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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차는 명전이다-116화 (116/209)

116화

에릭 헤밀턴,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충분히 메이저리그에 입성할 만한 재능을 가진 유망주로 평가받는 사내.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종차별이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그와 친한 이들은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젠장! 저 망할 원숭이 새끼!’

메이저리그 콜업을 위해선 인종차별적 성향을 숨겨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가며 그동안 잘 숨겨 왔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을 치르면서 에릭의 그러한 노력은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4일 전, 대한민국과 승자조 결선을 치르면서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대가 결선에 올라오면서 그는 대한민국에 대해 막연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아 올라온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1번 타자로 나왔던 대호에 의해 솔로 홈런을 맞고, 그 뒤로 연속 안타와 홈런을 맞으며 멘탈이 나가 버렸다.

다행히 빠른 교체로 이성이 날아갔음에도 큰 사고 없이 무너진 멘탈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대호의 타선에서 성의 없는 스윙을 보자, 다시 그때의 기억이 트리거로 작용한 것이었다.

고의적으로 빈볼을 던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칫 대형 사고로 번질 수도 있었지만, 위화감을 느낀 대호가 빠르게 공을 피했기에 별다른 사고 없이 볼넷으로 1루에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분풀이를 한 번 했음에도 또다시 대호로 인해 에릭의 정신이 무너지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보크.

대호의 목소리에 흥분해서 야구 초보자나 할 법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젠장! 젠장!’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런 에릭 헤밀턴을 2루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대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경기가 속행되고 대호는 베이스에서 두 걸음 떨어져 자세를 잡았다.

그런 대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에릭 헤밀턴의 눈빛은 정말이지 사람을 몇 번이라고 죽일 수 있을 법했다.

그러나 대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에릭 헤밀턴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참았다.

씨익.

대호는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상대가 어떤 마음인지는 지금 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상대를 도발한 것이었다.

‘어때, 참을 수 있어?’

팡! 팡!

“에릭, 여길 봐!”

자꾸만 2루에 있는 주자에 시선을 주는 에릭 헤밀턴의 모습에 톰 로빈슨은 급히 미트를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2루 주자에 시선이 빼앗긴 에릭 헤밀턴의 시선을 끌기 위한 행동이다.

그런 톰 로빈슨의 노력이 통했는지, 대호에게서 눈을 땐 에릭 헤밀턴이 고개를 돌리고 포수를 돌아보았다.

에릭 헤밀턴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 대호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비틀어 미소를 짓고, 조용히 한 걸음 더 베이스에서 떨어졌다.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가 있다 보니 에릭 헤밀턴은 세트 포지션으로 공을 던졌다.

그래서 그런지 패스트볼임에도 평소보다 2마일 정도 구속이 떨어졌다.

팡!

“볼!”

톰 로빈슨의 격려로 주자에게서 신경을 떼긴 했지만, 여전히 흥분 상태가 완전히 가시지 못한 듯 에릭 헤밀턴의 제구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엔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거야!’

흔들리는 투수 때문이라도 포수가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패스트볼을 요구할 것이라 판단한 대호는 자신의 생각을 더그아웃에 전달했다.

그런 대호의 사인을 받고 더그아웃도 타석에 있는 이중호에게 전달했다.

어떻게 보면 1회 말 공격 때 상황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투수가 투구 동작에 들어가는 것을 본 대호는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며 뛰었다.

“런!”

짧은 외침이었지만 에릭 헤밀턴의 귀에는 매우 잘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애써 주자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 노력을 하며 공을 던졌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팔에 힘이 들어가고 손끝에 공을 채는 힘이 조금 덜 들어가고 말았다.

제대로 던지지 못하고 밋밋하게 날아간 작대기 직구.

따아아악!

당연히 이중호는 이런 공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타다다닷!

런 앤 히트 작전을 생각해 짧은 안타라도 홈까지 들어오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리던 대호는 귓가에 울리는 맑은 타격음을 듣고,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헉……. 홈런이네?’

어떻게든 타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투수를 흔들고 뛰었는데, 그게 잘 먹혔는지 홈런 타구가 나왔다.

대호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뛰면서 고개를 돌려 타구의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우익수 방향으로 날아가는 공이 보였는데, 우익수가 워닝 트랙 앞에서 멈추고 멍하니 펜스를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와아아아!”

한국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홈런! 홈런입니다!”

김승주는 2번 타자인 이중호가 친 타구가 우측 펜스를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곤 요란하게 소리쳤다.

“네, 이중호 선수 올 시즌 열여덟 개의 홈런밖에 치지 못했는데, 올림픽에 나와 그 한을 풀어 내는군요.”

하구연 해설도 올 시즌 이중호가 친 홈런의 개수를 언급하며 부연 설명을 하였다.

정말 그 말대로 이중호는 올 시즌 KBO에서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까지 겨우 열여덟 개의 홈런밖에 치지 못했다.

즉, 어느 정도 장타를 기대할 만은 하지만 홈런 타자는 아니란 뜻이었다.

실제로 이중호는 홈런보다 뛰어난 선구안과 작전 능력의 우수함을 높게 쳐 주는 선수였다.

그렇기에 대호를 이어 2번 타자 역할을 맡고 있었고.

그런 이중호가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여 처음으로 홈런을 친 것이다.

아니, 그의 국제 대회 경력에서도 상당히 오랜만에 기록한 홈런이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3회 초 에이스 선동일이 미국의 타자들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1점을 빼앗겼는데, 이렇게 바로 볼넷과 투수 보크에 이어 생각지도 못한 투런 홈런이 나왔다.

