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 혼자 최강 괴력스킬 18화
내가 무리해서 신전으로 빨리 왔던 것은 그냥 목적지에 도착만 하면 퀘스트가 알아서 클리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이놈의 게임이 그렇게 쉽게 돈을 줄 리 없지 않은가.
꼼짝없이 나는 이곳에 최소 3일은 더 머물러야 했다.
“갈 데도 없고. 에휴.”
레이어스 신전 밖을 나가면 산맥 아래로 내려 가야 하는데, 그 밑은 전부 사막 지대라 딱히 나갈 만한 곳도 없었다.
사막 지대에만 산다는 몬스터를 잡으러 가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여기서 많이 굴렀었지.”
레골라스 사막에는 거대 전갈, 수천 마리의 뱀떼, 모래의 요정 등등. 사냥할 맛이 나는 몬스터들이 많다.
그놈들을 죽여 재료를 모아 장비를 만들기도 하고, 가끔 운이 좋으면 히든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잡는 게 존나 빡세다는 거지.”
사막 지대라는 페널티.
뜨거운 날씨.
바다를 헤엄치듯 모래 안을 돌아다니는 몬스터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똥캐 아슬란.”
아슬란으로는 몬스터들이 우글 거리는 곳에 발 한번 잘못 들이면 그대로 객사다.
뭐, 신전으로 오는 길은 몬스터들이 거의 없는 길을 따라 왔으니 무사히 넘어갔다지만, 사냥 목적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아슬란으로는 택도 없었다.
“쓰읍-. 그래도 몬스터 파밍으로 얻는 재료들이 꽤 되긴 하는데.”
몬스터를 죽여서 얻는 재료로 장비를 만들면 내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똥캐 아슬란으로 이 거칠고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방법이 몇 개 없다.
“템빨로 밀고 가는 수밖에.”
이것이 내가 단기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극악 난이도는 새로운 특성과 스텟을 보상으로 받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템을 통해 얻는 건?
아무리 지랄 같은 난이도라도 결국 이것도 클리어 목적으로 만든 난이도이니, 아이템을 통한 성장은 분명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 아이템들을 어떻게 얻느냐는 건데.”
몬스터를 토벌해서 얻는 재료들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특정 맵에 숨겨져 있는 히든 아이템을 찾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건 왕국 가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네.”
찰나의 괴력이란 스킬은 어디까지나 일회용에 불과하다.
내가 가진 최후의 한 방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스킬 쿨타임 돌 때마다 한번씩 싸워 주는 것이 아니니, 그것 말고도 나를 지켜 줄만 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재료 파밍과 아이템 제작은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적당한 때가 오면 주인공을 도와서 게임을 클리어 하면 돼.”
모든 게임이 그렇듯, 이 게임도 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날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달려 있다.
문제는 게임 엔딩이 수십 가지라는 것이었다.
대륙이 평화롭게 유지되는 해피 엔딩도 있고,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대륙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는 배드 엔딩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또 어떤 컨셉의 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서 엔딩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위대한 분이시여. 에단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호위기사 에단의 목소리에 나는 퍼질러 누워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다듬은 목에서는 굵직한 목소리가 나갔다.
“잠시 기다리거라.”
“예.”
나는 로봇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을 빠르게 정돈했다.
어휴. 이놈의 허세하고는.
“들어오너라.”
에단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내게 아뢰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하리엘인가?
에단의 얼굴이 왠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뭘 봤기에 저러지?
“나다.”
기사가 다 아뢰기도 전에 요염한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구두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아슬란.”
붉은 드레스··· 드레스가 맞는 것이겠지.
미니 스커트처럼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고, 뒤의 등과 허리도 맨살이 가려지지 않은 짧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
새빨간 립스틱과 붉게 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은 그녀가 누구인지를 내게 알려준다.
“······나타샤?”
샤나 왕국의 대마법사, 나타샤 헤리오스.
