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화 마계 장인 (4)
어차피 누군가는 에센시아 제국군을 비롯한 인간의 연합군과 싸워야 한다.
헤르마늄 광산 역시도 마찬가지.
당장은 마왕 하킨의 세력에 속한 마왕이 주둔하고 있다고 하지만.
목적을 달성한 이상은 굳이 헤르마늄 광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곧 그 마왕이 헤르마늄 광산을 비우게 된다면.
에센시아 제국군은 결국 한숨을 돌릴 여유를 찾게 될 것이다.
마왕 하킨 쪽에서 헤르마늄 광산을 차지할 이유가 없어졌듯.
그들 역시도 헤르마늄 광산에 과한 병력을 주둔시켜 지킬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그리고 만약 그런 상황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과하게 투입한 병력들을 수도로 회군시키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쓰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굳이 남아도는 병력을 놀려 둘 이유가 없으니.
뭐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수도만 계속 지키고 그대로 눌러앉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과연 언제까지 에센시아 제국에서 가만히 앉아서 반격을 하지 않을까를 고려해본다면…….
언제가 되었든 분명히 그들과 부딪히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게 이쪽만 아니면 최선이겠지.
“마왕 케만의 마왕군은 언제 도착합니까?”
내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하던 마왕 하킨이 몇 개의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길어야 4일.”
그 말에 시선을 돌려 전사 형 쪽을 쳐다보았다.
<주호> 전사 형, 4일이면 어느 정도예요?
그러자 전체 지도를 띄워서 거리와 시간을 재보던 전사 형이 곧 대답해주었다.
<방패전사> 산맥 너머 전체 마왕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과 이곳 에센시아 북부의 거리를 고려해본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빠르다. 이런 속도라면 거의 산맥을 일자로 주파하는 속도야.
<주호> 진군 속도를 최대로 높인 모양이네요.
<방패전사> 그 마왕 케만이라는 놈이 그만큼 급하다는 말이겠지.
<주호> 혹시라도 마왕 하킨이 앞서 에센시아 제국을 먹어버릴까 봐요?
<방패전사> 그럴 수도 있고. 실컷 달려왔는데 이미 판이 끝난 상황이면 열심히 달려온 보람도 없지 않겠어?
예상 이상의 진군이라…….
<방패전사> 흠. 역시 너무 빠른가? 문제가 될까?
<주호> 아뇨. 오히려 좋아요. 당장 마왕 하킨 쪽의 마왕을 헤르마늄 광산에서 빼버리면 병력 공백이 생기는데. 이렇게 급하게 달려와 준다니 고맙죠.
그런 전사 형과의 대화와 다르게.
마왕 하킨에게는 다소 우려가 섞인 말을 꺼냈다.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군요.”
내 말에 마왕 하킨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무 빠른가?”
전사 형과 똑같은 물음.
누가 봐도 너무 빠르다.
이건 마왕 하킨 역시 마왕 케만의 진군 속도를 우려하고 있었다는 뜻일 테다.
당장 마왕 케만이 이곳에 오는 순간.
마왕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질 테니까.
물론 그 규모가 두 배가 되니 어떻게 보면 병력 증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절반이 자신의 명령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하나로 뭉쳐져 있는 지금 상태의 마왕군이 훨씬 나을 수도 있으니까.
명령을 내리지도 못하는데 제멋대로 해버리는 아군이라면.
그건 더 이상 아군이 아닐 수도 있게 된다.
잠시 생각하던 마왕 하킨이 의외의 물음을 꺼냈다.
“혹시 그들의 진격을 조금 늦출 방법이 있나?”
당장은 마왕 하킨은 마왕 케만이 이곳 북부로 오는 것을 꺼려하는 듯 보였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직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마왕 케만의 마왕군이 넘어오면 분위기가 꽤 좋지 않을 거다.”
흐음.
마왕군의 사기 문제인가?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에센시아 제국 북부는 확실히 먹어두고 싶은 모양인데.
“이렇게 진군 속도가 빠른 이유가? 그들이 비밀 통로를 통해 오는 중이 아니었습니까?”
