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95)화 (95/303)

95화 #19 – 정해진 정답은 없다 (3)

서인우.

최근 함께 드라마를 찍었던 배우.

그는 나와 찍었던 드라마에서 조연을 맡았고, 성황리에 드라마가 끝이 났다.

그 이후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최근 들어 각자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연락이 뜸했지.

그런데 서인우가 이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을 줄이야.

저 멀리에 보이는 서인우와 허공에서 눈빛이 마주쳤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촬영이 잠시 멈춘 덕에 서인우는 나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희성 선배!”

“와아- 인우야,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우리는 밝게 인사를 나눴고.

그는 내 옆에 있는 김 실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김 실장님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서인우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희성 선배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나 너 잘하고 있나 염탐하러 왔다. 하하.”

그는 내 농담에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답했다.

“에이, 나 여기 출연하는 것도 몰랐으면서. 하핫.”

“사실 상현 선배님도 뵙고 응원차, 구경차 왔어.”

서인우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잘나가는 배우님들끼리는 다 아는 사이들이셨네.”

“아니야. 같은 회사 소속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선배님만 잘나가시지, 나는 뭐.”

그는 손을 흔들었다.

“우리 희성 선배도 요즘 잘나가잖아. 소문이 자자해.”

그때, 저 멀리서 스태프가 서인우를 향해 소리쳤다.

“인우 씨, 촬영 들어 가실게요.”

“앗, 네!”

나는 서인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인우야, 얼른 촬영 가. 우리는 다음에 따로 한번 보자.”

“좋지. 연락할게.”

그는 내게 손을 흔들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잠시 뒤, 서인우의 연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멀리서 그의 연기에 집중했다.

‘인우… 연기가 더 늘었네.’

서인우를 바라보며 집중하던 순간.

김 실장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희성아, 보고 있어. 나 매니저들한테 좀 다녀올게.”

“응, 천천히 갔다 와.”

김 실장이 떠난 후, 나는 다시 미간에 힘을 주고 서인우와 상대 배역과의 호흡에 시선을 고정했다.

몇 번의 테이크가 더 이어졌고.

서인우의 연기는 물이 오른 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상대 단역 배우의 연이은 실수로 NG가 반복되고 있었고.

그럼에도 서인우는 흔들리지 않은 채 호흡을 끌고 있었다.

나까지 덩달아 긴장하고 숨을 죽여 서인우의 연기에 몰입했다.

그때, 내 어깨에 쓰윽 손이 올라왔다.

“희성아, 잘 보고 있어?”

김 실장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집중하고 있다 놀라 몸을 움찔거렸고.

그는 지인 매니저와 함께 내 옆에 서 있었다.

“어?! 인우 보느라, 형 오는 것도 몰랐네.”

나는 김 실장의 옆에 있는 매니저를 향해 인사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네, 희성 씨.”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근데 희성 씨 인기가 많으시네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저쪽에 단역 배우인 것 같은데… 저분이 계속 쳐다보시더라고요.”

매니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고.

그 끝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한소정이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김 실장을 향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형, 나 저기 좀 다녀올게.”

김 실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한소정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응, 다녀와.”

빠르게 한소정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사했다.

“소정 씨!”

“와아, 진짜 희성 씨였네요. 멀리서 보고 희성 씨가 맞나 아닌가, 긴가민가했거든요.”

“하하, 그러셨어요?”

그녀는 연신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정 씨도 이 드라마 찍고 계셨구나.”

한소정은 내 말에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네, 여전히 단역으로 나오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꾸준히 작품 활동하고 있어요.”

“왜요. 단역이 어때서요. 원래 단역하면서 하나씩 성장하는 거죠.”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소정 씨는 워낙 연기를 잘하시잖아요.”

내 말에 한소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처음 한소정과는 단막극 상대 배역으로 만났었다.

이후 나는 조연에서 주연으로 성장하고 있고.

그녀는 단막극 이후 단역 배우에서 머물고 있었지.

한소정과는 함께 성장해 나가는 느낌이었기에, 그녀의 행보에 관심이 갔다.

더군다나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 그녀를 항상 응원했지.