이곳에서는 그녀를 홍염의 대마법사라 부른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을.
색욕의 마녀, 나타샤.
“오랜만에 보는 스승에게 여전히 건방지구나, 아슬란.”
스승?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대마법사가 아슬란의 스승?
하리엘에 이어 두 번째로 놀라는 아슬란의 인간 관계였다.
“흐응. 나이는 들었어도 생김새는 여전하구나.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탐스러워 보여.”
색기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에단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에단.”
“아, 예.”
“나가 있거라.”
“예.”
보통 대마법사라고 하면 긴 수염 난 다 늙은 할아버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대마법사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저렇게 나타샤처럼 개성이 강한 캐릭터도 존재했다.
[나타샤]
무력: 70
지력: 95
마력: 95
무시무시한 스텟이다.
지금까지 봤던 네임드들 중 단연 최고다.
일단······ 본인 입으로 스승이라고 하니 대접은 해줘야겠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긴. 그냥 오랜 제자가 왔다기에 한번 보러 왔다.”
제자라······.
아무리 생각해도 나타샤가 아슬란을 일대일 멘토링을 해서 키웠을 리는 없다.
나타샤 정도의 눈이라면 이 병신 같은 캐릭터는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금방 판단했을 터. 그렇다면 왜 자신을 스승이라고 소개했을까.
‘나타샤가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맡았었지?’
이럴 땐 내가 고인물이라서 다행이었다.
나타샤 정도의 네임드라면 그 정보가 내 머릿속에 없을 리가 없지.
내가 알기로 그녀는 대마법사가 되기 전까지 아카데미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엘라 아카데미는 거의 모든 왕국에서 귀족 자제들을 보낼 정도로 대륙 최고 수준의 아카데미다.
그곳에 들어가면 왕족도, 귀족도 심지어 평민도 모든 신분이 하나로 평등해진다.
아마 거기 스쳐 지나가는 제자들 중 하나가 아슬란이었던 것 같다.
만약 아슬란이 가르치는 제자였다면-.
“스승과 제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나타샤가 이런 똥캐를 진짜 제자로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
그러자 그녀는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제자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100년을 넘게 산 여인이지만, 그 미모는 이제 갓 20대가 된 성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어 보였다.
백옥 같은 피부와 상대를 유혹하는 붉은 입술.
의도적으로 드러낸 목선과 쇄골. 그리고 일부러 과장되게 꼬는 다리를 바꾸는 동작까지.
모든 것이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한 그녀만의 기교였다. 그리고 열의 아홉은 전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그녀의 능력은,
[끝없는 매혹]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매혹.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상대방을 본능적으로 유혹하는 것이 그녀의 특성이었다.
“내가 여자란 무엇인지, 여자는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너에게 가르치려고 했지만, 그걸 거부한 건 너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설마, 나타샤가 아슬란을 작정하고 유혹이라도 했다는 건가?
“그땐 내 가르침에 넘어오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넌 특별했지. 한창 혈기왕성할 때일 텐데도 말이야. 그래서 혹시 남성적 상징인 그곳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염려도 했었다니깐?”
후훗 웃고 있는 그녀의 눈빛에는 색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말했다.
“용건을 말씀하시지요.”
“흐응. 이렇게 또 피해간단 말이지. 뭐, 좋다. 그래야 나도 탐닉하는 맛이 있으니.”
왠지 저 여자는 아슬란보다 더 미친년 같았다.
“할라즈 왕국을 어떻게 할 작정이냐?”
뜬금없이 갑자기 할라즈 왕국을?
“유한이 죽고 나서 할라즈 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미 내분이 일어나 서로 칼질을 할 때만 기다리고 있지. 그리고 그 옆에는 누가 있는지 아느냐?”
나타샤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바로 우리 샤나 왕국이 있다. 만약 너와 우리 왕국이 힘을 합친다면 할라즈 왕국은 금방 끝장을 낼 수 있겠지.”