짝!

이중호가 홈에 들어오길 기다리던 대호는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축하를 했다.

“선배, 투런 홈런 축하드립니다.”

“하하, 이게 다 네가 투수를 흔들어서 그런 것이지. 나야말로 고맙다.”

두 사람이 그렇게 투런 홈런을 자축하고 있을 때, 대기 타석에서 타석에 들어서기 위해 다가오던 최태경이 끼어들었다.

“중호 선배! 홈런 축하드립니다.”

“그래, 태경아 고맙다. 너도 이번에 또 한 번 보여 줘 봐!”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한 방 노려보겠습니다.”

이중호의 격려에 최태경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긍정의 대답을 하였다.

“확실하게 오늘 끝내고 축하 파티나 한 번 또 하자!”

4일 전 올림픽 야구 대표 팀 중 최강이라 불리던 미국을 꺾고 했던 파티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파티를 열자고 말한 대호였다.

그런 대호의 말에 최태경은 눈을 반짝였다.

사실 지난번에는 아직 야구 경기가 남아 있었기에 조촐하게 파티를 치렀다.

그러나 만일 이번에 승리한다면 성대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

“그럼 네 약혼녀도 오냐?”

대호의 스캔들 기사를 최태경도 보았다.

기사를 보기 전 대호에게서 결혼 계획과 애인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훈련을 하기 위해 운동장에 모인 상태라 대호가 휴대폰을 들고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문의 미인 스포츠 아나운서.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나이가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은 친구가 결혼한다는 얘기에 더더욱 그 상대가 어떤지 알고 싶었다.

최태경이나 김제경을 비롯해 선수들 사이에선 저런 미인과 결혼할 예정인 대호가 위너라고 불릴 정도였다.

“좋아! 네가 이번에 홈런을 치면 한나 씨에게 친구도 데려오라고 말할게!”

“뭐! 그게 정말이냐?”

최태경은 친구도 데려오라고 한다는 대호의 말에 놀라 소리쳤다.

그러고 나서 한 손에 들고 있던 배트를 다시 한번 고쳐 잡고는 눈을 반짝였다.

“조금만 기다려!”

타석으로 걸어가던 태경은 고개를 돌려 아직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지 않은 대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흥분이 가시기 전 돌아올게!”

타석에 들어선 최태경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 투수를 노려보았다.

조금 음흉한 마음이 섞이긴 했지만, 의욕을 북돋는 데에는 최고였다.

활기찬 태경의 모습에 에릭 헤밀턴은 인상을 구겼다.

그도 보았다.

투런 홈런을 맞고 허탈해하던 중, 홈 인근에서 모여 서로를 붙잡고 웃고 떠들던 그들의 모습을 말이다.

그중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던 대호와 가장 늦게까지 웃고 떠들던 태경의 얼굴도 눈에 크게 들어왔다.

그런데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웃음기를 거두고 굳은 표정을 하며 타석에 들어선 태경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너무도 불쾌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말 신경 거슬리는 놈들뿐이군!’

에릭 헤밀턴은 그런 생각이 들자 어금니를 힘주어 깨물었다.

그리고 온몸에 힘을 모아 투구에 들어갔다.

루상에 주자가 아무도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와인드업부터 강한 힘이 실렸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손을 떠난 공이 매서운 기세를 일으키며 날아갔다.

하지만 그 정착지는 포수의 미트가 아닌 타석에 서 있는 태경의 어깨였다.

뻑!

“윽!”

쿠당탕!

웅성웅성!

더그아웃에서 추인수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이 뛰어나왔다.

타석에서 공을 맞아 쓰러진 태경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한편 최태경이 공을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본 대호는 누구보다 빠르게 마운드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 대한민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 선수 대부분이 따라나섰다.

미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 선수들 역시 더그아웃과 그라운드에서 마운드로 달려오며 에릭 헤밀턴을 보호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뛰쳐나온 대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새끼! 죽었어!’

대호는 눈에 불을 켜고 뛰어와 마운드 위에서 아직도 고깝게 내려다보고 있는 에릭 헤밀턴의 멱살을 잡았다.

우우우우!

올림픽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이 나와 버렸다.

이에 경기장에 있는 관중은 일제히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멱살을 잡으려는 대호의 손이 닿기 전, 마운드 위에 있던 에릭 헤밀턴이 먼저 대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주먹은 대호를 맞출 수 없었다.

휙!

가벼운 고갯짓으로 에릭 헤밀턴의 주먹을 피한 대호는 한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그가 내지른 손목을 잡아 허리를 감아 마운드에 내리꽂아 버렸다.

쿵!

“헉!”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지고 에릭 헤밀턴이 순식간에 대호의 엎어치기 한 방에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순간 얼음이 되어 멈춰 버렸다.

마치 유도 선수와도 같은 깨끗한 엎어치기 한판을 야구 경기장 한복판에서 선보인 셈이었다.

그러나 위협구를 두 번이나 던지고, 또 그중 하나는 선수에게 상당히 심각한 부상을 입힌 에릭 헤밀턴이 피해자라 그런지 관중들은 의외로 환호를 보냈다.

대호의 참교육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올림픽 그랜드 파이널 라운드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야구팬은 응원하는 나라를 떠나 훌륭한 경기를 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에릭 헤밀턴은 그런 팬들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물론 이 환호성은 기절한 에릭 헤밀턴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편, 벤치 클리어링의 원인을 제공한 에릭 헤밀턴이 기절하자 대립하고 있던 선수들은 순간 소강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한국이나 미국 모두 원인 제공자가 사라지니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4회차는 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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