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5화 밀수 (8)
서버 내에 타란 제국 황제 카샤스와 에센시아 제국 황녀 레오나의 약혼 발표가 나자 게시판이 한 차례 크게 들썩였다.
아이샤 타란에게 최대한 빨리 에센시아 제국으로 이 사실을 전하라고 했고.
당연히 이 사실은 비밀리에 전달되는 연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버의 모든 유저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중간에 이야기가 새어나간 것이 아니라.
전사 형에게 게시판에 풀어달라고 한 거니까.
앞으로 조금 더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유저들의 관심을 한 번 정도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는 나쁘지 않은 이슈니까.
그리고 이 사실은 타란 제국이 약해져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타 왕국들의 유저들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들의 반응을 미리 생각해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타란 제국과 에센시아 제국이 합쳐진다면…… 다들 머리가 꽤 복잡해지려나?”
유저들은 방송을 통해 타란 제국의 수도가 폐허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유저들이 아닐 테고.
왕국에서 요직에 있거나 혹은 왕국을 통째로 먹어치운 유저들은 반드시 이 기회를 살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당장 타란 제국을 어떻게든 베어 먹어 보려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던 유저들은 크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내전으로 약해진 타란 제국 단독이라면 모를까.
혈맹으로 묶인 에센시아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는 건.
바로 목을 날려달라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 에센시아 제국이 타란 제국을 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저들이 있다면 이것도 이야기가 달라지긴 했겠지만.
에센시아 황제가 유저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줄 리는 절대 없었다.
그 황제 역시 유저들을 우습게 여기는 건 마찬가지라.
서로의 상황을 모르는 이들끼리 힘이 합쳐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
그리고 이렇게 타란 제국과 에센시아 제국이 합쳐지게 된다면.
오히려 다른 왕국이 두 거대한 제국에 눈치부터 봐야 하는 상황이 된다.
감히 전쟁을 한다는 뉘앙스라도 내비쳤다가는 그날로 대륙에서 왕국의 지도가 사라져버릴 테니.
당연히 전쟁을 준비했던 유저들의 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 와, 대체 무슨 일이냐.
- 약혼이라고? 뜬금없이?
- 갑자기? 이게 말이 돼?
- 성마대전에 두 제국이 합쳐진 적도 없잖아.
- 역사가 개판 됐다더니 진짠가 보다.
- 전쟁 준비한다고 군수품에 자금 있는 대로 끌어다 썼는데. 망했다.
- 진짜 미치겠네. 당장 왕국에 쌓여있는 물자들 다 어떻게 하냐.
- 뭘 어째? 헐값에 내다 팔아야지.
- 하. 손해가 얼만지 알아? 급하게 산다고 웃돈 주고 가져왔다고.
- 어쩐지 장비들 가격 확 올라가더라. 니들 때문이었구만?
- 지금 우리 쪽 연합 간부들 죄다 멍 때리는 중이다. 무슨 개 같은 상황이냐고.
- 이때 아니면 타란 제국 언제 건드려 봐?
- 망한 듯. 타란 제국이 에센시아 제국하고 합쳐지면 건드는 순간 바로 멸망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하던가.
다들 한 번은 타란 제국을 건드려볼 생각이었던 듯 했다.
물론 단독으로는 힘들 테니 몇몇 왕국들이 연합해서 작전을 짜둔 듯 했고.
그 와중에 급하게 전쟁 물자를 사들인다고 손해를 많이 본 것도 있어 보였다.
뭐든지 억지로 구하게 되면 가격이 올라가는 건 당연하니까.
그것도 한 곳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왕국에서 물자를 구입했다면 그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을 테지.
유저들이야 이 손해를 타란 제국을 먹으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고 준비했겠지만.
지금은 그 모든 준비가 영구적인 손해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 자체를 못 할 상황이니까.
당장 타란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면.
손해 좀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가진 모든 것을 놓고 성마대전에서 아웃이다.
그만큼 카샤스 황제와 레오나 황녀의 약혼 발표는 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유저들의 반응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다가 이내 방송을 껐다.
우리가 내놓은 임시방편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략적으로 확인했으니까.
