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5화 마계 장인 (1)
이전에 봐왔던 마왕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우위라는 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차피 그들은 언젠가는 넘어야 하는 경쟁 상대이자 적에 가까우니까.
만약 지금 같은 성마대전 상황만 아니었다면.
이들은 또 줄기차게 서로를 물어뜯으면서 전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예외인 상황은 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내 옆의 마왕 헤르게니아.
봉인된 지 오래된.
어느 마왕의 라인에 속하지도 않으면서도.
한동안 마왕의 전쟁에서 쏙 빠져 있던 자.
물론 이것만으로도 마왕 하킨의 존대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방금 마왕 하킨이 부탁한 것으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정리되었다.
조금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마왕 하킨을 보면서 되물었다.
“마왕의 무구 말입니까? 솔직히 다른 요구 사항을 말할 줄 알았습니다만…….”
상대의 세력보다 마왕의 숫자가 적다면 마왕의 숫자를 채워주는 게 일반적이다.
뭐 그것도 비슷한 수준의 마왕을 데리고 온다는 전제하에서.
하지만 마왕 하킨의 생각은 확고했다.
내 물음에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도 아주 당연한 사실을 왜 물어보냐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마계 최고의 무구 제작 장인을 두고 다른 요구를 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 아니겠나.”
마계 최고의 무구 장인이라고?
슬쩍 시선을 돌려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자 그녀의 코끝은 한껏 올라가 있는 중이었다.
마치 ‘나 어때? 내가 이 정도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날 보면서 히죽히죽 웃는 것이 이 상황이 마냥 즐거운 듯 했다.
이거 참.
다른 마왕이 대놓고 저렇게 말하는 데 아니라고 하기는 그렇지.
그런데 여기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존재했다.
“흠. 하지만 마왕의 무구는 마왕들이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내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마왕성은 자체에서 대장간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보다 규모가 더 큰 상당히 발전된 마왕성인 경우는 대장간의 규모 역시도 컸다.
마왕성에서 드워프들이 일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했고.
그런 조건에서 마왕의 무구를 만들어내려고 한다면 절대 불가능하지 않을 텐데.
굳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부탁한다?
그것도 지금처럼 마왕의 무력을 빌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뜻은 그녀의 무력보다 오히려 마왕의 무구 제작 능력이 마왕들 사이에서 더 높게 평가된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이해를 했다면.
마왕 헤르게니아의 무구 제작 능력 존재 자체로 그녀가 다른 마왕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대놓고 마왕 하킨이 존대를 하고 그녀에게 무례를 범한 다른 마왕들을 찍어 누를 만큼이나.
마왕 하킨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마왕들 스스로 마왕의 무구를 만들어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 품질이 문제겠지.”
“흠, 결국 품질의 차이라는 거군요.”
“그렇다. 자네도 마왕의 보좌관이라면 마왕의 무구가 다른 무구와의 차이가 뭔지 알고 있지 않나.”
당장 우리 팀과 내가 들고 있는 마왕의 무구 수만 해도 상당수였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서버 최강의 무구에 속했고.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유저들의 등급을 갈라버릴 만큼이나 강력한 것이 마왕의 무구다.
그리고 그런 차이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바로 마왕의 무구에 내장된 스킬.
기존의 무구들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마법과 스킬들은 그 자체로 강력함을 자랑했다.
물론 최상급 베르탈륨으로 만들어지는 마왕의 무구의 무기 공격력도 한몫하기는 하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스킬의 능력이겠지.
“마법…… 이겠군요.”
“그렇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 어차피 비슷한 순도와 양을 가진 최상급 베르탈륨이 들어가는 무구라면 그 성능은 비슷한 편이다.”
이건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다.
무구의 기본 스펙을 만드는 건.
그 무구에 들어간 광물의 종류, 품질, 순도와 양이니까.
베르탈륨만 해도 등급이 나뉘어져 있고.
등급마다 격차는 심하다.
그리고 같은 순도의 베르탈륨을 쓰더라도 그걸 제작하는 장인의 수준에 따라 또 스펙이 갈린다.
만약 이 같은 조건들이 거의 같다고 한다면.
마왕들이 구할 수 있는 베르탈륨 광석의 수준이 비슷하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그 무구의 능력을 가르는 건.
마법적인 처리일 것이다.
그리고 마왕 하킨에 따르면.
그 마법적인 제작을 가장 잘 하는 이는.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 일 것이다.
그것도 마계 전체에서 말이지.
아크 드래곤을 단독으로 만들어내서 단순히 그런 쪽으로만 능력이 특화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주력 분야는 따로 있었다.
순간 마왕 헤르게니아 주위로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후광이 비치는 듯 했다.
길 가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주웠을 때 느끼는 딱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하려나?
내 시선이 닿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인상을 확 구기면서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볼까나?”
“아냐. 신경 꺼도 돼.”
“흐응? 되게 신경 쓰이는데?”
“잘못 본 거야.”
방금 황금 덩어리를 주워든 광부의 심정을 쟤가 어찌 알겠는가.
마왕의 무구 제작 달인이 존재라…….
이건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아니다.
유저들이 돈 주고도 못 사는 마왕의 무구를 직접 만들 수 있는 데다가.
그 능력이 최상이다.
다른 상위 서열의 마왕이 보증할 정도로.
그때 마왕 하킨의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그리고 현재 최상위 서열 마왕들이 쓰고 있는 마왕의 무구들은. 사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제작한 무구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마왕 하킨의 말을 들은 순간.
