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6)화 (16/303)

16화 #4 – 꿈에서 본 그녀 (1)

한소정.

찰랑이는 굵은 긴 웨이브 머리에 차가운 눈동자.

굵은 쌍꺼풀 덕에 큰 눈망울과 기다란 속눈썹.

높은 콧대와 한쪽 볼에만 있는 깊은 보조개까지.

분명 꿈에서 봤던 그 여자다.

대체 뭐지?

꿈에서 봤던 그 학생은 20살에 풋풋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순수하고 맑은 모습.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한소정은 20살이 아닌,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다.

나이가 꽤 달라 보이지는 않지만, 외적으로 봤을 때는 화장 탓이 큰 것 같았다.

피부 화장부터 눈 화장까지, 짙게 들어가 있는 연예인 풀 메이크업.

더불어 옷 스타일 역시 꿈에서 본 그녀와는 달랐다.

인상이나 스타일은 확 바뀌었지만, 외모가 똑같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체 뭘까?

직접 한소정을 눈으로 보고 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지몽처럼 한소정과의 만남을 알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지난번 ‘황꽃’을 찍을 때, 꿈에서 보았던 공주는 송유나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송유나와 비슷하기는커녕, 누가 봐도 전혀 다른 얼굴이었지.

대체 꿈과 현실.

어떤 관계가 있는 거지?

머릿속에는 온통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때, 김 실장이 나를 툭 치며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희성아?”

김 실장의 목소리에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소정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인사를 보냈지만, 생각에 잠겨 못 들었던 모양이다.

“앗, 안녕하세요.”

“한소정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저는 진희성입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그녀는 옅은 미소를 보내고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착석했다.

간단한 인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느껴진다는 것을.

한소정은 굉장히 차갑고 도도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여대생은 말괄량이에 활발하고 젊은 패기가 가득한 느낌이었다면.

현실의 그녀는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했다.

황꽃의 송유나 역시 차가운 스타일이지만.

송유나는 까칠하고 도도한 반면, 한소정은 조금 범접하기 어려운 차가움이랄까?

그때, 박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외쳤다.

“자자, 그럼 다 모인 것 같으니까. 숨 좀 고르시고, 10분 뒤에 대본 리딩 시작해 보겠습니다!”

“네.”

곧장 매니저들이 자신의 배우에게 다가가 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시선은 여전히 한소정에게 머물렀다.

혹시 내가 상대 배역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것인가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니저에게 대하는 태도도, 내가 아닌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눌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저렇게 차가운 에너지를 뿜어내는 걸까?

***

조용해진 회의실.

대본 리딩을 하기 위해 이곳에 앉아 있는 배우들은 배역에 몰입하기 바빴다.

나 역시 눈을 지그시 감고 맡은 배역을 생각하며 집중했다.

처음 하는 대본 리딩이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떨리는 마음까지는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시작된 대본 리딩.

첫 대사는 한소정의 목소리로 시작됐다.

“너네도 그 수업 신청했어? 와, 잘됐다. 나도 그 수업 듣고 싶어서 수강 신청 때, PC방까지 갔잖아.”

놀라웠다.

한소정은 언제 냉기를 뿜었냐는 듯 대본에 나온 맹랑하고 얄궂은 여대생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역시 배우는 배우였다.

목소리뿐 아니라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고.

마치 꿈에서 보았던 그 여대생이 현실 세계로 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의 신이 지나가고, 박 감독은 흐뭇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다음 뒷장에 수업하는 신 시작해 볼게요.”

배우들은 페이지를 넘기며 호흡을 정리했다.

그리고 시작된 내 대사.

대본을 달달 외워온 덕에 고개를 들고 모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학생이 말한 대로, 스티븐 킴이 이 논문을 발표하며 말하려 했던 바에 의하면 천문학은 그렇게 정의할 수 없어요. 제가 질문을 해보죠.”

검지를 허공에 휘저으며 말하자, 박 감독과 작가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빅뱅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대사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꿈속의 장면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날 꿈에서 내가 강의를 하던 모습.

천문학밖에 모르고 살던 그 자신감이 넘치던 얼굴.

마치 지금 나와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 아니었다.

황꽃 드라마를 촬영할 때 역시, 문득문득 꿈의 장면이 떠오르며 강하게 몰입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이번 드라마가 황꽃 때보다 더 강한 몰입감이 느껴진다는 것.

그것만이 달랐다.

대체 왜 그런 거지?

이번 드라마가 주연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내뱉는 대사가 훨씬 많아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건가….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는 현재 배역을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긴 했다.

꿈 덕에 배역 그대로를 느낄 수 있으니까.

꿈속에서 보았던 그 캐릭터와 대본을 읽는 내가 겹쳐지는 느낌.

이런 몰입감을 박 감독도 느꼈는지 내 한마디와 표정, 손짓에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와, 희성 씨 연기 너무 좋다. 나도 모르게 천문학 수업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어.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 뒤에 장면으로 바로 넘어가 볼까요?”