“동맹 요청입니까?”
“그런 셈이지. 우리 샤나 왕국은 할라즈 왕국을 원한다. 그렇기에 너와 손을 잡으려는 것이다. 그쪽이 최대한 출혈도 적고 다툼도 적을 테니까.”
샤나 왕국과 일라이 왕국이 손을 잡아 할라즈 왕국을 멸망시킨다라.
좋은 시나리오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타샤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저 여자는 국정에 아예 관심이 없잖아.’
왕국이 잘 되든 망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내게 직접 와서 이런 소리를 떠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왕국의 대의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나중에 홍염의 대마법사가 아닌, 색욕의 마녀로 불리는 이유가 된다.
“흐음-.”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그녀는 탐색하듯 내 위아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훨씬 더 멋있어지다니. 지금껏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입니까?”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겠느냐? 넌 매번 혼자 진지한 놈이지 않느냐?”
역시 이 여자는 왕국의 일은 뒷전이었다.
그럼 대체 그걸 왜 물어본 거지?
단순히 구색을 갖추려고?
“어때. 아카데미에서 맛보지 못했던 이 탐스러운 과일을 한번 맛보고 싶지 않느냐, 아슬란?”
그녀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색기가 내 전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혈맥의 흐름은 빨라졌고, 심장의 진자 운동도 덩달아 활발해졌다.
손에는 식은땀이 나고, 아랫도리에도 반응이 오려고 한다.
어느새 눈은 그녀가 보일락 말락 들추고 있는 가슴에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
아슬란의 정신은 욕망을 자극하는 그녀의 매혹적인 색기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전 당신에게 순순히 젊은 생기를 바칠 생각이 없습니다.”
“으응?”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젊은 생기?”
모른 척하고 있지만, 날 속일 순 없다.
나는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젊음을 유지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끝없는 매혹으로 상대를 유혹한 뒤, 생기를 흡수해 저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철저히 마법사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금지하는 마법이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이걸 입 밖으로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녀의 색욕을 방어하기 위해 발동된 아슬란의 허세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털어냈다.
“전 당신의 노리개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더더욱 당신의 젊음을 위해 희생할 생각도 없지요.”
“누가 들으면 내가 흑마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겠구나.”
“아닙니까?”
그녀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져 갔다.
“말을 조심하거라. 오랜 제자를 여기서 죽이고 싶진 않다.”
그녀의 강렬했던 색기는 이제 엄청난 살기로 바뀌었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것만 같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아슬란의 허세는 꺾이질 않았다.
“저도 오랜 스승의 피를 이 자리에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건방진······!”
그녀가 힘을 발산하기 시작하자 붉은 마력이 내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짓눌렀다.
방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나타샤의 마력은 굉장히 거칠었다.
핏줄이 메마르고 목이 옥죄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
아슬란의 정신력이 함께 있는 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무덤덤한 얼굴로 버텨내자 그녀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더욱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콰콱-! 콰콰콱-!!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마력에 의해 바닥이 붉게 갈라졌다.
바닥을 가르는 힘은 점차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 의자 끝에 다다르려는 찰나.
“거기까지 하시지요.”
“뭐?”
“제가 칼을 뽑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바닥을 가르며 다가오던 붉은 마력이 멈췄다.
“하! 그건 네가 날 죽일 수 있다는 것이냐?”
“······.”
나는 말 없이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
때론 말 몇 마디하는 것보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더 큰 힘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나타샤도 한참 동안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이내 힘을 거둬 들였다.
“제법이구나. 내 마력을 버텨 내다니. 하긴. 그 유한을 일격에 죽인 사내이니,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니겠지.”
허세 부리는 거 맞습니다, 누님.
“진짜 용건이 무엇입니까?”
“응?”
“당신은 어차피 국정에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여기까지 손수 찾아와 그런 제안을 하신다는 건······ 여러모로 이상할 수밖에요.”
