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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98)화 (98/303)

98화 #20 – 낯선 곳에서 (1)

닭 가슴살을 먹으며 목표 체중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하던 중.

김 실장이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희성아, 고생이 많다.”

“에이, 고생은 뭘. 작품에 맞춰서 준비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어깨를 들썩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칼로리가 낮은 간식 더미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김 실장이 건넨 상자 안의 간식을 눈으로 살피며 물었고.

그는 여전히 처진 입꼬리로 내게 답했다.

“이렇게 매일 연습하느라 힘들 텐데, 식단 조절까지 하잖아. 중간중간에 간식 챙겨 먹으면서 하라고.”

나를 걱정하는 김 실장의 마음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마워. 근데 형, 걱정 안 해도 돼. 잘 챙겨 먹으면서 운동도 하고 있어.”

“그래도… 이번 영화 촬영 끝나면, 맛있는 거 거하게 먹으러 가자.”

“하하, 알겠어.”

김 실장은 내 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진짜 많이 뺐다. 눈으로 봐도 확연히 차이 나네.”

그의 말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뿌듯한 얼굴로 훑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더니.

갑자기 급격한 다이어트를 하다 보니, 위기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본을 읽으며 입맛을 지워냈고.

그 결과가 이렇게 뚜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이제 촬영 전까지만 더 힘내면, 목표 체중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

신이 난 아이처럼 말하는 내게 김 실장이 미소로 화답했다.

“고생 많았다. 다음 주 대본 리딩 때, 강 감독님이 보고 놀라시겠는데?”

“그러게. 당장 다음 주가 벌써 대본 리딩이네.”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맞다. 희성아, 영화 최종 라인업 떴어.”

“오오, 알려줘.”

그는 다이어리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 건넸고.

나는 곧장 그 서류를 확인했다.

“주연은 한시아, 서혜나… 이 배우들은 원래 알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배우를 확인하며 천천히 넘기던 그때.

마지막 주연이 빈, 한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주연: 미정.

“응? 여기는 아직 안 정해진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고 김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고.

그는 내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그게 이제 나왔어. 방금 전화 받았는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서 누구래?”

마른침을 삼키며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송유나. 오늘 최종으로 결정됐다고 하더라고.”

…송유나.

이렇게 또 한 번 마주친다는 생각에 입이 떡 벌어졌고.

나는 대본을 바라보며 천천히 배역에 대해 떠올렸다.

“이 역할이라면… 송유나가 꽤 잘 어울리기는 하네.”

작게 읊조린 내 말에 김 실장이 크게 공감하며 답했다.

“응, 캐릭터 진짜 잘 살릴 것 같긴 하지?”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유나와의 호흡… 오랜만인데?

***

일주일간 대본 연습도, 마지막 다이어트도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대망의 대본 리딩 날.

차에서 내리자마자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점검했다.

“희성아, 올라가자.”

“응.”

김 실장과 함께 찾은 대본 리딩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몇몇 배우들이 도착해 있었고.

초면인 배우투성이였지만,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서혜나라고 해요.”

그녀는 밝은 얼굴로 인사했고.

자리에 앉아 있던 한시아도 내게로 다가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어머, 희성 씨. 저는 한시아라고 해요. 반가워요.”

“네, 시아 씨. 저도 반갑습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했다.

“희성 씨, 저 드라마 잘 봤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시아 씨가 제 드라마도 봐 주셨다니까 영광인데요?”

“영광은요. 제가 함께 촬영하게 돼서 영광이죠. 하핫.”

남자 배우들이 많지 않은 이번 영화.

한껏 긴장하고 대본 리딩실에 들어왔지만,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그렇게 경계심을 푼 채 배우들과 연달아 인사를 나눴다.

“희성 씨 왔어요?”

그때, 내 뒤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

강 감독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서둘러 뒤를 돌았고.

강 감독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죠?”

“하하, 그럼요.”

그는 웃으며 나와 악수를 나눴고.

이내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 몸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희성 씨, 살을 얼마나 뺀 거예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뺐습니다.”

“역할 때문에 조금만 빼면 좋겠다고 한 건데, 고생 많았겠네.”

강 감독은 내 팔과 어깨를 어루만지며 감탄을 쏟아냈고.

이에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역할에 맞춰서 준비해야죠.”

“이야, 고마워요. 캐릭터랑 지금 딱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 감독은 연신 혀를 내두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그래요. 우리 다 모이면, 시작합시다.”

그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대본 리딩실을 빠져나갔고.

아직 20여 분의 시간이 남은 상황.

자리에 앉아 있는 배우들.

그리고 몇몇은 모여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번 대본 리딩실의 문이 열렸고.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대본 리딩실에 도착한 건, 다름 아닌 송유나였다.