확실히 급한 불은 껐다.
만약 이대로 그냥 두었다면.
에센시아 제국이 먼저 타란 제국을 치기 시작했을 테고.
거기에 동조해 다른 왕국들이 들불 일어나듯 동시다발적으로 그 물결에 동참했을 것이다.
큰 형님이 앞에서 먼저 나가서 싸워주는데.
겁날 것도 없을 테지.
물론 에센시아 제국은 그런 왕국들을 이용해 먹으면서 자신들의 손해를 최대한 줄이려 했을 건 뻔한 일이다.
둘 다 서로를 이용해 먹는 상황이 일어나며 협조를 하면.
결국 불리한 건 타란 제국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다르다.
에센시아 제국이나 주변 왕국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절대 먼저 전쟁에 나서지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에센시아 제국은.
가만히 놔둬도 카샤스 황제와 레오나 황녀가 약혼하는 판에.
굳이 이 판을 엎어버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휴. 급한 불은 껐고. 이제 다른 쪽을 진행해야겠는데.”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가 몇 가지 그림이 그려지다가 하나로 합쳐지니 다시 눈을 떴다.
특별한 변수만 없다면.
충분히 해볼 만 할 것 같다.
물론 생각과 달리 움직일 녀석들이 꽤 있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큰 줄기에서 문제가 되진 않겠지.
그들 역시 장기판의 말이 되어서 뛰어줄 테니까.
자신들이 말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가장 걸리는 건 역시 천사들인가.”
이쪽은 정보가 너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튈지 솔직히 모르겠다.
중간에 상황을 보면서 일일이 계획을 수정하는 방법밖에 없으려나?
곧 몸을 일으켜 VRS로 가서 몸을 눕혔다.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647.
> 로딩 중…….
다시 접속하니 아직 우리 팀 중 아무도 접속을 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목록에서 사장님에게 연락을 넣었다.
<카이저> 푹 쉬다 왔냐?
<주호> 네. 일은 어떻게 됐어요?
전에 나가기 전에 에센시아 제국에 머물고 있던 사장님에게 한 녀석을 만나보라고 얘기했었다.
<카이저> 흠. 에센시아 제국 기사단장이 마족이라니. 듣고도 영 믿기지 않았는데.
<주호> 제 정체는 바로 밝혔죠?
<카이저> 그래. 네 말대로 하니 풀풀 날리던 마기를 집어넣더구나. 여차했다가 목 날아갈 뻔했다.
베인 녀석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마족이니 뭐니 하면 바로 칼부터 들 수밖에 없을 터.
그때 사장님이 내 정체를 밝혀서 피가 튀는 상황은 바로 피할 수 있었다.
<주호> 전달해달라는 건 어떻게 됐어요?
<카이저> 에센시아 제국 협곡 비밀 통로 위치 말이지?
<주호> 네.
<카이저> 지도를 받아보더니 흡족한 듯 크게 웃더구나. 뭐라더라? 역시 마왕님이라던가…….
<주호> 하하…….
머쓱한 기분에 그냥 웃어넘겼다.
마왕 행세를 하는 것도 참 어렵구나 싶어서.
<주호> 그리고 다른 한 가지도 전달하셨어요?
<카이저> 그래. 같이 전달했지.
<주호> 어땠어요?
<카이저> 아예 그 마족이 바닥에 철퍼덕 엎드려서 절하던데?
<주호> 하하…….
<카이저> 뭐라더라? 찬양하는 마왕님? 어떻게 마족의 혼을 그렇게 빼놨는지 보고 있으면서도 신기하더라니까.
<주호> 이번에 던져준 먹이가 엄청 커서요.
<카이저> 흠. 밀수…… 말이지?
사장님도 대략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전달받았었다.
두 제국을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거의 다 알고 있었고.
당장 에센시아 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기 때문에 사장님은 중요한 사실들은 모두 알고 있어야 했다.
베인에게 전달한 베르탈륨 밀수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
특히 앞으로 에센시아의 드워프들과 연계해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카이저> 이번에 일을 아주 크게 벌렸더구나.
<주호> 네.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요. 에센시아 제국의 상황은 어때요?