“네.”

“그 대사는 조금 당기듯이 한번 해봐줄래요?”

그의 주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집중했다.

“오늘 수업에서는 흥미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외계인.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걸 묻고 싶은가요? 저는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요. 좋아요, 거기 뒤에 학생?”

***

대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연이은 박수로 끝난 내 인생 첫 번째 대본 리딩.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를 바라보니 시침은 숫자 8을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버렸다.

밖을 바라보니, 해는커녕 어둠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박 감독이 입을 열었다.

“추가 일정은 각자 소속사로 전달해 드릴게요. 오늘 고생 많았고, 배우분들 모두 푹 쉬면서 컨디션 조절하셨다가 우리는 촬영장에서 봅시다.”

그의 말에 작가가 답했다.

“고생하셨어요, 감독님. 배우분들도 오늘 정말 연기하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저는 앞으로 현장에서 매번 뵐 수는 없겠지만, 제가 쓴 대본으로 좋은 연기 보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박수를 받으며 곧장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박 감독과 스태프들이 먼저 자리를 비웠고, 배우들은 물을 마시거나 굳었던 몸을 풀며 주변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저… 오늘 연기 대단하셨어요.”

내게 다가오는 인물은 이번에 조연을 맡은 배우 백승현이었다.

“감사해요. 승현 씨도 연기 잘하시던데요. 오늘 고생하셨어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 이제 스물두 살이라서요.”

“아, 그럴까요?”

“네, 그리고 괜찮으시면 번호 좀 교환할 수 있을까요?”

백승현은 수줍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높은 콧대에 아래로 처진 눈.

첫인상에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그의 휴대 전화를 받아 번호를 찍었다.

“거기로 문자 남겨줘. 나도 저장할게.”

“네!”

“오늘 다들 바쁜가? 앞으로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날이 없을 것 같은데. 이 기회에 간단하게 오늘 저녁 어때요?”

딱 봐도 맏형 같은 40대 중반의 배우.

그가 큰 목소리로 제안했다.

“좋아요!”

“저도 갈래요.”

여러 명이 동시에 답했고,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저도 가능합니다. 가시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 사람.

한소정이었다.

우리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아닌 매니저가 대신 입을 열었다.

“어쩌죠? 저희가 내일 새벽에 지방에서 추가 촬영 일정이 있어서요.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해서 소정이는 참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소정은 아무 표정도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고, 모두 매니저의 말에 답했다.

“예, 어쩔 수 없죠.”

“그럼 현장에서 봬요, 소정 씨.”

“죄송해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한소정은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희성이 형, 오늘 재밌었어요. 연락드릴게요!”

백승현은 볼이 발그레해진 채로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승현아. 곧 보자.”

“네, 형. 매니저님 오신 거 같은데?”

우리 앞에 멈춰 서는 차.

김 실장이었다.

“어, 나 먼저 갈게. 조심히 들어가.”

“예, 가세요.”

백승현은 차에 올라타는 나를 보며 허리를 접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예의 있고 붙임성이 좋은 듯 보였다.

“형, 피곤하지?”

차에 올라타 김 실장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밥도 열심히 먹었겠다, 피곤할 리가 있나.”

신호에 걸리자 김 실장이 운전석에서 몸을 돌리며 내게 물었다.

“어때, 사람들이랑 좀 가까워졌어?”

“어, 인원수가 적어서 그런지 다들 말도 많이 하고 친해진 것 같아.”

“다행이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한강.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아까 돌아간 한소정이 떠올랐다.

“형, 아까 걔는 어디 엔터야?”

“누구?”

“한소정. 아까 그 여자 배우 말이야.”

“OA 엔터.”

“OA 엔터?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김 실장이 공감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 신생이래. 나도 아까 매니저들이랑 이야기해 봤는데, 정보가 거의 없더라고.”

“정보도 없어? 완전 신생인가 보네.”

둘밖에 없는 차 안이었지만, 김 실장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응, 근데 거기가 소문이 좀 좋지는 않더라고.”

“무슨 소문?”

“OA 엔터 대표가 다른 업계 출신인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질이 꽤 나쁜 곳에 있었다고 하더라고.”

질이 나쁜 곳이라….

“근데 오늘 추가 촬영 스케줄도 있는 거 보면, 꽤 잘나가나 봐? 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거든.”

“뭐 미니시리즈 단역이라고 하던데? 근데 그 드라마 주연이 교통사고가 나서 원래 저번 주가 크랭크업이었는데, 이번 주까지 추가로 바뀌었나 봐.”

“그래서 추가 촬영을 하는 거구나?”

“그런가 봐. 한소정이 회식에 빠진 게 좀 걸렸나 보네?”

“조금? 상대역이니까 촬영 전에 어느 정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지.”

내 마음을 알았는지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내가 홍보팀 들러서 물어보고, 뭐라고 나오면 알려줄게.”

“알겠어, 고마워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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