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19 – 정해진 정답은 없다 (2)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주연이 아닌, 조연을 택해야 한다.
최근 드라마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었다.
그것도 드라마 미니시리즈의 첫 주연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조연으로 작품에 들어간다는 건, 예전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조연 출연의 의미와 같지 않다.
이미 한 계단을 오른 내게, 다시 한 칸 아래로 가야 한다는 뜻이지.
즉,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
그건 말처럼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이미 나는 주연급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다시 조연급으로 가야 한다는 게.
그 작품 하나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배우 생활에서 내 입지가 다시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 단순히 오케이를 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을 포기하는 것조차 쉽지는 않았다.
우선 대본이 너무 좋았다.
작품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고, 몰입력이 상당했다.
기승전결이 완벽하고 탄탄한 작품.
더군다나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처음으로 관련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좀비 꿈.
물론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는 특별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꿈들은 ‘나의 전생’이라고 생각했다.
1만 년 동안 살아온 나의 전생, 그러니까 내 과거였지.
하지만 이번 꿈은 그 전생이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좀비라는 존재가 과거에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지.
어느 역사에도 좀비라는 생물체가 존재한 적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 전화를 열어 검색했지만, 가설과 허상들이 즐비할 뿐, 팩트는 없었다.
더군다나 처음 좀비 꿈을 꾸었을 때, 나는 차에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에서는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지.
그렇다면, 그 꿈에서의 시대 배경은 라디오라는 것이 존재하고, 자동차가 있는 시절이라는 뜻.
하지만 차가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당연히 좀비가 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게 내가 겪었던 과거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마음에 지금까지의 모든 규칙과 가설을 머릿속에서 초기화시켰다.
대체 꿈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내 전생, 과거 이 모든 것은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지?
지이잉.
김 실장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나와 통화를 마무리했고.
조금 후에 마무리가 되었는지 다시금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어, 희성아. 미안.
“괜찮아. 통화 끝났어?”
-응, 아무튼 우리 그 작품에 출연하려면 조연밖에 안 될 것 같아. 다시 요청은 해볼게.
“아니야. 형이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안 된다고 했으면, 내가 출연하려면 무조건 조연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겠지.”
-어떻게 할까?
나는 한숨을 삼키며 그에게 답했다.
“형, 나 조금만 생각해볼게.”
-그래, 충분히 생각해보고 결정해도 돼.
“알겠어.”
***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한 회사.
나는 김 실장에게 인사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형, 새로 온 대본들 더 있나?”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럼. 안 그래도 미리 챙겨뒀어. 근데 며칠 전에 다 봐버려서, 많지는 않아.”
“괜찮아. 새로 온 것만 몇 개 더 볼래.”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그래. 안에 들어가 있으면, 챙겨서 갈게.”
나는 김 실장을 뒤로하고 연습실로 향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가 대본을 한 아름 들고 들어왔다.
“대본 한번 봐봐. 나는 오전에 회의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김 실장은 그렇게 내게 대본을 전달한 뒤, 다시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연습실.
의자를 끌어당겨 곧은 자세로 첫 번째 대본부터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끄는 부분도, 좀비가 나오는 비슷한 장면조차 없었다.
서둘러 대본을 옆으로 넘긴 후.
다음 대본을 집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대본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힐 때쯤.
똑똑.
김 실장이 노크를 하며 연습실로 들어왔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형, 왔어?”
그는 내 앞에 자리를 잡으며,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재차 내게 질문을 던졌다.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이야?”
나는 대본을 빤히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그냥 고민….”
김 실장은 내가 걱정이 되는지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다른 배우 촬영장이나 놀러 가볼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러?”
“응, 항상 촬영만 하러 갔잖아. 다른 배우 연기하는 것도 구경하고, 그러면서 얻는 것도 생길 거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꽤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가보지 뭐.”
내가 동의하자, 김 실장이 밝은 얼굴로 눈썹을 들썩였다.
“그럼 누구네 촬영장 가볼까?”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아무 데나 상관없어.”
김 실장은 내 말에 휴대 전화를 열었고, 스케줄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그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나는 테이블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백영훈만 아니면 돼.”
“하하, 알겠어. 거기는 나도 별로야.”
김 실장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손짓했다.
“갈 곳 생각났다. 가자, 희성아.”
***
끼이익.
나를 태운 차는 경기도의 한 세트장에 도착했다.
“희성아, 다 왔다.”
“형, 여기는 어떤 촬영장이야?”
김 실장을 향해 물었고.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잠겼던 차 문을 열었다.
“내려봐. 소개해줄게.”
김 실장을 믿기에 굳이 그에게 재차 묻지 않은 채.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김 실장과 함께 커다란 세트장으로 들어갔고, 한창 촬영 중인 이곳은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오케이, 컷!”
안쪽에서 들리는 감독의 컷 소리에 곧장 이곳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쉬었다가 다음 신 갈게요.”
