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5)화 (15/303)

15화 #4 – 라이벌 (3)

“여기는 언제 올라와도 좋은 것 같아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렇지. 정원 테라스가 우리 회사의 자랑거리 중 하나잖냐. 나도 여기만 올라오면 속이 뻥 뚫리더라고.”

김 실장은 가슴을 쫙 펴고 스트레칭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조금 쉬었다가 내려가서 연습하자.”

띠리리.

그때 울리는 김 실장의 휴대 전화.

그는 내게 화면을 보여주며 전화를 받았다.

“예, 박 팀장님. 저 지금 테라스 올라와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통화 내용을 들으니 박 팀장에게 호출을 받은 모양이다.

그는 전화를 끊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희성아, 천천히 쉬고 연습실에 가 있어. 난 팀장님 좀 뵙고 갈게.”

“응, 가서 연습하고 있을게.”

김 실장이 자리를 비우고 혼자 남은 정원 테라스.

나는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로에 가득한 자동차들과 높은 건물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한강까지.

처음 HS 엔터에 왔을 때, 이 정원 테라스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이런 곳에 소속되어 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까?

결국, 내가 꿈꾸던 자리에 서 있었다.

회색빛이 가득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지만, 그저 이 광경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불빛.

바로 이곳에서 보이는 전광판이다.

저렇게 큰 전광판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단숨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기에 걸리려면 광고비가 대체 얼마야.

아니, 저기에 얼굴이 나오는 사람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일까?

그때, 전광판의 화면이 바뀌며 나오는 사람.

바로 ‘최서빈’이었다.

최서빈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명한 배우다.

톱 중의 톱 급이지.

연기면 연기, 얼굴이면 얼굴.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배우.

역시 저 정도는 되어야 전광판에 얼굴이 나올 수 있구나?

단번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참 잘생기기는 했다.

전광판에 나오는 최서빈의 얼굴을 보며 감탄하던 그때.

지이잉.

주머니 속에서 우렁차게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 연극 영화과 이명진]

“여보세요.”

-희성아, 나다, 명진이.

“그럼 알지. 오랜만이다.”

-뭐 해, 잘 지내?

“응, 나야 잘 지내지. 오랜만에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 주고?”

-동창회 때문에 전화했어. 지금 애들한테 전화 돌리고 있거든.

“아… 동창회. 언젠데?”

-여유 있어. 다음 달 말 정도에 하려고. 올 수 있지?

“다음 달 말이라, 시간 보고 가능하면 갈게.”

-야, 진희성. 너 요즘 안 바쁘잖아. 튕기지 말고 와라.

“나 바빠, 인마.”

-너 그냥 편의점 알바하잖냐. 하루만 대타 구해서 이번에는 꼭 와.

몇 달 전, 하필이면 이명진이 내가 일하는 편의점에 들러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굳이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니, 알릴 필요가 없었지.

“그거 아니어도 할 일이 많다.”

-왜 요즘 그거 말고 또 다른 알바해?

단막극에 들어간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구태여 내 입으로 HS 엔터에 들어왔다, 곧 드라마 촬영에 들어갈 것이다, 자랑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직접 보여주고 증명하고 싶었다.

이명진을 포함해 내 주변인들이 스스로 나를 알아보고 감탄하기를 원했다.

“뭐… 그런 게 있어.”

-그래, 여하튼 올 수 있으면 꼭 와라!

“알았어.”

적당히 그와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연습실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테라스 입구 문이 열렸다.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본부장이었다.

“명진아, 동창회 잡히면 연락 줘. 먼저 끊을게!”

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 재빨리 전화를 마무리했다.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내 인사에 환하게 웃는 본부장.

여기에 혼자 바람을 쐬러 온 건가?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곧장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

조금 전, 전광판에서만 보던 배우 최서빈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에도 느껴지는 아우라.

방금 전광판에서 본 것이 전부임에도 반가운 마음에 나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내 인사에 놀라기는커녕,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주장이 강한 이목구비인데, 어쩜 저렇게 온화하게 생겼지?

아니, 근데 잠깐만.

항간에 도는 말로는 최서빈이 계약 만료가 다 되어간다고 듣기는 했는데….

설마 우리 회사에 오는 건가?

“서빈 씨, 여기가 정원 테라스인데….”

회사에서 높은 직책인 본부장이 최서빈을 향해 미소 지으며 깍듯하게 대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편해하지 않고 여유롭게 본부장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

더욱더 최서빈이 대단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언젠가 최서빈 같은 배우가 될 수 있겠지?

***

최서빈을 보고 연습실로 내려오자마자 대본을 집어 들었다.

그를 보고 나니 조금 더 의지가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연습도 실전처럼,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138억 년 전, 빅뱅은….”