그러자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새침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슬란. 생각보다 넌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구나. 혹시 몰래 내 뒤라도 캐고 있었느냐? 그건 그거 나름대로 흥분되는군.”
“······.”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깟 국정은 개나 주라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성적 매력을 마구 뿜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처럼 저 끝없는 매혹도 같은 부류인 듯싶었다.
“하지만 대답은 듣고 싶다. 넌 샤나 왕국과 손을 잡아 할라즈 왕국을 칠 생각이 있느냐?”
난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이유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요.”
“그래? 이상한 일이군. 할라즈 왕국을 점령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대국이 될 수 있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렇게 되면 모든 왕국에게 주목을 받게 되고 경계심을 느낀 주변 왕국끼리의 동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 꼼짝 없이 협공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거기다 나는 전쟁터에 나가기 싫었다.
잘못 갔다가 기습 공격에 당하기라도 한다면 전투 능력도 없는 아슬란은 끔살이다.
“가만히 있는 유한을 먼저 건드렸으면서 정작 왕국은 치지 않겠다······ 뭐, 잘 알겠다. 그런데 아슬란.”
“예.”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그녀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끈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네가 듣지 못한 내 특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말이다.”
“······살펴 가십시오.”
나는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칫. 재미없기는.”
나타샤는 문밖으로 나가기 전, 또 뭔가 할 말이 남아 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보았다.
“잠깐. 너 혹시 그것 때문이냐? 아직도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야?”
“······?”
“아아. 그랬던 거군. 여전히 그 아이를 잊지 못한 것이었어.”
이 미친 여자가 또 뭐라는 거야?
“하지만 이걸 어떡하면 좋단 말이냐. 하리엘은 이미 교단의 성검이 된 자. 그녀는 앞으로 어떤 남자와도 함께 할 수 없다.”
하리엘?
아슬란이 아직도 하리엘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런. 천하의 아슬란이 순애보라니. 이거 더욱 점령하고 싶어서 마음이 들끓는구나. 후후훗.”
“······멀리 안 나갑니다.”
“쯧. 알겠다. 이 매정한 녀석. 다음에 두고 보자. 그땐 이대로 안 넘어갈 테니.”
탁-!
마침내 나타샤가 돌아갔다.
한바탕 붉은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듯한 기분이다.
그동안 애써 감춰 두고 있던 식은땀이 얼굴과 몸에 줄줄 나고 있었으며, 아슬란의 병적인 허세가 사라지면서 잔존하던 흥분감이 가시질 않았다.
“진짜 모니터로 보는 거랑 다르네.”
아슬란의 정신력이 아니었으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 아니지. 이게 끔찍한 건가?
커뮤니티에서 나타샤 손에 죽는 게 호상이라고 말하는 놈들이 꽤 있었다.
그만큼 수많은 가능충을 양성해낸 것이 바로 저 나타샤다. 그리고 실제로 꽤 많은 플레이어가 나타샤 손에 죽는다.
그 이유는 홍염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그녀가 훗날 타락한 색욕의 마녀가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플레이를 하다가 나타샤에게 죽은 적이 있었다.
그땐 모니터로만 정기를 흡수당해 죽는 걸 봤는데, 그걸 오늘 실제로 봤으면······.
흠흠. 아무튼,
“그런데 하리엘을 못 잊어? 이 아슬란이?”
풉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 아슬란이 여자 하나를 못 잊어서 그렇다기에는-.
“잠깐.”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슬란은 사십이 넘고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성격이 개차반이라 여자들이 다 도망갔겠거니 했는데, 정말 나타샤 말대로 아슬란이 아직도 하리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라면?
갑자기 모든 게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설마······?”
왜 아슬란이 지금까지 혼자 있었는지,
왜 하리엘만 보면 허세와 더불어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는지,
처음에는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일 거라 생각했으나,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