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0.01초 소드마스터 171화
오랫동안 이 답답한 동굴 속에 갇혀 있었던 루겔로스.
악마도, 천사도, 인간도, 그 외의 것들도.
그는 모든 생명체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저 지배의 신답게 모든 것을 지배하려 했을 뿐인데, 라할은 엘프들과 함께 자신을 이곳에다 처박아 놓았다.
그러므로 라할조차도 증오했다.
하지만 그를 증오한다고 해서 루겔로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신을 만든 창조주이니,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 자신을 파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라할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봉인에서 벗어난 이후, 늘 충만하게 느껴졌던 그 존재감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이 봉인을 푼 것이 라할인 줄로만 알았다.
그가 드디어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풀어 줄 거라 믿고 있긴 했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이곳에 봉인해 두었다는 건 언제든 용서하겠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봉인을 푼 것은 라할이 아니었다.
라할이 가장 사랑했던 하찮고 하찮은 인간들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동안 억눌러 왔던 힘을 방출하며 그들을 짓눌렀다.
지배의 신이 돌아왔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어찌된 이유인지 라할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으니,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지, 이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지배 아래 놓여 그 시험을 받고 있는데도 인간 하나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지배의 힘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도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건 신의 권능을 감히 인간 따위가 반하는 일이었다.
“죽고 싶으냐?”
더욱 가관인 건 이 인간이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자신에게 대항하려고 칼을 뽑았다가 지금은 간신히 정신줄만 붙잡고 있는 저 두 놈만 조금 나은 정도라고 해야 할까.
[가소로운 인간. 감히 너의 절대자 앞에서 죽음을 논하다니.]
“너 같은 건 절대자가 아니다. 절대적인 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놈이 감히 입을 놀리는 것이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손가락 한번 튕기면 그대로 사라져 버릴 필멸자가 이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네놈의 허세는 잘 들었다. 간만에 나를 웃기게 만들었으니, 그 상으로 고통 없이 죽여 주마.]
그것이 루겔로스가 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튕겨 강한 힘을 상대에게 쏟아부었다.
그런데,
[······뭐지?]
분명 강한 지배의 힘이 상대에게 가해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실수를 한 것일까?
그는 한 번 더 힘을 발휘했다.
또, 또, 또 한 번.
그런데도 여전히 저 인간에게 작은 상처 하나 줄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냐!!]
결국 화가 폭발한 루겔로스가 목청을 높였다.
[왜 죽지 않는 거야! 벌레보다 못한 인간 따위가!!]
신이랍시고 애써 위엄 있는 척했던 목소리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알량한 힘으로 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알량한 힘?
알량한 힘이라고?
[감히 필멸자가 영생을 사는 신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영생을 산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 인간은 천천히 허리춤에서 칼을 뽑기 시작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죽음을 피할 순 없다. 신이라고 자칭하는 네놈조차도 말이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짐이 오늘 친히 가르쳐 주겠다.”
바로 그때였다.
오싹-!
피부가 차갑게 얼어붙을 것만 같은 살기가 저 인간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것도, 마치 그 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던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것보다 충만하게 가득 차 있으며, 그 말대로 신조차 쪼갤 수 있는 그 놀라운 힘이 느껴졌다.
[인간······. 너, 넌 누구냐?]
“베라크 제국의 황제, 아슬란이다.”
[아슬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저 남자가 뿜어내는 살기만큼 위엄 넘치는 이름이었다.
[대체 내 힘이 너한테 왜 통하지 않는 거지?]
“그에 대한 답은 지금 주도록 하지.”
아슬란이 검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 순간 그의 가슴팍에서 무언가가 환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루겔로스가 놀란 기함을 터트렸다.
[잠깐. 그, 그건!]
하지만 이미 아슬란은 가볍게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른 뒤였다.
촤아아악-!!
그러자 검강이 그대로 루겔로스의 왼쪽을 꿰뚫고 지나가 버렸다.
[······.]
루겔로스는 잠시 멍하니 자신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자신의 날개가, 그 위엄 넘치는 빛의 육신이,
[으, 으아아아악!!]
저 검강에 의해 뜯겨 나가 버리고 말았다.
[크아악! 우으으······.]
루겔로스가 신음을 터트리며 쓰러지자 그가 퍼뜨렸던 힘도 전부 사라졌다.
그 덕분에 짓눌려 있던 병사들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콰득-!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쓰러진 루겔로스의 머리를 발로 짓밟으며 서 있는 아슬란을 말이다.
“이제야 깨달았느냐? 짐이 말한 절대적인 힘이 무엇인지.”
루겔로스는 몸을 떨며 말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 팬던트를 가지고 있는 거지?]
“짐이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그건 내가 라할에게 직접 바친······!]
악을 쓰며 소리치던 루겔로스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잠시 넋을 잃었다.
[설마······. 네가······.]
갑자기 입이 바싹 말라가는 것만 같았다.
[라할?!]
고작 그 일격 하나로 자신의 몸을 이 지경까지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라할밖에 없다.
신들을 창조했지만, 그 신들의 날개를 직접 꺾을 수 있는 라할.