하지만 여전히 단역 배우에 머물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는 씁쓸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한소정은 손뼉을 부딪치며 내게 말했다.

“저희 ‘연예계 엑스트라’ 작품 이후로 처음 보는 거죠?”

서둘러 화제를 환기시키는 그녀의 질문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때 이후로 통화 말고 본 적이 없었네요.”

한소정은 나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렸고.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나는 조심스레 한소정에게 물었다.

“근데 뭐 잃어버렸어요?”

“아, 아까 스태프분께서 드라마 티셔츠 올려 두셨다고 했는데, 제가 못 찾고 있는 것 같아서… 얼른 찾아보려고요.”

그녀는 바닥에 놓인 의자와 소품들 사이를 뒤적이며 찾기 시작했고.

“아… 저도 도와 드릴게요.”

나는 그녀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이 의자 뒤로 넘어간 건가?”

그녀의 뒤에 있던 커다란 의자를 들던 그때.

“어머, 희성 씨!”

스태프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손뼉을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세요.”

“아까 오셨다고 해서 뵈러 왔어요. 팬이에요.”

그녀는 내게 악수를 건네며 활짝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뭐 잃어버리셨어요?”

그녀는 내 주변을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옆에 허리를 숙인 채 물건을 찾던 한소정을 가리키며 답했다.

“아, 여기 한소정 배우님이 드라마 티셔츠를 못 받았다고 하셔서요. 스태프분이 올려 두시다가 떨어뜨리신 건가 해서 같이 찾아드리고 있었어요.”

내 말에 그녀는 연신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아이고, 말씀하시지. 제가 얼른 챙겨 드릴게요.”

그녀는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소리쳤다.

“여기 티셔츠랑 물건들 얼른 가져와!”

그리고 곧장 한소정에게 티셔츠와 물품들을 한가득 건넸고.

그 물건을 받은 한소정은 입꼬리를 옅게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요, 제가 한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덕분에 원래 받을 것보다 물건을 더 많이 챙겨주신 것 같은데….”

한소정은 미소를 지으며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

“희성아,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마자 김 실장이 내게 물었다.

“응, 바로 가야지.”

“알겠어. 출발할게.”

그렇게 나를 태운 차량은 촬영장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나는 운전석에 앉은 김 실장을 향해 말했다.

“형, 오늘 데려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많이 배웠어.”

내 말에 김 실장이 룸 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에이, 고맙긴. 이렇게 다른 촬영장도 종종 놀러오자. 은근히 배울 점도 많고, 좋을 거야.”

“좋지.”

지이잉.

그때, 주머니 속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 최서빈 선배님]

“어?”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은 뒤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희성아. 통화 가능해?

“그럼요.”

-뭐 하고 있어?

“저 오늘 일정 끝나서, 이제 집에 들어가려구요. 선배님은요?”

-잘됐다. 그럼 지금 만나서 술이나 한잔할까?

최서빈의 술자리 제안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최서빈의 집 근처에 있는 동네 술집.

그가 단골로 다니는 곳이라, 술집 가장 안쪽에 있는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룸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직원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안쪽으로 안내했고.

문을 열자, 최서빈이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선배님!”

“오랜만이네, 희성이.”

그를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잘 지내셨죠, 선배님?”

“하하, 그래. 뭘 새삼스레 이렇게 인사해.”

그는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턱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에이, 그래도 선배님보고 이 정도로 인사는 해야죠.”

내 너스레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곧장 술을 따랐다.

“잘 지냈어?”

“예, 다음 작품 찾으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선배님은요?”

나는 그의 손에 있는 술병을 받아, 그의 빈 잔을 채우며 물었고.

“곧 드라마 촬영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야.”

“와아, 선배님 얼마 안 쉬지 않으셨습니까?”

최서빈은 나와 영화를 찍은 뒤, 한참을 쉴 거라고 했던 예상과는 달리.

그리 오랜 기간을 쉬지 않은 채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오래 쉬었지. 길게 쉬어서 뭐 하겠냐.”

“하하, 진짜 대단하십니다.”

