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4화 침공 (13)
현재 베링턴 산맥을 넘어와 에센시아 제국 북부에 자리 잡은 마왕의 숫자는 전부 넷이다.
그중 하나는 헤르마늄 광산에 나가 있으니 넘어가고.
그 녀석의 마왕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왕 하킨의 서열이 그보다 높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는 마왕이 둘.
이 녀석들 역시 서열이 낮다고 하더라도 마왕은 마왕이다.
단순히 전력상으로만 봤을 때.
우리가 그들을 압도할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마왕 헤르게니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당장 이 자리에서 저 마왕들과 싸움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적어도 몇은 죽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될 테고.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마왕들을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난다는 투를 확연히 내보이며 자리를 박차고 돌아섰다.
아마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만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이 자리에서 당황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흠. 마왕 헤르게니아. 잠시만 이야기는 들어보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왕 하킨이 대전에서 나가려는 그녀를 바로 붙들었다.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서 기분 나쁘다는 티를 확실히 냈다.
“내가 왜? 마왕들이 베링턴 산맥을 넘어왔다 해서 궁금한 마음에 와봤더니 보자마자 하는 짓들이 내 일을 캐는 거야? 다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의 불만에 아까 전 그녀에게 대천사의 봉인 결계에 대해서 물어보았던 마왕이 발끈했다.
“그건……!”
수정으로 뒤덮인 마왕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바로 마왕 하킨이 팔을 뻗어서 그를 저지했다.
“그만해라.”
그와 동시에 마왕 하킨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기운이 몰아치듯 뿜어져 나와 주변을 내리눌렀다.
쿠구구궁!!
눈앞에서 가만히 있을 때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대전 전체가 이 한 번의 기세로 무너질 것 마냥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역시 마왕은 마왕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다른 마왕을 누를 기세로 힘을 발산한거다 보니 우리에게도 그 압력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피부가 저릿하더니 바로 감각이 일어나면서 위험 신호를 보냈다.
딱히 우리에게 집중해서 쓴 기운이 아니었지만.
이건 내 몸이 그만큼 위협적으로 느꼈다는 거다.
“큭……!”
당연히 바로 정면에서 그런 마왕 하킨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은 마왕 녀석이 인상을 확 구겼다.
동시에 자신 역시 기운을 뿜어내면서 그런 마왕 하킨의 기세에 저항했다.
본인 역시 짜증이 난다는 걸 역력히 피력하면서.
이대로 가만히 두면 두 마왕이 싸울 것 같이 기세를 맞부딪혔는데.
그 순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육체파 마왕이 불쑥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자 두 마왕의 강렬한 기운이 동시에 그 마왕의 갑주를 구길 듯이 할퀴며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 마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중간에 서서 버티더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아마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양쪽 기운을 버티며 두 손만 들어 올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마왕 하킨이 기운을 걷어 들였다.
곧 수정으로 된 마왕 역시도 혀를 차면서 기운을 갈무리했다.
“넌 왜 끼어들어?”
“…….”
마왕의 갑주가 타오르는 것 마냥 열기가 오른 걸 보면 중간에 끼어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마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수정의 마왕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마치 졌다는 듯 수정의 마왕이 두 손을 들었다.
“하…… 알았다. 그만하면 되잖아.”
지금 저 반응만 보면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던 건 아닌 듯 한데…….
확실한 건.
마왕 하킨이 저 수정으로 된 마왕을 확실히 제어하진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 마왕 하킨이 짧게 한숨을 쉬며 그에게 말했다.
“머리를 식히는 게 낫겠군.”
이건 명백한 축객령이다.
그러자 수정의 마왕이 입을 꽉 깨물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대전을 나가버렸다.
굳이 밖으로 나가게 한 건 그에게 발언권조차 주지 않을 생각인 듯 했다.
지금 마왕 헤르게니아가 짜증이 난 건.
누가 봐도 저 수정 마왕의 질문 때문이었을 테니까.
눈치가 조금만 있더라도 이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왕 하킨은 그런 점에서 눈치가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쪽에서 실례를 한 듯 합니다.”
“흥. 알면 됐어.”
마왕 하킨의 마왕 서열이 분명히 높을 텐데…….
저건 아무리 봐도 마왕 헤르게니아를 어렵게 대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슬쩍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 관계가 뭔가 묘한데?
<주호> 형이 봐도 역시 이상하죠?
<불멸> 그래, 마왕들끼리 연장자 우대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을 테고.
만약 그런 식으로 마왕의 서열이 뒤집힌다면.
애초에 마왕 서열 같은 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냥 나이 많은 녀석이 대장 먹으면 되는 일이라.
하지만 지금껏 봐온 마왕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이 관계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보였다.
“이제 좀 마음이 풀렸습니까?”
지금까지는 마왕 하킨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많이 양보한 셈이었다.
굳이 자신의 마왕군에 속한 마왕까지 밖으로 내보낼 정도로.
여기서 더 나가면 마왕 하킨도 어떻게 나올지 우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마왕 헤르게니아도 적당히 분위기가 됐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불필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해.”
이건 자신에 대해서 파고들지 말라는 걸 우회적으로 언급한 셈이었고.
마왕 하킨도 그 말을 알아들을 눈치가 있었다.
“주의하도록 하죠.”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마왕 하킨이 곧 테이블을 마련했고.