그가 아니고서는 이런 힘이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으헉!]
그는 얼른 아슬란의 발아래서 빠져나와 아슬란을 올려다보았다.
그 거친 안광이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라, 라할이시여.]
아슬란은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꿇어라.”
[!?]
루겔로스는 얼른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뒤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신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느냐?”
[예. 다, 당신 앞에서는 저 역시 그저 하찮은 필멸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럼 짐이 이제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모,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두 번 다시 예전처럼 난동을 피우지 않겠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방금 전에도 네놈은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려 하지 않았더냐?”
[제, 제가 팬던트를 당신에게 바쳤던 것처럼, 이번에는 제가 가진 힘을 당신에게 바치겠나이다.]
루겔로스는 ‘지배’라는 힘의 원천을 몸 안에서 빼내었다.
[제가 당신께 받은 것이었으니,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라할이 처음 신들을 만들었을 때, 그들의 근원이 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었다.
루겔로스는 그 힘을 건네고 나서 서서히 몸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당신이 저를 용서하고 다시 부를 날을 기다리겠나이다.]
* * *
‘······뭐야. 이대로 도망간 거야?’
이 자식이 이걸로 시선을 끌더니, 그사이 홀라당 도망을 쳐버렸다.
‘아니지. 그래도 이렇게 끝나서 다행인 건가.’
루겔로스는 일반 몬스터도, 바빌론도 아닌, 무려 신이지 않은가.
그런 놈을 만나고 나서 이 정도로 끝난 건 천만다행이었다.
‘이 팬던트가 없었다면······.’
나도 꼼짝없이 놈의 손에 농락당하다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놈이 알아서 떠나줬고, 심지어 이 요상한 구슬도 나한테 주고 갔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내가 라할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면 눈에 불일 켜고 달려들 텐데.’
아니. 대체 내가 언제 라할 코스프레를 했다고 다들 이렇게 오해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난 내 입으로 라할이라 말한 적이 없다고!!
“폐하께서 승리하셨다!!”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
“우와아아아!!”
어후. 깜짝이야.
아론을 시작으로 병사들의 큰 목소리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었다.
“시끄럽다.”
그러나 곧 그들의 함성 소리는 멎어 들었다.
“한심한 놈들. 또 짐으로 하여금 너희의 뒤치다꺼리를 시키는 것이냐?”
기사들은 곧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
나는 짧게 혀를 차며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성으로 돌아간다.”
일단 이곳에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문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다른 곳을 찾아가야 할 때다.
여기가 아니라면 자스트라 경계를 넘어야 한다는 건데, 일이 꽤 복잡해졌다.
‘차라리 여기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우리 성이랑도 가깝고 말이다.
미지의 땅이라 불리는 자스트라는 넘어야 할 일도 없어서 좋은데,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꽤 많은 곳을 뒤져봐야 할 것 같았다.
‘오늘처럼 루겔로스 같은 게 또 튀어나오면 굉장히 곤란한데.’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이놈의 게임이 언제 나한테 쉽게 뭔가를 줬던 적이 있던가.
늘 지랄 맞은 적들을 툭툭 던지듯이 나타나게 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지금처럼 군사들을 왕창 끌고 가는 수밖에 없겠어.’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가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드래곤부터 라일라칸, 그리고 나의 기사단들까지 죄다 끌고 가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으리라.
오늘은 정말 운 좋게 넘어갔다고 해도 다른 곳에서 바빌론 급에 달하는 악마들이 나타나 공격하려 든다면 그땐 정말 큰일이 아닌가.
‘그나저나······.’
나는 루겔로스가 내게 남기고 간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빛의 구슬]
-라할이 여섯 신을 창조할 때 나눠 준 빛의 구슬.
-랜덤으로 능력 하나가 주어진다.
라할이 무려 신들에게 나눠줬던 구슬이 내 손에 들어왔다.
지금껏 이 게임을 수천 시간 해왔지만, 이런 아이템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랜덤으로 능력 하나를 준다고?’
아니나 다를까.
구슬은 곧 내게 반응하며 빛을 뿜어냈다.
-랜덤으로 능력이 생성됩니다.
잠깐. 아직 난 마음의 준비가······.
-랜덤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슬이 알아서 능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건 바로,
[회상의 능력]
“······?”
이건 또 뭔 능력이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스킬 중 하나를 사용자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여되는 힘은 기억에 남은 것과 일치합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스킬 중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게 무슨······.
[스킬 목록]
촤르르 소리를 내며 상태창이 내가 그동안 직접 이곳에서 보았던 스킬들을 길게 나열했다. 그리고 이 많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아니. 대체 이 많은 것 중에서 어떻게 딱 하나만 고르라는 거야, 잔인한 놈.’
그리 말을 했지만, 이미 내 눈에 확 띈 것이 하나 있었다.
‘이것도 설마 스킬로 구분이 되었던 건가?’
이건 스킬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구슬은 이것마저도 스킬로 인식을 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걸로 하겠어.’
나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구슬이 한 번 더 확인하듯 내게 물었다.
[스킬 ‘블랙 메테오’가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