가득 깔려 있는 조명, 수많은 스태프.
그리고 여러 배우들과 매니저까지.
김 실장은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어, 김 실장 왔어?”
그때, 팔을 뻗어 김 실장을 밝게 부르는 사람.
김 실장은 그의 부름에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응, 촬영은?”
“쉬었다가 가기로 했어. 아, 희성 배우님 오셨네요.”
김 실장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희성아, 여기는 나랑 친한 매니저, 박동훈 실장.”
“아, 안녕하세요. 박 실장님.”
그때 박 실장의 뒤로 다가오는 남성.
“어?”
나는 그를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임상현 배우였다.
HS 엔터의 배우로, 주연급에 자리 잡은 배우 중 한 명.
톱 배우인 최서빈의 라이벌로 불리는 많은 배우들 중 하나이다.
내가 최서빈과 친한 사이라고 해서, 그의 라이벌로 불리는 임상현과 굳이 친분을 차단할 일은 없다.
내가 뭐 누구 라인을 타는 것도 아니고.
친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
더군다나 같은 회사의 선배였기에, 나 역시 그와 친분을 쌓아두면 좋을 터.
임상현은 박 실장의 옆으로 다가와 김 실장과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까 박 실장님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김 실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상현 씨. 오랜만이에요. 희성이 소개도 해주고, 촬영장 구경도 오고 싶어서요. 하하.”
김 실장은 밝게 웃으며 답했고.
나는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그는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희성 씨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반가워요.”
임상현은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연예계 생활도, 회사도 제가 후배인데요.”
내 말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 답했다.
“그럼… 그럴까?”
“넵.”
임상현, 박 실장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은 다음 촬영을 위해 자리를 이동했고.
현장에 남은 김 실장과 나는 그의 연기를 보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이야, 임상현 선배 실제로 보니까 진짜 잘생기셨다.”
조금 전 보았던 임상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감탄을 쏟아내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최서빈 라이벌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 상현 씨가 잘생긴 거로 유명하잖냐.”
그러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내 쪽으로 다가와 작게 읊조렸다.
“그래도 최서빈을 따라가려면, 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최서빈이 정점을 찍은 톱 배우였고.
항상 그의 라이벌, 최서빈을 쫓을 배우라는 기사들만 수두룩했을 뿐.
최서빈과 어깨를 나란히 할 배우는 많지 않았다.
임상현 역시 그에게 닿기 위해 열심히 오르는 배우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니까.
촬영이 시작되기에 앞서, 현장은 분주해지기 시작했고.
나와 김 실장은 곧장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촬영에 집중했다.
“레디, 액션!”
감독의 목소리는 메가폰을 넘어 현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곳.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현장을 넓게 바라보았다.
감독의 시야가 향하는 곳에는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고 있었고.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
환하게 빛을 내고 있는 조명.
이 모든 것들은 배우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비들 뒤에는 몇 명, 아니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붙어 있었다.
누구 하나 대충이라는 것 없이, 미간에 온갖 힘을 준 채 배우들만큼이나 집중하고 있었고.
그들의 표정과 열정에 내 팔에는 절로 소름이 돋아났다.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스태프가 현장에 존재하고, 촬영에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배우로 촬영할 때는 다음 신이나 다른 신의 배우들의 감정선을 파악하기 위해 집중했다.
내가 촬영하지 않을 때도 계속 몰입해서 연기를 보느라, 내 시선은 배우들에게만 집중되었지.
그 연기에 몰입한 스태프들이나 감독을 바라보며 하지는 못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내가 출연하는 작품이 아니기에, 평소와 다른 시선으로 현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자 늘 보던 그림과는 다른 것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 것이지.
뜨거운 조명 뒤에서 땀을 닦는 조명 감독.
커다란 헤드폰을 쓴 채, 작은 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한 음향 감독.
카메라로 최고의 장면을 담는 카메라 감독과 직접 발로 뛰는 스태프들까지.
이들의 땀과 노력이 있기에, 완벽한 장면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작품은 오로지 배우의 연기로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 감독, 카메라, 조명 외에도.
소품을 다루는 스태프들과 카메라에 담기는 작은 디테일조차 신경 쓰는 스태프들까지.
이 많은 인원이 카메라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였기에, ‘작품’이라는 게 완성될 수 있을 테니까.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유일하게 카메라에 얼굴이 비치는 배우.
그러니까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내 연기력으로 인해, 이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되니까.
“컷! 좋았는데, 완벽하게 한 번 더 가볼게요!”
감독의 커다란 외침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빨리… 다음 연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희성아, 현장이 다 똑같지만 그래도 보면서 배울 점이 있었으면….”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형, 데려와줘서 고마워. 배울 점 진짜 많아.”
“그래?”
김 실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옮겼고.
그 시선 끝에는 여러 명의 스태프들.
그리고 그 사이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
쟤가 왜 여기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