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4 – 라이벌 (2)
드르륵.
오디션장 앞에 대기하고 있는 차.
그 차에 올라타자마자 긴장감이 풀려, 의자에 몸을 푸욱 기대었다.
“희성아, 잘했어?”
혹시나 실수라도 했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아닌,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김 실장은 내가 오디션에서 실수를 하거나, 잘못 보았을 거라는 일말의 걱정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준비한 대로 하기는 했는데….”
“그럼 잘했겠네! 고생했다, 우선 출발할게.”
“응.”
차는 곧장 오디션장 건물을 빠져나갔고,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나는 입을 열었다.
“형도 봤지? 박민준.”
“어, 너 나오기 전에 차 타는 거 봤어. 왜?”
“박민준, 그 자식 때문에 좀 걱정이네.”
김 실장이 내 말에 탄성을 내지르며 답했다.
“박민준 때문에?”
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희성아, 네가 박민준보다 훨씬 연기를 잘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에이, 형은 나 연기하는 거 못 봤잖아.”
“다 봤어, 인마.”
김 실장은 백미러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어떻게?”
“오늘 오디션은 못 봤지만, 너 매니저로 오기 전에 네 작품을 다 봤지.”
“내 작품?”
“응, 단역으로 출연했던 작품들.”
“아….”
“그것뿐이겠냐. 너 오디션 볼 때, 카메라 테스트하던 영상들까지 전부 봤다.”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 담당 매니저로 배정받을 때 어느 정도 연기를 봤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워낙 단역으로만 출연했기에 봐봤자 최근 작품인 ‘황꽃’ 정도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디션 영상까지 모두 봤을 줄이야.
역시 대형 기획사는 소속 배우 케어가 남다르다.
“아무튼, 연기 보고 감탄했어. 너 연기 진짜 잘하니까 다른 배우들이랑 비교할 거 없어.”
그의 말이 진실이든,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려는 말이든.
걱정하던 마음이 사그라든 것은 사실이다.
“고마워, 형.”
“고마울 것도 많다.”
김 실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맞다!”
그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오디션 결과는 다음 주 정도에 나온다고 하더라.”
“그래? 통보가 좀 늦네.”
보통 단역 배우 캐스팅이나 단막극 같은 짧은 드라마는 결과가 빨리 나오는 편이다.
심지어 오디션이 끝나는 당일에 배역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생각하면 이미 결정이 났을 수도 있을 터.
김 실장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배역 결정은 일찍 나더라도 높은 양반들이 카드 쥐고 있는 걸 좋아하잖냐.”
나는 그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도 다음 주에는 나올 거야. 나오면 바로 공유해줄 테니까, 내일부터 대본 연습하고 있어.”
“알겠어.”
내가 캐스팅이 됐을 거라 확신하는 김 실장 덕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 비교하며 기죽지 말자.
나를 믿는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
“희성아, 왔어?”
“네, 형.”
흰색 면 티에 검정 반바지.
일반 운동복 차림임에도 성난 근육들이 눈에 들어오는 PT 트레이너가 나를 반겼다.
“희성이 너는 하루도 안 빠지고 오니까, 좋다.”
회사 안에 있는 헬스장.
소속 연예인들을 따로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헬스장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지 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쉴 새 없는 스케줄로 인해 헬스장에 올 수가 없는 거겠지.
나는 아직 마땅한 스케줄이 없었기에, 틈이 날 때마다 헬스장을 찾아왔다.
나 역시 바빠지게 되면 PT를 받을 시간이 없을 터.
할 수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둬야 한다.
매일 빠지지 않고 하다 보니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고, 더불어 자연스레 트레이너와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하, 배역 생기기 전까지 열심히 해야죠.”
그는 내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너처럼 열심히 와줘야 나도 몸 만들어주는 맛이 난다니까. 오늘도 밥은 샐러드 대신 구내식당으로 갈 거지?”
“네, 아직 스케줄이 따로 없어서 괜찮을 것 같아요.”
몸을 만들기 위해 식단 조절을 할 때 먹는 샐러드와 닭 가슴살.
원한다면 그 식단을 받을 수 있지만, 아직 드라마가 잡힌 것이 없었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다이어트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트레이너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홍보팀에서 들었는데, 희성이 너 곧 드라마 들어갈 거라고 하던데?”
아직 결정이 된 것도 아닌데, 홍보팀에서 확신을 가지고 트레이너에게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아니에요. 오디션만 본 건데, 홍보팀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이야기했나 봐요.”
“에이, 홍보팀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곧 들어가겠던데? 희성이 드라마 들어간다고 하면, 내가 식단표 좀 짜놔야겠다.”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저 오늘도 유산소부터 시작하면 되죠?”
“응, 우선 러닝머신 좀 뛰고 있어. 곧 갈게.”
“넵.”
러닝머신 앞 모니터에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모니터링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 아닌가.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드라마에 한창 집중하고 있던 그때.
틱.
갑자기 멈춘 드라마와 동시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멈춰버린 화면 때문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드라마를 일시 정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매니저 김 실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양 무릎에 손을 얹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매우 급히 달려온 듯했다.
나는 재빨리 달리던 러닝머신 속도를 낮췄다.
“무슨 일 있어?”