시침이 한 바퀴를 돌았고, 대본 한 권을 다 읽을 무렵.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꿈’에 대한 기억이었다.

대체 그때 꿨던 꿈은 뭐였을까?

실제로 겪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생생하던 그 꿈.

그리고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천문학에 대해 공부하려고 인터넷을 찾은 적이 있었다.

천문학이라면 전혀 무지하던 내가, 꿈을 꾼 이후로는 마치 전공을 한 사람처럼 모조리 이해가 되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꿈에서 보았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천문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나는 현재 나이보다 많은 것 같았는데….

즉, 내가 겪었던 일일 수가 없는 것이지.

하지만 그때 보았던 장면, 내뱉던 말들, 상황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단순히 꿈이 아닌 나의 전생 기억을 찾은 듯한 느낌?

순간 내 상상력에 실소를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현실이 영화나 드라마도 아니고 무슨.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대본을 숙지하는 게 급선무다.

다시금 대본에 집중했고.

연습에 몰두한 지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지이잉.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 전화 진동에 몰입이 깨지고 말았다.

[발신인: 어머니]

역할 속 인물의 목소리를 빼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고는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흠흠, 여보세요?”

-바쁘지, 아들. 통화 가능해?

“당연하지. 바빠도 엄마 전화 받을 시간은 있지.”

-밥은 먹었고?

“어, 먹었지. 엄마는?”

-나도. 통 연락이 없길래,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해봤어. 잘 지내지?

“응, 엄마 나 곧 TV에 나올 거야.”

-…정말?

어머니는 내 말에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이지.”

-얼굴 많이 나오는 건가?

어머니의 목소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관심이 있는 듯한 말투였다.

사실 부모님 두 분 모두 어마어마하게 배우의 길을 반대하셨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대학교 진학 시절부터였지.

연극 영화과에 가면 밥이나 먹고 살겠냐는 둥.

아들이 딴따라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둥.

하지만 부모님은 누구보다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었다.

아마 반대를 하셨던 속뜻은 내가 힘들게 살까 봐 걱정의 마음이었을 테지만, 그 당시에는 나를 믿어주지 않고 그저 반대만 하는 게 속상했다.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건, 부모님께 내 연기를 보여드리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붙였다.

-아들, 하다가 힘들면 언제든지 내려와.

“…응.”

내려가겠다는 뜻으로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하는 통화에서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을 뿐.

“농사는 잘되고 있죠?”

-항상 똑같지. 올해 날씨 운이 잘 따라줘서 블루베리가 잘 자라야 할 텐데 말이다.

“너무 고생하지 마시고, 쉬엄쉬엄 일해.”

-그래, 아들. 엄마, 아빠 걱정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그럴게. 엄마, 나 이제 대본 연습 좀 해야겠다. 또 연락할게요.”

-응, 파이팅하고 아들!

전화를 끊자 다시 의지가 샘솟았다.

이번 단막극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부모님께 선보이는 첫 번째 증명이 될 테니까.

***

KTS 방송국 회의실.

문 앞에는 ‘별을 보지 않아 – 대본 리딩’이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그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일찍 도착한 탓에, 회의실에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없었다.

처음으로 참석한 대본 리딩.

보통 드라마 미니시리즈는 짧은 단역 배우를 제외하고는 수십 명이 모여 인사도 나누고 대본을 맞춰 본다.

하지만 이번 같은 단막극은 출연진의 수가 적어 장소를 따로 대여하는 대신에 오늘처럼 방송국 회의실에서 간단하게 모여 대본 리딩을 하는 것이다.

회의실 책상 각 자리에는 종이에 출력해 만든 이름표가 올려져 있었다.

주연 중 하나인 내 자리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

대본 리딩치고는 꽤 작은 규모였지만, 그래도 내 인생의 첫 대본 리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희성’ 이름을 확인 후 자리에 앉으니 심장이 더욱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며 이곳에 적응하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박 감독과 작가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접었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입니다!”

“희성 씨, 반가워요. 일찍 왔네.”

작가는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뽑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인사.

진심이었다.

이 마음이 전해졌는지, 박 감독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희성 씨가 연기를 잘해서 뽑은 거죠. 드라마 잘 부탁해요.”

“믿고 뽑아주신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를 캐스팅해 주신 걸, 후회하지 않도록 잘하겠습니다!”

“하하, 그래요. 우리 한번 같이 열심히 해봐요.”

우리의 인사가 끝나자 속속들이 들어오는 배우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반가워요.”

처음 보는 배우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며, 각자 자리로 이동했다.

곧 다시 회의실의 문이 열렸고, 들어오는 또 다른 주연.

여자 주연을 맡은 배우였다.

내 인생의 첫 주연 파트너.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장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어?

잠깐만.

저 사람… 이번에 내 꿈에 나왔던 그 여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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