“아니. 베링턴 산맥의 비밀 통로를 통해 온 우리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좁은 협곡을 통해서 지나온다고 오래 걸렸지만. 마왕 케만의 마왕군은 아예 뚫려 있는 정상적인 협곡을 통해서 오는 중이니까.”
애초에 마왕 하킨이 베링턴 산맥 협곡 관문을 이미 뚫어둔 상태라.
굳이 마왕 케만이 좁은 통로로 올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진군 속도가 더욱 붙었을 테고.
딱 하나 생각나는 게 하나 있긴 한데.
실현 가능성이 그렇게 높진 않은 데다가.
효과도 그다지 좋진 않을 것 같아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만약 정말 마왕 하킨이 원한다면 말해주겠지만.
그때 마왕 하킨이 손가락을 두들기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협곡을 무너 뜨려보는 건 어떨까.”
“흠, 협곡을 말입니까?”
“어차피 지나올 수 있는 관문은 한계가 있지 않나. 그곳을 날려버리면 넘어오는데 막힐 테니…….”
이 녀석도 진짜 마왕 케만이 오는 게 싫긴 싫은가 보네.
협곡을 날려버린다는 무식한 수까지 떠올리는 걸 보면.
뭐 아예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긴 했다.
잠시 나도 고려는 했던 방법이니까.
물론 그걸 진짜로 실행에 옮기는 건 다른 문제라.
바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래 봐야 겨우 며칠을 벌 뿐입니다. 폭파 흔적도 많이 남을 테고. 마왕 케만의 마왕군이 넘어오자마자 그들과 싸울 겁니까?”
급하게 협곡 관문을 무너뜨리려면 아무리 잘해도 분명히 흔적이 남게 된다.
그냥 자연적으로 무너지는 것과는 아예 그 붕괴 형태부터가 다를 테니까.
후에 마왕 케만이 이걸 모를 리도 없을 테고.
자신들을 막기 위해 협곡을 붕괴시켰다는 걸 알고 나면 그때부터는 마왕군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인데.
잘 됐다고 치고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마왕 케만에게 마왕 하킨을 칠 수 있는 적당한 명분을 쥐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고작 며칠 벌자고 그런 일을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차라리 그렇게 일을 벌일 거라면.
아예 입구만이 아니라 전 협곡을 무너뜨려서 마왕 케만을 비롯한 마왕군을 전부 생매장 시켜버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준비할 시간이 더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마왕 케만을 막을 필요도 없다.
사실 막아서도 안 되지.
앞으로 우리 대신 몸빵해 줄 소중한 자원인데.
“음. 역시 무리겠지?”
“네. 거기다 어차피 마왕 케만을 헤르마늄 광산으로 보낼 생각이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북부의 상황이 좀 부족하더라도 큰 문제는 안 될 겁니다.”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 이거군.”
“그렇죠. 오히려 빨리 와주면 더 고맙죠.”
“고맙다?”
“네. 이대로 헤르마늄 광산이 비게 되면 에센시아 제국군은 분명 북부로 눈을 돌리게 될 겁니다. 전투를 하지 않아 남아도는 병력을 굳이 헤르마늄 광산에 계속 주둔시킬 이유도 없으니까요.”
지금이야 헤르마늄 광산이 더 급하니까 부랴부랴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끌어모아서 갔지만.
곧 그것도 효과가 다한다.
마왕군이 떠나고 하루 이틀 정도는 눈치를 보겠지만.
4일이라면.
계획을 바꿔 북부로 향한 진군 준비를 하고도 충분히 남는 시간이다.
어차피 헤르마늄 광산에 나간 병력을 그대로 북부로 보내버리면 그만이니까.
준비 자체는 어렵지 않을 터.
“오히려 마왕 케만이 빨리 와주기를 바라는 게 맞습니다.”
“흐음.”
할 수 있다면 환영식 정도를 벌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괜히 이쪽에서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모양새라.
굳이 안 하니 만 못하다.
“곧 마왕 케만이 북부에 도착하면 마왕 하킨은 그대로 싫은 투를 팍팍 내주시면 됩니다. 불쾌하다는 뜻을 피력해주시면 더 나을 수도 있겠군요.”
“그건 어렵지 않지.”
그리고는 정말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녀석과 마주치면 항상 하는 일이니까.”
