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 길정산 실험실 (2)
실험실 건물 앞에 있는 묘비들만 해도 족히 50기는 넘어보였다.
하나같이 이끼가 가득 차있었지만 모양과 흔적으로 봤을 땐, 지금 현수 앞에 있는 묘비처럼 아무 각인도 없는 묘비일 듯했다.
손전등 불빛과 카메라가 무덤들을 슥 비췄다.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극도로 치달았다.
- 대체 저기 뭐임??
- 실험실이 아니라 공동묘지 아니야???
- 그 미국영화나 유럽영화 보면 교회 앞에 공동묘지 있는 그런 거 아님?
- 실험실 맞아요??
- 건물은 학교 같기도 하고.
- 아까 간판에 무슨 제약 실험실 언뜻 보였음.
극도의 두려움.
차가운 공기가 몰아치면 늘상 느끼는 귀신의 흔적이라고 느끼고 말 것이었지만 이곳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결이 달랐다.
아주 추운 겨울의 칼바람처럼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오싹함이 있었다.
현수는 솔트샷건에 결속된 EMF 탐지기를 확인해 보았다.
다섯 개 불빛이 모두 차있었다.
“이곳에 상당히 많은 귀신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들도 모두 귀신의 형태로 이 근처에 있을 걸로 예상이 됩니다.”
현수가 카메라를 보며 말한 뒤 태환을 보았다.
“묘비에 이름이 없는 게 어떤 의미일까?”
현수의 질문에 태환이 대답했다.
“통상적으로 죽은 자들을 기억하고 기도해 주는 것으로 넋이 위로돼서 천도할 수 있는 건데 이렇게 이름도 없는 묘비로 뒀다는 건 여기 귀신들이 전혀 위로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죠.”
“그러면 어떻게 되지?”
“구천을 떠돌다 이런 음기가 강한 지역의 지박령이 되거나 시간이 오래 되면 원귀, 악귀가 되겠죠.”
태환이 말했다.
현수는 카메라와 묘비를 한 번 번갈아 본 후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은은하게 계속 들려왔다.
띵- 띠딩- 띵- 띠디딩-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맑고 청량한 오르골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가 근원지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이 멜로디.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태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화진도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추며 말했다.
“맞아. 나도 들어본 적 있어.”
현수도 태환의 말에 동의했다.
“무슨 노래지? 무슨 노래지?”
태환이 눈알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 이거 게임 OST에요.
- 맞네. 게임 OST임.
- 그 2D 쯔꾸르 공포게임 중에 이브닝 암???? 거기 OST임.
- 아아아아!!! 맞네 맞네
- 게임에서 쓰인 거지 클래식 곡임.
- 제목이 뭐였더라.
- 제목 ‘장례곡’임.
- 게임 OST예요.
오르골 소리를 들은 시청자들이 빠르게 채팅을 올려주었다.
“‘이브닝’라는 게임 OST래요. 원곡은 클래식 장례곡이고.”
세정이 채팅을 보고 전달해 주었다.
“아! 맞아. 그 게임이야. 옛날에 게임방송 할 때 들어봤었어.”
현수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맞네요. 저도 그 게임에서 들었어요.”
태환도 이제 기억이 났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장례곡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거야?”
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 시메루가 놓고 간 건가???
몇몇 시청자들은 시메루를 의심했다.
현수 일행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이동하는 사이, 태환은 현수의 뒤를 쫓아가며 인터넷으로 그 노래를 찾아 틀었다.
띵 띵딩딩-
굉장히 암울하면서도 느릿느릿한 피아노곡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확실히 같은 곡이었다.
“최근에 이곳에 온 사람이 3년 전, 시메루라면 그 사람이 놓고 갔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현수가 카메라를 보며 말한 뒤 앞장서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걸을 때마다 오르골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현수 일행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한 묘비 뒤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었다.
띵 딩 띵딩띠딩-
소리가 점점 커졌다.
현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묘비 뒤를 가리키며 몸을 확 내밀었다.
“후.”
다행히 귀신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먼지 쌓인 오르골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회전목마 오르골이 먼지와 흙이 쌓인 채 기울어져 놓여 있었다.
신기한 것은, 현수가 오르골을 발견하자마자 음악이 딱 멈췄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나는 소리였나 봐요.”
현수가 오르골을 가리켰다.
세정은 카메라로 오르골을 촬영했다.
“이거 그 방울처럼 막 작동 안 되는데 혼자 소리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태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오르골을 집어 들려 했다.
“触るな(만지지 마.)”
순간 태환의 귀에서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악!”
태환이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같은 소리를 들은 현수가 솔트샷건으로 주변을 겨누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방금 일본어였죠?”
태환이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맞아. 일본어였어.”
“만지지 말라는 말이었어요.”
현수와 화진이 번갈아 말했다.
- 갑자기 무슨 일???
- 아 비명소리에 놀람ㅋㅋㅋㅋ
- 뭐죠???
마이크에는 일본 남자의 목소리가 송출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수가 카메라를 보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저 오르골에 손을 대려 하니까 일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사와루 나’라고 짧고 굵게 외치는 그런 소리였어요.”
- 시메루?????
- 사와루나가 뭐임???
- 만지지 말라는 거임.
- 시메루 귀신인 듯???
시청자들 역시도 바로 시메루부터 떠올렸다.
