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3)화 (13/303)

13화 #4 – 라이벌 (1)

“감사합니다!”

“예, 고생했어요.”

오디션을 본 배우는 감독과 작가를 향해 허리를 깊게 접었다.

“혹시 결과는 언제….”

“조만간 갈 겁니다. 저쪽으로 나가시면 돼요.”

“네.”

배우는 가벼운 목례를 보낸 뒤 오디션장을 빠져나갔다.

“하, 오랜만에 오디션 보니까 재밌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네요.”

“그러게요.”

박승현 감독은 작가에게 대답한 뒤, 반대쪽에 앉아 있는 캐스팅 디렉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들어보니까 대형 소속사에서 왔다는데, 어디 회사 누구야?”

“WG 엔터에 박민준 아시죠?”

박 감독이 박민준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걔 유명하잖아.”

“예, 박민준이랑 그리고 다른 애는 진희성… 이라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필모도 없어요.”

“어디 소속인데?”

“HS 엔터입니다.”

박 감독은 캐스팅 디렉터의 말에 빠르게 종이를 넘겨 프로필을 확인했다.

“그러네. HS 엔터 진희성…. 처음 들어보는데.”

“그래도 HS 엔터에 들어갈 정도면, 실력이나 외모는 어느 정도 확인된 거 아닐까요?”

그들의 대화에 작가는 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희성’이라는 이름을 종이에 써내려갔다.

“일단 한번 봐보자고.”

“예, 감독님.”

그렇게 몇 명의 오디션이 별 탈 없이 지나갔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안녕하십니까. 박민준이라고 합니다.”

박민준의 오디션 차례가 다가왔다.

짧은 단막극에 찾아온 대형 기획사 연예인.

이런 일이 흔한 경우는 아니기에, 박민준의 등장만으로도 오디션장의 흐름이 바뀌었다.

캐스팅 디렉터는 박민준을 바라보며 눈인사를 보냈다.

‘동네 슈퍼에 프리미엄 물건이 들어온 격이네. 분명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박 감독은 박민준의 인사가 끝나자 곧장 입을 열었다.

“예, 반가워요. 그럼 준비해온 연기부터 볼까요?”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박민준은 준비해온 연기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대형 기획사인 WG 엔터답게 안정적인 연기.

박민준은 카메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있다는 듯 시선 처리를 깔끔하게 소화했다.

감정선과의 호흡 역시 딱 떨어지는 교과서 같은 연기.

박 감독은 박민준의 연기에 펜대를 굴렸다.

‘크으, 역시 박민준. WG 엔터 이름값은 하네. 이래서 기획사, 기획사 하는 거지.’

하지만 박 감독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준비해온 연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박민준이 허리를 접어 인사하자, 앞에 앉은 세 명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여기는 왜 왔어요?”

박 감독의 차가운 한마디에 박민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아니, 민준 씨 정도면 미니시리즈로 가는 게 필모로 보나 페이로 보나, 훨씬 낫지 않나? 굳이 단막극에 온 이유가 뭔가 해서요.”

박 감독의 말에 박민준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마치 예상한 질문이 나온 것처럼.

“대본이 너무 좋아서요.”

짧지만 강한 한마디.

그 말은 작가의 입꼬리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박민준의 대답.

“저는 사실 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자마자 너무 욕심이 났던 대본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말에 작가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봐줬다니, 고맙네요.”

“아닙니다. 실제로 대본이 너무 좋아서 꼭 감독님, 작가님과 일하고 싶었습니다.”

박민준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래요. 좋은 인연이 되면 좋겠네요.”

“그럼 추후에 소속사 통해서 연락 보낼게요. 오늘 고생했어요.”

박 감독은 턱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민준이 허리를 접어 인사한 뒤, 오디션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간 오디션장.

“역시 이름 있는 배우는 다르긴 하네요.”

“맞아요. 연기가 깔끔하죠?”

“네, 딱히 흠잡을 게 없어요. 말씀하신 대로 깔끔이라는 말이 딱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캐스팅 디렉터와 작가의 대화에 박 감독은 조용히 박민준의 필모를 바라볼 뿐이었다.

***

“다음 분, 앞으로 와서 대기해 주세요.”

스태프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 줄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 오디션장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박민준인데.

설마 저 다음이 나인가?

“잘 부탁드립니다!”

오디션장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박민준의 목소리였다.

그걸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내게 스태프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 네.”

하필 박민준 다음 차례다.

같은 대형 엔터이긴 하지만, 인지도와 필모가 충분한 박민준과 필모가 하나도 없는 나.

괜히 비교되게 다음 순서라니.

차분하게 기다리던 내게 이 순서는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하던 대로,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눈을 감고 긴 심호흡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

역시나 박민준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와 눈이 마주쳤고, 박민준은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야, 미안하다.”

그의 한마디에 내 미간은 찌푸려졌다.

내가 답을 하기도 전에 박민준은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희성이 네 자리를 뺏게 생겼네?”

가늘게 뜬 눈, 찢어진 입꼬리.

나는 박민준과는 달리, 표정에 변화조차 주지 않은 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순식간에 입꼬리를 내리는 박민준과 나 사이에 차가운 공기가 맴돌았다.

“어차피 보나 마나 뻔한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지?”

더 이상 박민준과 대화를 섞고 싶지 않았다.

아니, 대꾸할 필요가 없는 싸움이었다.

그를 무시한 채 밝은 미소를 장착하고 오디션장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앞에 나란히 앉은 감독과 작가, 그리고 캐스팅 디렉터.

그들은 내 인사에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내게 집중했다.