그녀는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닌,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곧장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앞만 바라보며 걸어갔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초면이 아닌 사람은 송유나뿐이었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유나 씨!”

내 목소리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고, 고개만 살짝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출연하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터.

하지만 그녀는 놀라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눈을 마주친 채 빤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손을 들었다.

“유나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내 인사에 송유나는 그저 고개만을 까딱였다.

“네.”

그리 오래전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광고 촬영도 했으면서 이렇게 차갑게 인사를 하다니.

뭐, 그녀의 성격이 도도했던 게 하루 이틀은 아니니까.

살가웠다면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을 터.

송유나는 곧장 앞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흠흠.”

나는 그녀의 옆에 선 채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보드게임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던 사람은 어디 갔나?”

내 너스레에 그녀는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서 있는 나를 쏘아보았다.

째려보는 송유나의 얼굴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

‘진희성 배우님’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이름표.

이름을 확인한 뒤, 자리에 착석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름표와 생수, 음료수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내 이름이 써진 대본이 하나 있었다.

자세를 고쳐 잡고, 가져온 펜을 꺼내 대본을 펼쳤다.

내가 대사를 내뱉어야 할 부분을 체크하기 위함이었고.

대본을 펼치자, 이미 내 대사마다 형광펜 처리가 다 되어 있었다.

내 대사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대본은 그게 최종본이에요. 기존 대본에서 수정이 좀 되었는데, 오늘 리딩하는 부분은 어차피 수정이나 추가된 내용은 빠져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강 감독의 말에 우리는 합창하듯 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대본 리딩 끝나고, 각자 수정이랑 추가된 부분 잘 확인하세요. 그리고 크랭크 인 때 맞춰서 오시면 될 것 같네요.”

강 감독은 말을 끝낸 후, 대본으로 눈을 옮겼고.

그의 말에 모든 배우들 역시 대본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나 또한 어떤 부분이 수정되고 추가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대본을 확인했다.

하지만 꽤 많은 양의 대본이라 전부 확인을 하지 못한 채,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자, 그럼 첫 번째 신부터 시작해 볼게요.”

강 감독의 신호와 함께 송유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대본 리딩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이미 다 외운 대본이었기에.

허공을 바라보며 대사를 읊었다.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는 건가?”

세상이 전부 좀비로 변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란 생각에 희망을 잃은 얼굴.

의욕을 모두 상실한 말투로 대사를 이어갔다.

“이렇게 굶주린 채 생명만 연장하는 게, 과연 올바른 행동이 맞나….”

강 감독은 대본이 아닌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배역에 몰입해 연기하는 나의 모습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내 대사가 끝나자, 강 감독이 입을 열었다.

“어우, 너무 좋네요. 자, 그럼 우리 잠깐 쉬었다가 다시 시작합시다.”

그는 손뼉을 한 번 부딪쳤고.

그렇게 배우들은 굳었던 몸을 일으켰다.

“이야, 선배님 연기 진짜 대단하세요.”

내 옆에 앉아 있던 조연 배우 한동민이 감탄을 쏟아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하, 고마워요. 동민 씨도 잘하시던데요.”

그에게 미소를 보낸 뒤, 고개를 돌려 대본 리딩실 테이블의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이번 영화는 아무래도 좀비, 생존물이다 보니.

출연하는 배우 자체가 꽤 많은 편이었다.

주연 여배우들을 제외하고, 조연을 맡은 배우들이 다른 영화에 비해 월등히 수가 많았고.

나 역시 조연으로 출연하기에 그 비중이 궁금했다.

쉬는 시간인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서둘러 대본 뒷부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본에서 수정, 추가된 부분은 어디이고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대본을 보던 내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조연 중에서도 내 비중이 생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최초로 받았던 대본에서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나왔는데,

지금 최종본에서는 거의 주연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대사와 나오는 신이 많았고.

형광펜이 처져 있는 부분이 그렇지 않은 페이지보다 월등히 많았다.

강 감독이 유독 내 부분을 신경 써준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겼고.

형광펜이 그어져 있는 부분을 보며 내 입가에는 점점 미소가 번졌다.

분량이 많은 건, 내가 연기를 보여줄 부분이 많다는 것이기에.

배우로서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지.

몇 분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대본 리딩이 이어졌다.

연기를 하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분량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혼자 연습을 하던 대본에, 다른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니.

더 몰입되어 연기가 잘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작품이었다.

아직 촬영 현장은 아니었지만, 대본 리딩을 하며 배우들의 목소리가 입혀지니.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 대본… 말도 안 될 정도로 재미있다.

흥분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열정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다른 배우들에게도 전해졌다.

대본 리딩실은 현장을 방불케 만들 만큼 뜨거웠고.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건 흥행… 아니, 잘되는 수준이 아니다.

이 영화는 분명 대한민국을 들썩일 정도로 대박이 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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