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96)화 (96/303)

96화 #19 – 정해진 정답은 없다 (4)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아침 일찍 회사 연습실로 출근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대본 하나만을 올려둔 채, 그 대본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최서빈에게 들었던 조언.

작품이 좋다면, 아무것도 재지 말고 출연하라는 것이었지만.

이제 막 주연을 단 내게 다시 조연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물론 작품만을 보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가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김 실장 또한 조연으로 다시 한 계단 아래로 가는 것을 적극 추천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머리로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다시 대본을 처음부터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보다 더 객관적으로, 이 작품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에 대해 생각해야 했으니까.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로 나온 것이기에, 연습실 주변은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는 듯 조용했고.

그 덕에 오롯이 대본에만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집중해 대본 읽기를 몇 시간.

단 한 번의 몰입력도 깨지지 않은 채, 대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하아, 대본은… 다시 읽어도 너무 좋네.”

확실히 대본은 너무나도 좋았다.

내가 며칠간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다.

그리고 맨 앞에 적혀 있는 감독의 이름 ‘강준수’ 세 글자를 바라보았다.

강준수 감독.

이 영화에 대한 고민을 하며, 그에 대해 조사를 했다.

강준수 감독의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아니, 단 한 작품만이 영화관에 상영된 적이 있었지.

그러니까 이번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영화가 그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첫 번째 영화는 손익 분기점을 겨우 넘었다고 한다.

딱 망하지는 않은 만큼으로 마무리된 것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달고 상영한 첫 영화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꽤 성공적인 스타트라고 볼 수 있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기 전 감독의 영화가 손익 분기점을 넘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

그의 영화는 오랜 기간 영화관에 상영되거나, 널리 유명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품의 영상미가 뛰어나 영화 업계에서도 여러 번 회자된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두 번째 작품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다고 들었다.

무조건 이번 작품이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해볼 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볼 만하다는 뜻이, 이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주연의 자리에서 내려올 만큼, 이 영화에 사활을 걸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또한 갖고 있었다.

모든 것에는 정답이 없고, 미래를 알 수가 없으니.

섣불리 결정하지 못할 수밖에.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리가 저려오기 시작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평화로운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그때.

“뭐야, 희성아. 벌써 왔어?”

어느새 김 실장은 가방을 든 채 내 앞에 서 있었고.

이제 막 출근을 해 내게로 먼저 온 모양이다.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 대본 좀 다시 보고 싶어서, 조금 일찍 왔어.”

그는 내 말에 시선을 테이블로 옮겼다.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대본을 보더니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결정 못 했구나?”

김 실장은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긴, 이제 막 주연의 날개를 달기 시작했는데, 조연으로 다시 내려간다는 게… 쉬운 건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머리를 움직였다.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조만간 답을 내리긴 해야 할 것 같아.”

김 실장은 다이어리를 펼쳐 날짜를 체크하며 말했고.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만 더 고민해볼게. 생각보다 쉽게 결정이 안 되네.”

그러자 김 실장이 앞에 있는 대본을 펼쳤고.

그가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때.

지이잉.

테이블에 올려진 김 실장의 휴대 전화 진동이 세차게 울렸고.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서둘러 자세를 고쳐 잡은 뒤,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아, 네. 맞습니다. 예, 예. 가능합니다.”

통화 중에 김 실장은 대본을 덮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검지를 뻗어 대본 위의 글자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네, 그럼 미팅 시간이랑 장소 문자로 보내주시면 확인하고 답변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의 통화 내용에 ‘미팅’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내 일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통화가 종료되었고.

내가 묻기도 전에 김 실장이 먼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이 작품 어떻게 할 거야?”

“이거, 고민해 보라며.”

“근데… 방금 강준수 감독한테 미팅 요청이 들어왔어.”

“벌써?”

아직 고민을 끝내지 못했는데, 벌써 미팅 요청이라니.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

아직 작품에 합류할지 말지 노선을 정하지 못했지만.

나는 한번 강 감독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대본을 노려보듯 보며 김 실장에게 답했다.

“강준수 감독님… 뵈러 가자.”

***

빠르게 달리는 차 안.

강 감독과의 미팅 장소로 향하고 있었고.

그 미팅은 오디션이 아니었다.

강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조연 자리를 하게 될지, 하지 않을지 이야기하러 가는 자리였을 뿐.

하지만 오늘 미팅을 하러 가는 날까지도 여전히 내 마음은 어느 한곳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너무나 하고 싶은 작품.

주연을 맡기 전까지는 이런 고민을 심각하게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지.

그저 내게 작품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행복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해주는 작품을 늘 찾았고.

오디션에서 합격을 하기만 한다면, 어떤 작품이든 벅차고 기뻤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 오르니 작품이나 배역으로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구나, 라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이 기분이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었다.

내 위치가 달라졌고, 그에 맞게 고민하는 주제가 달라진 것일 뿐.

“희성아, 다 왔다.”

미팅 장소에 도착해 차는 서서히 멈춰 섰고.

긴 심호흡을 하며, 차에서 한 걸음을 내딛었다.

***

똑똑.

긴장한 얼굴로 선 김 실장과 함께, 숨을 내뱉으며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앞에 서 있는 강 감독은 예상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강 감독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실제로 본 그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아이고, 먼 걸음 해 주셨습니다.”

강준수 감독이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건넸고.

커다란 키, 푸근한 몸.

덩치가 꽤 큰 편이라, 굳이 동물에 비유하자면 곰 같은 느낌이 풍겨왔다.