“예, 반가워요. HS 엔터 소속이던데.”

박 감독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내가 아닌 서류를 바라보고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래요. 대형 기획사에서 왔는데, 기대해 볼게요. 준비되면 연기 바로 시작하세요.”

“예.”

대형 기획사에서 왔다는 것에 대한 장단점은 너무나 분명했다.

장점은 회사 이름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내 프로필을 본다는 것.

그에 반해 단점은 기획사 이름만으로도 연기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지.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부응하기 위해 엄청난 연습을 하고 왔다.

“흠흠.”

목울대를 가다듬고 바로 연기에 몰입했다.

“수금지화목토천해. 학교 다닐 때, 다들 들어본 말일 거예요. 그리고 이걸 세세하게 배우는 거죠.”

바로 천문학 교수에 빙의된 듯 몰입했고, 오디션장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간단하게 배우던 태양계 행성을 보자면….”

오디션장에는 그 어떤 소품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커다란 칠판이 있다고 상상하며 연기를 이어나갔다.

허공에 글씨를 쓰고 가리키는 듯한 모션에 박 감독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구에서 보이는 행성들의 특징은….”

순탄하게 연기가 마무리될 무렵.

작가는 감독과 무언가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나 싶더니.

“저 질문 있어요!”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내게 말했다.

이건 단순한 연기 외적인 질문이 아니다.

더불어 대본에 있는 것도 아니었지.

즉흥 연기를 원하는 건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교수가 학생을 대하듯, 배역에 몰입해 답했다.

“거기, 여학생. 어떤 질문이죠?”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묻는 나에게, 박 감독과 캐스팅 디렉터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작가의 대답.

“수금지화목토천해 외에 다른 행성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학창 시절 지독한 문과생이었다.

이과 계열 과목에는 전혀 관심도 없던.

그런 내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마치 천문학 교수에 빙의한 것처럼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티티우스-보데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무언가가 있을 확률이 높죠. 그런데 과거에 천문학자들은 소행성 무리가 있다고 밝혀냈습니다. 그러다 최신 과학에 따르면, 그 지역에 암흑 물질이 추가로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됩니다.”

실제 수업을 하듯 작가와 박 감독, 그리고 캐스팅 디렉터를 한 명씩 바라보며 이해가 되는지 확인했다.

“더불어 티티우스-보데 법칙은….”

“좋아요. 거기까지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희성 씨.”

박 감독이 입꼬리를 올리며 연기의 흐름을 끊었다.

“네, 감사합니다.”

배역에 몰입했던 나는 진희성으로 돌아와 허리를 접어 그들에게 인사했다.

“희성 씨, 혹시 전공이 뭐예요?”

작가는 눈썹을 들썩이며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연극 영화과입니다.”

“오, 그래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차 확인했고, 나는 재빨리 답했다.

“혹시 뭔가 잘못되었나요?”

내가 말실수라도 한 것인가 싶어 물었지만,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애드리브를 보려고 질문을 던졌는데, 바로 전문 지식을 이야기하더라고요. 보통 이 분야에 관심이 없으면 잘 모르거든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 역시 모르는 말들을 쏟아 냈으니까.

빙의가 된 것처럼 자연스레 말이 나왔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작가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별을 좀 좋아하거든요.”

그러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내밀더니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네요. 오늘 연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민준아, 잘하고 왔어?”

박민준의 매니저가 차에 올라탄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뭐 실수라도 할 사람인가?”

“아니지. 분위기는 어땠어?”

“분위기라… 내가 될 것 같던데? 아니, 당연히 돼야지.”

박민준의 표정에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형. 그래서 박 감독님이 Gen 스튜디오로 이직하는 거 확정 맞대?”

“응, 완전 확정이라고 한 번 더 확인했어.”

박민준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그럼, 꼭 이번 단막극 주연은 내가 해야 해. 이번에 박 감독님하고 친분을 쌓아둬야 이직하고 나서 하는 드라마에 주연으로 출연할 만한 밑밥이 깔리는 거잖아?”

“그렇지. 그 Gen 스튜디오가 OTT 플랫폼이라 드라마만 계속 찍으실 테니까.”

매니저가 걱정하듯 물었다.

“티 내지는 않았지?”

“형은 내가 꼬마인 줄 알아?”

박민준은 눈빛을 이글거리며 덧붙였다.

“대본이 좋아서 한다고 했어. 걱정하지 마.”

***

“아니, 인지도는 얘가 더 나은데, 몰입은 얘가 더 낫지 않았나?”

캐스팅 디렉터는 책상 위에 올려 있는 프로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죠? 제 생각도요.”

작가는 팔짱을 끼고 책상에 기대어 선 채로 답했다.

책상 앞에 모여 있는 세 명.

이어 박 감독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적게나마 시청률 좀 붙일 수 있지.”

그의 말에 나머지 두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렇지만 이 친구의 지식을 생각하면 극에 대한 작품성을 높이기는 더 낫지 않을까요?”

그녀가 반론을 내밀었고, 박 감독도 그 점을 인정한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찾아온 정적.

두 명의 후보에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럼… 결국 인지도냐, 작품성이냐 아닙니까?”

캐스팅 디렉터의 말에 고요함은 깨질 수 있었다.

박 감독은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프로필 두 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작가는 작품성을 원할 테고, 단막극 시청률은 기껏해야 1%나 될 텐데…. 어차피 나는 이직할 건데, 굳이 이 시청률 가지고 고집부릴 필요가 있나…?’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는.

“흠.”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그러면….”

결심한 듯 검지로 프로필 한 장을 찍으며 말했다.

“얘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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