아까보다는 훨씬 원활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던 마왕 하킨이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북부의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답했다.
“오면서 네 부하에게 대충 들었어. 다른 마왕군 군단이 산맥을 넘어오고 있다면서?”
“네. 맞습니다.”
그 말과 함께 마왕 하킨이 이를 바득 갈았다.
저건 누가 봐도 굉장히 화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긴 미리 들은 이야기에는 마왕 하킨의 공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녀석이 넘어오는 모양새라.
그걸 곱게 두고 보진 못할 것이다.
“어떤 녀석이야?”
마왕 헤르게니아도 궁금했는지 물어보자 마왕 하킨이 다시 이를 바득했다.
“마왕 서열 4위인 녀석입니다. 혹시 마왕 케만이라고 아십니까?”
“아니. 모르겠어. 정말 그동안 마왕 서열이 많이 바뀌긴 했구나.”
아무래도 마왕 헤르게니아가 있던 시절과는 마왕 서열이 많이 뒤바뀐 듯 했다.
“아무튼 너네 밥그릇에 숟가락 올리려고 온다는 거잖아?”
“그렇겠지요.”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의심의 여지 없이 한 마디를 건넸다.
“확 들이받으면 되잖아. 난 누가 내 밥그릇 건드는 거 못 봐.”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이 맞다.
나 역시도 누군가 내 밥그릇을 건들면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이건 당연히 저 마왕 하킨도 마찬가지일 터.
마왕이라는 자리를 딱지치기로 따내지 않은 이상.
온갖 투쟁을 해서 얻어낸 자리일 것이다.
그것도 저만한 상위 서열을 차지했다면 더 그럴 것이고.
이 사실을 마왕 하킨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치지 않는다는 건.
다른 걸리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습니다만…… 아쉽게도 마왕 케만을 칠 명분이 없습니다.”
“뭐?”
“현재 마성대전이 한참인 건 알고 계실 거라 압니다.”
“그래.”
그리고 다시 짧게 한숨을 쉰 마왕 하킨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만약 우리 쪽에서 마왕 케만의 군단을 치게 되면…… 오히려 적을 도와주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게 무슨……?”
처음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곧 알겠다는 듯 말했다.
“밥그릇 싸움보다는 적의 세력을 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네?”
“그런 셈입니다. 만약 별 것 아닌 잔챙이들이 넘어온다면 제 선에서 압박해 눌러버릴 수 있지만…….”
“그게 안 통하는 상대다 이거야?”
“네. 그렇습니다.”
왜 마왕 하킨이 난감해하는지 우리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성마대전 때문에 적군을 치기 위해 나선 마왕군의 군단을 다른 마왕군의 군단이 치게 되면 과연 어떤 상황이 일어나게 될까.
누가 봐도 이건 적군을 도와주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다.
아니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그러니 저 마왕 케만이라는 놈도 대놓고 남의 밥그릇에 숟가락 올리러 올 수 있는 거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접근을 잘한 셈이다.
마왕 하킨이 자신을 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움직인 거니까.
그렇다고 오는 걸 막을 명분도 없다.
물론 거부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런 거부가 통하지 않을 상대라면 답도 없겠지.
재중이 형도 혀를 차면서 말했다.
“굉장한 놈에게 걸렸네.”
“그러게요. 저렇게 밀고 들어오면 답 없죠.”
뭐 마왕 하킨이 그냥 눈이 돌아가서 마왕 케만의 군단을 쳐버린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는데.
만약 그렇게 될 경우.
두 군단이 잘못하다가 상잔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럼 겨우 차지한 에센시아 제국 북부가 제국군의 연합에 다시 뺏길 수도 있을 테고.
마왕 하킨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웃긴 상황이 발생한 셈이었다.
설마하니 마왕도 명분 같은 걸로 눈치를 보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실제로 눈앞에서 그러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다른 제국이나 왕국들의 관계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정치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솔직히 아직 마왕 하킨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판단은 서지 않았다.
굳이 마왕 하킨이 아니라고 해도.
또 다른 패인 마왕 케만이 있다.
마왕 헤르게니아는 그 둘 중 누구의 손을 잡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양쪽 다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선택을 하려면.
왜 저 마왕 하킨이 저렇게까지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저자세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전 세대의 마왕에게 계속 양보할 리는 없을 테니.
그것만 안다면.
마왕 하킨을 상대하는데 훨씬 수월할 것이다.
슬쩍 앞으로 가서 마왕 헤르게니아의 옆에 섰다.
그동안 가만히 있던 내가 움직이자 그가 조금의 흥미를 보였다.
“이쪽은?”
“내 보좌관. 내 뜻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면 돼.”
“그렇습니까?”
의외라는 듯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던 마왕 하킨에게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마왕 하킨님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주길 원하십니까?”
아마도 단순히 마왕 헤르게니아의 무력을 원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자면 다른 후보지가 너무나 많으니까.
만약 그가 마왕 헤르게니아가 마왕의 전력으로써 이 밥그릇 싸움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면.
난 곧장 손을 뗄 생각이다.
굳이 그런 난장판에 마왕 헤르게니아와 우리가 끼어들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 듯 하자 곧 마왕 하킨도 눈빛을 빛내면서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고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꺼내놓았다.
“제 마왕의 무구를 제작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