나와 우리 팀 모두 놀란 눈빛으로 마왕 헤르게니아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왕 헤르게니아의 반응이 또 가관이었다.
“헤에? 걔들이 아직도 그걸 쓰고 있다고……? 만든 지가 이미 몇백 년이나 지났는데.”
이건 오히려 마왕 헤르게니아가 더 놀란 모습이랄까.
마치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한 잡동사니를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의 물건을.
갑자기 누군가 보물이라고 하면서 치켜세워주는 딱 그런 기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흠. 마왕 헤르게니아가 만들어낸 무구들은 아직도 상위 마왕들 사이에서 대물림 되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그 무구의 능력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하긴 그렇긴 해.”
방금의 말투에서 자신이 만든 무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하긴 대부분의 상위 마왕들이 쓰는 무구가 마왕 헤르게니아가 만들었다고 하니 그 자부심이 어디 가겠는가.
그때 전사 형이 조금은 웃긴 말을 했다.
<방패전사> 호오. 메이드 인 마왕 헤르게니아가 최고잖아?
<주호> 하하…… 그런가 봐요.
<방패전사> 흠. 그럼 나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할까?
당연히 해볼 법한 생각이었다.
상위 서열 마왕들이 쓰는 무구를 만들어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물론 이건 우리에게 최상급 순도를 가진 베르탈륨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마왕 헤르게니아가 무구 제작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재료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라.
<주호> 화련에게 베르탈륨 광산을 좀 더 파고 내려가 보라고 해야겠어요.
현재 화련이 베르타륨 광산에서 캐고 있는 건 일반적인 수준의 베르탈륨 광석들이었다.
마법 결계의 재료 같은 소모품.
혹은 낮은 수준의 무구를 대량으로 만들 정도의 광석들.
반면 더 나은 순도의 베르탈륨 광석을 구하려면 전에 그랬듯이 최하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마룡 때문에 완전히 무너진 베르탈륨 광산을 다시 파 내려가는 건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여차하면 카샤스 황제에게 말해서 화련의 영지에 지원을 대폭 늘리는 쪽으로 해봐야 하려나?
마왕 헤르게니아라는 최고의 무구 제작자가 있는 이상.
그에 걸맞는 재료를 찾는 건 우리의 일이다.
마왕 하킨이 다시 빤히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다가 자신의 검을 꺼내 보였다.
일반적인 형태의 무구와 달리 기형적인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이질적인 검이라…….
그런 특이한 모양이 그냥 폼으로 만든 건 아닐 테고.
“마왕의 능력에 맞는 무구는 그 마왕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말에 마왕 헤르게니아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마왕들에게는 무구의 존재는 목숨을 지킬 수 있는 무구일 테니까.
거기다 상위 마왕이 될 수 있는 징검다리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좋은 무기에 목을 매는 건 유저나 마왕이나 별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이 무구는 예전에 마왕 헤르게니아께서 남긴 유산이죠.”
그러자 다들 놀란 눈빛으로 마왕 헤르게니아와 마왕 하킨의 무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자기 자기 무기를 꺼낼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설마 저것도 마왕 헤르게니아가 만들었다니.
이젠 놀랍다는 말도 지겨울 정도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손을 내밀자 마왕 하킨이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그의 무기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목숨과도 같은 무구를 순순히 넘겨주다니…….
이것만 봐도 마왕 하킨이 얼마나 그녀를 우대하는지 잘 보이는 대목이었다.
보통은 다른 마왕이 무구를 넘겨달라고 하면 미쳤냐면서 목부터 칠 테니까.
물론 무구 제작자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려나.
잠시 마왕 하킨의 무기를 살펴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발견했는지 바로 혀를 찼다.
“쯧. 험하게 굴렸네.”
그러자 마왕 하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마치 자신의 훈장을 본 이에게 기꺼운 웃음을 짓는 모습이랄까.
“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해. 문제는…… 이 녀석. 수명이 얼마 안 남았네.”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의 평가에 오히려 마왕 하킨이 슬퍼하기보단 기쁜 표정을 드러냈다.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이 지경이 될 동안 안 고치고 뭐 했어?”
“음. 물리적인 부분은 어떻게든 고칠 수 있었습니다만…….”
“그래. 마법 결계 문양 쪽이 완전히 망가져 가네.”
“네. 그쪽은 도저히 고칠 수가…….”
둘의 대화를 듣자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마왕 하킨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저렇게 쩔쩔 매는지.
자신의 마왕의 무구가 수명이 다해 가는데.
고칠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 치명적인 일이었다.
거기다 조만간 다른 상위 마왕이 헤링턴 산맥을 넘어 에센시아 제국 북부로 넘어올 테니.
그를 상대로 한다면.
이 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 마왕의 무기를 과연 마왕 하킨이 얼마나 신용할 수 있을까.
만약 혹시라도 그 마왕과 싸울 일이 생겨서 싸우다가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물론 당장 저 무기가 박살난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랬다면 마왕 하킨이 굳이 베링턴 산맥을 넘어 에센시아 제국으로 넘어오지…….
순간 뭔가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기의 상태가 좋지 않다라.
그런데 굳이?
더 험한 전쟁이 있을지도 모르는 에센시아 제국으로 넘어왔다?
앞뒤가 안 맞는데.
자신의 무구 상태가 걱정됐다면…….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스치자 내 시선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가서 닿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왕 하킨에게 물었다.
앞뒤 상황을 전부 고려하면.
아마도 이게 답일 것이다.
“마왕 하킨. 당신은 처음부터 마왕의 무구를 고쳐줄 장인을 찾아 제국 북부로 넘어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