의 분위기를 풍기는 곳은 없었다.

휴대 전화를 닫은 채, 다시금 내가 적은 글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2002년 대한민… 어?”

잠이 덜 깬 건가 싶은 마음에 눈을 세차게 비빈 후, 다시 글자를 읽었다.

“대한 민주주의 공화국?”

내 얼굴은 곧장 일그러졌고.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 민주주의 공화국은 뭐야?”

2002년에 대한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니….

순간 북한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북한의 풀네임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내 꿈에 나온 ‘대한 민주주의 공화국’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다시 눈을 질끈 감은 채, 정수리에 열이 나도록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여러 가설을 세우며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정리했고.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단어 하나.

‘평행 세계’.

떠오른 단어에 놀라 소리쳤다.

“설마… 평행 세계인 건가?”

소름이 돋아난 양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럼 내 전생만 꿈에 나오는 게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내가 같은 시대를 반복적으로 살았다고 해도.

무려 1만 년….

문명이 시작되고 지구에서만 살기에 1만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긴 세월이기는 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머리가 너무 복잡해지는데?”

***

“형, 왔어?”

오늘도 김 실장보다 일찍 도착한 회사.

그는 입을 떡 벌리며 연습실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놀라는 김 실장을 향해 나는 대본을 펼쳐들었다.

“얼른 대본 연습해야지. 이제 촬영하기로 했으니까 더 열심히.”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희성아, 네가 그 영화 한다고 해서 사실 좀 놀라긴 했어.”

김 실장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걱정스러운 말과 달리 그의 표정은 온화했다.

“근데 대본을 몇 번이고 보니까, 네가 왜 하는지 알겠더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는 내 앞에 놓인 대본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거… 물건이야. 아무래도 진짜 잘될 것 같아.”

김 실장 역시 대본을 읽으며 내용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연습하고 있어. 커피 가져다줄게.”

“아니야. 내가 가져다 마실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누르며 자리에 앉혔다.

“워워, 가만히 있어. 배우님이 열심히 연습한다는데, 매니저가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하.”

나는 그의 말투에 웃음을 터트렸다.

“네네, 그럼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부탁드립니다. 매니저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가 나간 후, 다시 대본을 펼치고 순식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좀비가 있다는 게 말이 돼?”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다시금 두려움에 떨 듯 자세를 취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이 세상에 좀비가 있다는 게 말이 돼?”

내 입술은 파르르 떨려왔고.

한껏 움츠린 어깨와 불안에 떠는 얼굴.

거울에 비치는 나를 바라보며, 표정 하나하나를 바꿔갔다.

지난번, 최서빈을 만나며 깨달았다.

내가 작품을 고르는 건, 출연료나 동료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주연이라는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는 불안함에 작품을 모른 체했지.

하지만 강 감독을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한번 생각을 바로잡게 되었다.

내가 작품을 고르는 데 있어서, 부수적인 것은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물론 고려는 해야 하지만, 부수적인 것들이 주가 돼서는 안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작품.

내가 잘 살릴 수 있는 작품의 배역.

그 연기를 하는 배우와 감독, 스태프들이 합쳐져야 완성된 작품이 나올 테니까.

주먹을 불끈 쥐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것은, 결코 계단을 내려온 것이 아니다.

그저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발돋움일 뿐.

***

“안녕하세요.”

“네, 희성 씨. 오랜만이에요.”

회사 내에 있는 헬스장.

그동안 촬영 때문에 바빠서 자주 찾지 못한 헬스장에 도착했다.

처음 HS 엔터에 입사한 뒤, 별다른 스케줄이 없던 시절.

회사 헬스장에서 열심히 몸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벌크업했던 몸을 바꿔야 한다.

이번에 들어갈 작품인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바로 좀비물의 영화이기에, 좀비가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날렵하다 못해 앙상한 몸을 만들어야 했고.

그러려면 서둘러 체중부터 줄여야 할 터.

“저 이번에 들어가는 작품 때문에, 운동 좀 시작해야 해서요.”

나는 그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했고.

곧장 체중계에 몸을 올렸다.

-183cm, 78kg.

내 몸무게를 확인하고, 한숨부터 절로 터져 나왔다.

“하아, 여기서 10kg는 빼야 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트레이너는 입을 벌리며 답했다.

“70kg 이하로 만드셔야 하는 거죠?”

“네, 많이 홀쭉한 몸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통통하지 않은 체격에, 열심히 만들었던 근육.

트레이너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만들려면, 근육을 좀 빼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근육,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빼야 해요.”

내 단호한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트라로 지나가는 배역이 아닌, 조연으로 출연하기에 모든 요소가 아주 중요했다.

작은 디테일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되니까.

트레이너는 몸무게와 키를 보며 작게 읊조렸다.

“…쉽지 않을 텐데요.”

나는 의지를 불태우며 그에게 답했다.

“해봐야죠. 아니, 해내야죠.”

그 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서둘러 식단표를 작성해 내게 내밀었다.

“이대로 지켜주시고, 식단으로만 하시면 몸이 상할 거예요. 틈날 때마다, 아니 꼭 헬스장에 와서 운동도 하셔야 합니다.”

“네, 감사해요.”

***

오늘도 출근한 연습실.

거울을 바라보며 대본을 연습하고 있던 그때.

김 실장이 벌컥 문을 열며 다가왔다.

“희성아, 연습 잘하고 있어?”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김 실장은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출연진이 거의 다 정해져가나 봐.”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말했던 주연으로 다 정해진 거 아니었어?”

“아니야. 주연이 여러 명이라, 당시에 이미 확정되었던 두 명을 말한 거였고. 나머지 조연 배우들도 캐스팅이 끝나가나 봐.”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너는 조연이어도 어지간한 작품 주연급은 되더라. 다른 조연들이랑은 비중이 다르더라고.”

“그래?”

“응, 감독이 그때 했던 이야기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아. 분량이 널 인정한다는 증거잖아.”

“그렇구나. 그럼 주연은 다 정해진 건가?”

“아니, 아직 한 명을 못 뽑았다고 하더라고. 아직 강 감독님이 고민 중이신가 봐.”

강 감독이라면, 이미 원하는 배우가 있었을 텐데.

아직 한 명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말에 나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대본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대체 누구를 그 자리에 뽑으려고 이렇게나 오래 걸리지?”

내 말에 김 실장 역시 공감하며 답했다.

“그러게. 누가 그 마지막 주연 자리에 올까….”

다시금 나는 시선을 대본으로 돌렸고.

김 실장은 손뼉을 부딪치며 내게 말했다.

“아, 희성아. 오늘 점심에 뜨끈한 국물이나 먹으러 가자.”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회사 앞에 곱창전골 식당이 생겼는데, 팀장님이 어제 가봤더니 진짜 맛있다고 하더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오늘은 다른 분들이랑 먹고 와.”

내 말에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안 당겨?”

그러고는 눈썹을 들썩이며 재차 물었다.

“다른 거 먹을까?”

그의 말에 나는 대본을 그에게 내밀며 답했다.

“아니, 나 오늘부터 몸도 작품 준비에 들어갔어.”

그러자 그는 입을 떡 벌렸고.

나는 테이블 아래 내려놓았던 가방을 꺼냈다.

그러고는 안에 들어 있는 도시락.

닭 가슴살과 삶은 계란, 토마토를 꺼내 그에게 보였다.

“이게 다 뭐야?”

질문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 앞으로 내 앞에서 음식 유혹은 절대 금지야.”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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