<카이저> 네가 나가기 전에는 전쟁 준비가 눈에 보일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약혼 발표가 나고 나서는 거의 다 멈췄어. 매입하던 군수 물자들도 올스톱이고. 성마대전에서 불러들였던 영웅들도 지금 다 손가락 빨고 있더라.
<주호> 흠. 그렇게까지 했다는 건가요.
<카이저> 아예 후계 순위가 높은 황자와 황녀들까지 죄다 불러들였다니까?
<주호> 미쳤네요.
설마 성마대전에서 싸우는 영웅들까지 불러들였을 줄이야.
그것도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황자와 황녀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아예 확실하게 타란 제국을 누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카이저>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베르마 제국에서 항의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따라온 베르마 제국의 사절들이 대놓고 대전에서 드러누웠으니 말 다 했지.
<주호> 베르마 제국에서 항의할 만도 하죠. 당장 마왕군을 막아야 하는데 지원 전력을 빼간 거니까요.
그것도 영웅급들이라면.
전력 공백이 상당히 크다.
아마 지금 베르마 제국의 전선 중 몇 곳은 크게 구멍이 났을지도.
거기다 전쟁은 작은 균열부터 시작해서 점점 크게 상처가 벌어진다.
이 일이 과연 성마대전의 최전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일단 부정적인 상황이라는 건 확실하다.
<카이저> 막상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불러들였는데 당장 아무것도 안 하고 대기만 시켜놓으니 더 문제지.
<주호> 베르마 제국에서는 이 녀석들이 지금 뭐 하는가 싶겠네요.
<카이저> 잘못하면 에센시아 제국과 베르마 제국 사이에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문제야.
욕 처먹으면서까지 영웅급 병력을 빼갔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가만히 세워놓고 놀린다라…….
이건 베르마 제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항의 수준을 넘어서 베르마 제국에서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겨도 당장 에센시아 제국은 할 말이 없어진다.
<주호> 에센시아 제국에서 꽤 많은 보상을 해야겠어요.
<카이저> 그래. 그렇게라도 베르마 제국을 달래야지. 아니면 타란 제국이 아니라 당장 베르마 제국하고 전쟁 날 판이다.
뭐 베르마 제국하고 전쟁이 나면.
나야 고맙지만.
두 거대 제국이 맞붙는 건.
그만큼 타란 제국에 시간을 벌어주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베르마 제국이 최전선에서 물러나게 되면.
성마전쟁이 꼬일 대로 꼬여버리게 된다.
당장 베르마 제국이 발을 빼면 마왕군이 빠르게 남하해서 대륙의 절반을 먹어치울 테니.
아마도 그런 최악의 상황은 두 제국 모두 피하고 싶을 것이다.
<주호> 적당히 양보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겠네요.
<카이저> 그렇겠지. 이 거대한 틀이 깨지는 건 두 제국 다 부담일 테니.
<주호> 그럼 그쪽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계속 알려주세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베르마 제국이 배 째라고 드러눕는 경우도 상정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땐 모든 계획을 뒤엎어야 하니까.
<카이저> 알았다. 그럼 밀수 쪽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주호> 헤르마늄 쪽은 아직 스톱요. 이건 마왕군이 침략해야 성사될 거예요.
<카이저> 그럼?
<주호> 베르탈륨 먼저 시작합니다. 화련이 준비한 몇 개의 페이퍼 국가들을 거쳤다가 자연스럽게 마왕군으로 흘러 들어갈 거예요.
<카이저> 흐. 간만에 큰돈 만지겠구나.
그리고는 사장님에게 물었다.
<주호>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마왕은요?
<카이저> 흠. 베인이 몇몇 마왕 목록을 알려주던데. 그중에서 아주 급한 녀석이 하나 있더라고.
<주호> 그래요?
<카이저> 안 그래도 당장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연락 왔다.
<주호> 그것참 반가운 소리네요.
혹시라도 모든 마왕들이 거절해버리면 어쩌나 했다.
그럼 베인 녀석이 단독으로 마왕군을 상대로 밀수 일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그건 어렵겠지.
<주호> 그럼 그 마왕과 자리를 한 번 만들어주세요.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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