말투 또한 친근함을 내뿜었고, 걱정과 달리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예, 알죠.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하하, 아닙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테이블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준비되었다.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드릴 게 커피뿐이네요.”

강 감독은 김 실장과 내게 말했고.

“아닙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에게 대답한 뒤,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강 감독의 뒤를 눈으로 쓰윽 훑었다.

자신의 지난 영화 포스터부터 시작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

그리고 영화에서 찍었던 수많은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책장이 놓여 있었고, 그 책장에는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그 책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영화, 연출에 관련된 책 제목이었다.

그것으로만 보아도 강 감독이 얼마나 영화에 진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본은 다 읽어보신 걸까요?”

강 감독이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네,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은 정독했던 것 같습니다.”

“이야, 몇 번이나 보셨다니, 감사하네요.”

그는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기뻐했고.

정말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대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읽을 때부터 대본, 내용의 짜임이 탄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었고요….”

내가 대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강 감독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를 배려해서 하는 행동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영화 대본에 관해 이야기하고, 의견을 낸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하는 듯 보였다.

“…맞습니다. 제가 원하던 의도가 그거였어요. 멸망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 그 극강의 공포심을 느끼는 인간. 그로 인해….”

강 감독의 눈은 초롱거리다 못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열망이 가득했고.

나 역시 그와 열띤 토론을 펼치듯 대화를 이어갔다.

강 감독은 영화에 그 누구보다 진심인 듯 보였다.

감독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영화에 온전히 빠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강 감독은 내가 본 감독들에 비해 그 깊이가 조금 더 깊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 태도, 그리고 열정은 말할 것도 없었지.

그렇게 우리는 수십 분을 쉬지 않고 영화 이야기를 나눴고.

그 대화의 주제는 단 한 번도 경로를 이탈하지 않았다.

김 실장은 대화에 참여하다가 어느샌가 고개만을 끄덕이며 경청하였고.

강 감독과 나는 지치지 않은 채, 대본을 모두 입 밖으로 얘기하듯 말을 이어갔다.

“이야, 희성 배우님이 제가 원하는 의도, 관객들이 봤으면 하는 그런 디테일 장면까지 모두 대본으로만 캐치를 해주셨네요.”

“하하, 그런가요?”

“네, 저 지금 너무 기쁩니다. 하하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내 우리는 동시에 커피를 들이켰고.

김 실장은 나와 강 감독을 쓰윽 바라보며 조심스레 대화에 참여했다.

“저… 감독님.”

“예, 실장님.”

“그럼 저희가 주연으로는 출연이 불가하다는 말씀이시죠?”

드디어 본론이 던져졌고.

강 감독은 어느덧 미소를 지워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저도 희성 씨가 주연 자리에 계시는 건 압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다시 조연으로 내려오시는 거… 너무나 어려운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강 감독 역시 내가 주연으로 드라마에 출연한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 저희 작품에 주연을 전부 여자 배우들로만 구성할 생각입니다.”

“아….”

내가 그의 마음에 차지 않거나, 배역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성별에서부터 나는 주연에 충족되지 않았던 것이지.

여자 배우로만 주연을 만들 생각인데, 내가 더 이상 주연에 대해 연연해봤자 소용이 없을 터.

나와 김 실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몰랐습니다.”

김 실장이 답하자, 강 감독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희 작품의 주연을 전부 여자 배우들로 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남자 조연 배우를 연기가 탄탄한 배우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주연 여자 배우, 라인업은 다 정하신 걸까요?”

내 말에 강 감독이 머리를 흔들며 답했다.

“주연 배우는 우선 한시아, 서혜나 배우입니다.”

그의 말에 김 실장과 나는 탄성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아, 거기에 서혜나 배우까지.

이미 배우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명 배우들이었다.

우리가 그 배우들의 이름을 곱씹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 강 감독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에 저희 측으로 출연 제안 주신 걸 듣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희성 씨만큼 소화할 만한 배우는 없을 것 같았고요.”

강 감독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희성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함께 작품을 하고 싶어서, 오늘 이렇게 미팅을 요청 드린 거고요.”

그의 축 처진 눈썹.

하지만 그의 부릅뜬 눈에서는 진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예, 저도 작품은 너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컨택 요청도 했던 거고요.”

내 말에 강 감독은 흥분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할 때, 영화는 그저 감독이 제작하고 배우들은 대본만을 보고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속 내 눈만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대사를 틀릴까 전전긍긍하며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배역과 배우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에 호응했다.

“맞습니다. 저 역시 그저 대사를 내뱉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게 배우가 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 저는 그래서 작품을 제가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든 방면에 진심을 다 해줄 수 있는 프로가 함께해야 한다는 주의거든요.”

자신의 작품관에 대해 말하는 강 감독의 눈은 지금까지 봤던 그의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커다란 눈이 반짝이고, 동공이 커진 채 열변을 토하듯 몸을 부풀렸다.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는지, 그 모든 마음이 내게도 전달되는 듯했다.

“그래서 저는 단순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원치 않습니다. 작품에 대한….”

강 감독은 커피가 차갑게 식어가도록 자신의 작품, 감독에 역량.

거기에 배우의 태도와 존중까지.

이런 감독이라면, 내가 조연으로 한 계단 잠시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믿고 함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것 또한 열정을 다한 연기였으니까.

그와의 진심이 통한 순간.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강 감독님.”

“예, 희성 씨.”

허리를 곧게 세우고 그를 향해 외쳤다.

“저, 이 작품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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