현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태환을 일으켜 주며 오르골을 보았다.
오르골에서 강한 회색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아무 현상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현수가 쪼그려 앉아 천천히 손을 뻗어보았다.
천천히.
손끝이 오르골에 다가갔다.
그리고 닿기 직전.
갑자기 오르골이 작동했다.
띵- 띠디딩- 띵-
맑고 청량한 오르골 소리는 아까보다 유난스레 더 암울하게 들려왔다.
“이걸 여기다 두고 가는 게 나을까요?”
화진이 물었다.
현수는 오르골을 땅에 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메루인지 누군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물건에 악귀가 든 건 맞는 거 같습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일단 두도록 하죠. 악귀가 든 물건을 들고 다녀서 좋을 건 없으니까.”
현수가 말했다.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 무덤들. 한 가지 특이한 게 있어요.”
현수가 묘비들을 보며 말했다.
“뭐죠?”
화진이 물었다.
“묘비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요. 우리가 아는 네모판 형태인 것도 있고, 끝이 둥근 형태도 있어요.”
“으음. 그러네요.”
“어쩌면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하나 사람을 묻은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수가 말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설이 스쳤다.
아직 사람의 형태로 된 귀신은 보지 못한 상황.
회색이나 흰색 아지랑이만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동물의 귀신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얼마 전에 겪었던 개장수 사건만 보더라도 강아지의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동물들도 억울함을 느낄 수 있고, 충분히 한을 품을 수 있었다.
“뭐가 됐든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현수가 제약회사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유리로 된 현관문 앞에는 10단 정도 되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듯했지만 오래 되어 이끼가 가득 올라와 있었다.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요.”
현수가 바닥을 비추며 말했다.
일행들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휘이이이잉-
찬바람이 불었다.
현수는 입을 꾹 다물고 유리문 안 쪽을 비춰보았다.
손전등 불빛이 일부 반사되는 너머로 내부가 보였다.
“무섭네요.”
태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폐가, 퇴마를 많이 하고 다녔어도 이 순간 공포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입구가 열려 있습니다.”
유리문의 손잡이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지만 이미 누군가 따고 들어간 것처럼 풀어져 있었다.
여기에 찬바람 때문인지 유리문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자체 잠금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최근에 누가 연 건가요?”
현수가 손전등을 비추며 물었다.
화진이 다가가 손전등의 열쇠구멍을 확인해 보았다.
“아뇨. 오래전이에요.”
“3년 전? 시메루가 왔다 갔던?”
“그때일 수도 있긴 할 텐데……, 여기 녹이 슬고 망가져 있는 걸로 봐선 그것보다 오래된 것 아닐까 싶어요. 확실하진 않아요.”
화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이런저런 문을 잘 따긴 하지만 사실 전문가는 아니었다.
잔뜩 녹이 슨 자물쇠를 보고 언제 열어두고 방치된 것인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열겠습니다.”
현수가 유리문을 열었다.
그러자 지독한 악취가 확 풍겨왔다.
“욱!”
일행 모두가 코를 틀어막았다.
처음 악취를 맡자마자는 악귀의 냄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악귀가 내는 악취와 다른 종류의 악취도 느껴졌다.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죠?”
화진이 코를 틀어막고 물었다.
“글쎄요. 쓰레기장 냄새 같기도 하고, 음식물쓰레기 냄새 같기도 하고.”
“처음 맡아보는 거예요.”
태환도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 여기도 지독한 악귀가 있는 거 아님????
- 뭔가 비밀이 있을 듯.
시청자들도 악취가 악귀의 흔적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악귀부터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수는 이게 단순히 악귀의 냄새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벅 저벅-
자박 자박-
바닥을 밟을 때마다 온갖 집기와 먼지, 흙, 돌멩이가 밟혔다.
현수는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비추며 벽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곳에는 오래된 컬러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증보제약 실험실 연구원 야유회. 체육대회. 이달의 연구원…….”
현수가 걸음을 옮기며 사진들을 쭉 살펴보았다.
사진 밑에는 붉은 붓펜으로 쓴 듯한 날짜와 행사명이 적혀 있었다.
1970년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진 기록들이었다.
“여기 뭐 이것저것 행사가 많았네요.”
현수가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순간 현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모든 사진의 얼굴 부위가 모두 찢어져 있는 것이었다.
사람의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에는 두 눈만 찢겨 있었다.
현수는 흉가 체험이나 퇴마를 하며 이런 장면을 몇 번 겪어 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악귀와 치열하게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 촬영도 시끄럽긴 하겠네.’
현수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구조가 학교랑 비슷하네요. 여기 중앙 계단으로 2층에 갈 수 있고- 이 건물 뒤로 별관이 있네요.”
태환이 반대쪽 벽에 걸린 안내도를 보며 말했다.
현수가 태환의 뒤에 서며 함께 안내도를 보았다.
“여기가 본관이고 각종 서류 작업이나 실험을 주로 했던 것 같네요. 이 건물 뒤로 별관이 있는데 별관은 1층과 지하1층으로만 구성이 된 듯하고.”
작은 안내도에는 나름대로 성의껏 각 구역을 표시해 두었다.
“근데 별관은 어떤 시설이 있는지 자세히 기록해 두진 않았네요.”
태환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본관부터 둘러보고 별관 가보자.”
현수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