내가 아는 최서빈은 지금껏 긴 세월을 공백기 없이 달려왔다.

길어야 한 작품이 끝난 후, 몇 개월가량의 휴식을 취한 뒤.

곧장 다음 작품으로 복귀하고는 했으니까.

하긴… 그래야 이렇게 톱스타 자리까지 오를 수 있던 거겠지만.

그는 가득 찬 술잔을 허공에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넘실거리는 첫 잔이 맞부딪친 후, 식도를 타고 차갑게 넘어갔다.

술잔이 몇 번이고 부딪치며, 안부에 대한 주제가 끝이 날쯤.

탁.

최서빈이 술잔을 입에 털어 부은 후, 테이블에 빈 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고르고 있는 중인 거야?”

“…예.”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홀로 골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이었고, 그것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최서빈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선배님, 사실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요.”

그는 심각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덩달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제가 최근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잖습니까.”

“그랬지.”

그는 심오한 얼굴과는 반대로 입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그런데 이번에 하고 싶은 작품이 생겼는데, 제가 조연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내 말에 최서빈은 아랫입술을 내밀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막 주연을 하기 시작했는데, 다시 조연으로 간다는 게… 생각만큼 쉽게 결단이 안 서더라고요.”

최서빈은 여전히 내 말을 경청하며,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조연으로 다시 가도 괜찮은 건지, 혹여나 다시 주연으로 가는 길이 멀어지지는 않을지 너무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에게 고민을 쏟아부은 뒤에야 앞에 놓인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쓰디쓴 알코올을 온전히 느낀 후.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최서빈이 온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작품은?”

“네?”

돌아오는 짧은 대답.

아니, 짧은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놀란 내 얼굴과는 달리, 최서빈은 누구보다 태연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작품은 어떠냐고.”

“아….”

주연과 조연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내게, 최서빈의 질문은 나를 당황케 만들었고.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작품이 좋으면 들어가고, 아니면 들어가지 말고.”

최서빈의 한마디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얼얼해졌다.

너무나도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그 작품의 감독은 누구냐, 그 급은 어떠냐.

혹은 출연료나 네가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색깔은 괜찮은 것이냐.

그 작품 이후에 주연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냐는 등.

내가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했던 종류가 아니라, 그저 작품이 어떠냐를 물어볼 줄이야.

조금 전에 마신 쓴 알코올이 몸에 흡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말짱해졌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작품은 좋습니다.”

“그럼 뭘 고민해. 해야지.”

“…….”

최서빈의 연이은 대답까지, 내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최서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희성이 네가 기성 배우였다면, 솔직히 고민해 보라고 했을 거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넌 신인이잖아. 이제 막 이름도 알리기 시작했고,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시기잖아. 그럴 때는 작품이 좋다면 무조건 해야지.”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그의 말을 새기기 위해 곧은 자세로 경청했고.

최서빈 역시 진중한 자세로 내게 조언을 이어갔다.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꼭 해. 작품을 하면서 배우는 게 굉장히 많거든.”

나는 입술을 말아 넣은 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고.

최서빈이 내게 물었다.

“근데 무슨 작품인데?”

“강준수 감독님의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라는 작품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서빈은 눈썹을 들썩였다.

“아, 그거 나도 읽었어.”

“…정말요?”

“어, 나오는 모든 대본은 다 읽어보거든.”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탄성을 쏟아냈다.

톱스타인 최서빈의 자리라면, 대본을 굳이 찾아서 읽지 않아도 된다.

그에게 알아서 캐스팅이 쏟아지고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그런 그가 나오는 모든 대본을 먼저 찾아 읽는다는 사실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경력이 오래되었다고, 많은 작품을 했다고 ‘톱스타’라는 타이틀을 거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저 정도 위치에서도 그런 노력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사실은 후배인 내게 아주 큰 자극이 되었다.

그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내던 그때.

최서빈은 술잔을 입에 털어 부었고,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작품이 좋다면,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이 꼭 해.”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빈 잔을 채웠고.

최서빈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흥행하든 실패하든, 작품이 좋으면 네가 배울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을 거야.”

“…감사합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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