마왕 하킨의 장담을 본 재중이 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불멸> 서로 사이가 아주 안 좋은 모양이네.
<주호> 확실히 그런가 봐요.
그렇게 마왕 하킨과의 대화가 끝나고 난 뒤.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마왕 하킨이 헤르마늄 광산에 나간 마왕에 연락을 넣었다.
혹시나 헤르마늄 광산까지 날아가서 전해야 했는데.
연락이 가능한 마법구 덕분에 그런 꼴은 면할 수 있었다.
-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 그게 무슨 말이지? 네 부탁 때문에 지금 언데드들을 시켜서 팔자에도 없는 광산 입구를 파는 중인데?
흐음.
정말로 광산을 파고 있었던 건가…….
재중이 형도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불멸> 크큭. 진짜 파고 있었잖아?
<주호> 네. 예상이 한 치도 벗어나지 않네요.
그리고 방금 마왕 하킨과의 대화를 들어보니.
분명히 부탁이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는 말은 헤르마늄 광산에 나가 있는 마왕과 눈앞의 마왕 하킨 사이가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전 밖으로 나갔던 수정형 마왕과 육체파 마왕 역시 마왕 하킨에게 존대는 하지 않았었지.
아마도 서열에 차이는 있겠지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사이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라면.
좀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도 있으려나?
이러면 변수가 더 생길 확률도 고려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괜찮겠지만.
상황이 변하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
- 삽질 그만하고 돌아오라는 소리다.
- 아. 젠장. 네가 마왕 헤르게니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사정사정해서 귀찮은 거 무릎 쓰고 왔더니. 뭐? 이젠 돌아오라고?
확실히 상하 관계가 아니네.
그리고 옆에서 마법구를 쳐다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뭔가 미묘한 웃음을 보이면서 마법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 나, 여기 있으니까 그만 파고 돌아와. 계속 파 봐야 아무것도 안 나와.
- 누구……?
갑자기 누군가 자신과 마왕 하킨 사이에 대화를 끼어들자 어리둥절하던 마왕이었지만.
전에 들은 말을 다시 떠올리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설마 마왕 헤르게니아……?
- 헤에. 눈치가 빠르네?
- 말도 안 돼. 대천사의 봉인을 어떻게 스스로……? 내부에서는 절대 깨고 나올 수 없을 텐데…….
아무래도 이 녀석이나 전에 그 수정 마왕 녀석이나 둘 다 그게 가장 궁금한 듯 했다.
그때 마왕 하킨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무례한 질문이다.
이전에 그 수정 마왕이 같은 질문을 했다가 한 소리 들은 걸 잘 기억하기에 이번에는 아예 질문 자체를 막아버렸다.
- 으음…….
- 그런 소리 하고 있을 시간에 빨리 철수해라. 지금 헤르마늄 광산으로 에센시아 제국군 전체가 몰려가는 중이니까.
- 이렇게 빨리?
- 최악의 경우에는 병력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넌 살아서 돌아와라.
-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이군.
- 이렇게 말하고 있을 시간도 부족하다는 뜻이지.
- 알았다. 최대한 빨리 철수하겠다.
제대로 말을 알아먹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혹시라도 남아서 에센시아 제국군을 상대로 뭔가 해보겠다고 했으면 피곤해질 뻔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튀네요.”
“누구보다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놈이라. 병력까지 버리고 튀라고 했으니 바로 알아들었을 거다.”
아마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저 마왕은 제대로 복귀할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마왕 케만을 기다려보죠.”
***
4일간은 큰 문제 없이 헤르마늄 광산에 있던 에센시아 제국군 병력들이 계속 머무르는 듯 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 녀석들이 드디어 베링턴 산맥을 넘어왔다.
엄청난 규모의 마왕군을 이끌고 산맥을 넘어온 마왕들 중.
중앙에 선 마왕이 특히 시선에 들어왔다.
다른 녀석들보다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는 마왕이었으니까.
마치 보란 듯이 위세를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라…….
곧 나와 있던 마왕 하킨을 발견한 녀석이 씨익 웃더니 첫 마디를 꺼냈다.
“이제부터 이곳의 지휘는 내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