그리고 천천히 러닝머신 위를 걸으며 대수롭지 않게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김 실장이 가득 찬 숨을 겨우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너…!”
이어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귀에서 빠질세라 꽉 꽂아둔 탓에 그의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어?”
한 손으로 이어폰을 빼내며 그에게 되묻자, 김 실장은 침을 한번 삼킨 뒤 소리쳤다.
“너 배역 따냈다고. 주연 됐다고, 인마!”
“뭐라고?”
놀란 마음에 달리던 러닝머신에서 넘어질 듯 평지로 떨어졌다.
“괜찮아?”
넘어질 뻔한 나를 보며 김 실장이 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일으켰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진짜 된 거야?”
“그래, 진짜 됐다고. 너 첫 주연이야.”
“와악!”
나는 헬스장이 울리도록 소리쳤다.
김 실장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데시벨을 높였다.
“거봐, 형이 뭐랬어. 너 연기 잘해서 될 거라고 했잖아. 박민준이 아니라, 진희성 네가 된 거야.”
짜릿했다.
그 순간 온몸이 전율에 휩싸였다.
박민준이 아니라, 내가 배역을 따냈다니.
필모도 없던 단역 배우인 내가, 유명한 박민준을 제쳤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첫 주연이 됐다는 것.
러닝머신 위에서 뛴 것보다도 지금 이 순간, 가장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
“천문학적으로는 그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게 말이죠.”
박민준은 ‘별을 보지 않아’ 대본을 들고 제자리에 서서 대사를 외쳤다.
그는 자신의 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벌컥벌컥 물을 마시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아아, 천문학적으로는 그게 말이 안 되는….”
벌컥.
노크 없는 문 열림에 박민준의 연기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민준아!”
“형, 나 지금 연습하고 있잖아.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고!”
그의 예민한 반응에 매니저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빠르게 박민준이 들고 있는 대본을 살폈다.
“미안, 급해서. 너 혹시 ‘별을 보지 않아’ 대본 보고 있는 거야?”
“어, 보면 몰라? 이번 주에 발표라며. 단막극이라 촬영도 곧 시작할 거 아니야.”
매니저는 자신의 뒤쪽으로 살짝 열린 문을 꽉 닫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민준아, 우리 다른 드라마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
“뭔 소리야?”
순간 박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말했잖아. 박 감독님 Gen 스튜디오 이직 때문에 이 작품을 꼭 해야 한다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형, 지금 단막극이 중요한 게 아니야.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제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좀 봐!”
박민준의 큰 소리에 매니저는 눈을 피하며 답했다.
“그렇긴 한데… 그 드라마 주연. 우리 떨어졌대.”
“뭐?”
“우리 안 됐다고.”
박민준은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누가 됐는데?”
“…진희성.”
그의 말에 연습실은 일시 정지를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일그러진 박민준의 얼굴.
“이런 씨X….”
그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게 말이 돼?”
“…….”
박민준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새끼보다 못한 게 뭐라고. 대학 때부터 어떻게 한번을 안 빠지고 눈엣가시일 수가 있지?”
매니저는 애써 미소 지으며 박민준을 향해 말했다.
“민준아, 좋게 생각하자. 단막극이라 필모 없는 진희성이 된 걸 거야. 그리고 Gen 스튜디오에 박 감독 아니어도 좋은 작품은 많으니까….”
박민준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대본을 집어 던졌다.
“그놈의 진희성 이야기 좀 그만해!”
***
“학생이 말한 대로, 스티븐 킴이 이 논문을 발표하며 말하려 했던 바에 의하면….”
내 대사를 끊고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음… 나는 여기서 조금 더 화가 난 톤이면 좋겠어.”
“그래? 다시 해볼게.”
‘별을 보지 않아’의 대본 리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에서의 첫 주연.
대본 리딩에서 듣고 싶은 말보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었다.
‘왜 얘를 뽑았을까?’, ‘더 나은 애는 없었을까?’라는 캐스팅 후회의 말.
필모가 없는 상태로 내 연기를 믿고 뽑아준 것이기에,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한 줄의 대사가 완벽해질 때까지 연습하던 그때.
“희성아, 우리 조금 쉬었다가 할까?”
김 실장이 굳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된다.”
“응?”
“대본 리딩 말이야. 항상 단역만 맡아서 지금까지 가본 적이 없거든.”
내 말에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걱정되는 게 아니라 기대된다니까. 아니, 오히려 안심이 되는데?”
“그런가? 하하.”
“응, 넌 잘할 거야.”
“그나저나 형, 나 오늘 구내식당에서 들은 게 있는데, 우리 회사 이번에 어디 크게 투자했다며?”
“어, OTT 플랫폼. 거기 신규 회사 Citizen(시티즌)이라고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새로 론칭하나 보더라고. 거기에 투자했다더라.”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우리가 수혜를 좀 볼 수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그렇게 되려면… 알지?”
“응, 연기는 당연하고, 내 인지도도 올라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맞아. 이번 단막극 잘해내면, 인지도도 자연스레 오를 거야.”
나는 김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답했다.
“형, 다시 연습하자.”
나는 손을 뻗어 스트레칭을 한 뒤, 곧장 대본을 들었다.
“논문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따로 있죠. 예를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