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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162화 (1,150/1,404)

#1162화 신의 파편 (6)

음.

이건 생각 외인데?

설마하니 마왕 헤르게니아가 베인 녀석의 제안을 그대로 걷어찰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원 역사를 고려해 보다면 당연히 마왕 헤르게니아가 마족 베인을 따라서 마왕군에 합류를 하게 되고 마왕 데칸과 협력을 했어야…….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확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내가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건 바로 나라는 존재.

원래 일어났어야 하는 역사와 전혀 다른 시점에서 개입한 나라는 존재가 아마도 지금의 이 변화를 이끌어낸 듯했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봉인에서 풀려나는 시점도 너무 빠른데다가.

정작 그 봉인을 풀어준 건 마왕 데칸이 아닌 바로 나였으니까.

마왕 데칸이 아닌 내게 호감도가 엄청나게 오른 것만 봐도 이건 확실히 차이가 났다.

녀석들이 했어야 할 일은 내가 중간에 해버린 셈이라.

그러니까 지금의 마왕 헤르게니아의 거절은.

순전히 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마왕 헤르게니아가 마왕 데칸에게 협력해야 하는 이유도 사라졌다.

애초에 자신을 구해준 게 마왕 데칸이 아닌데 굳이 협력할 이유 자체가 없다.

“지금…… 싫다고…… 하셨습니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베인 녀석의 평정이 깨져 있었다.

뭐 여기선 마왕 헤르게니아가 당연히 협력할 거라 생각한 베인 녀석이 이상한 거지.

절대 마왕 헤르게니아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왜? 불만 있어?”

당당한 마왕 헤르게니아의 태도에 마족 베인도 난감한 듯 표정을 구겼다가 결국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억지로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성마대전 중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마왕님의 협력이…….”

“그걸 아는 녀석들이 지금껏 구경만 했어?”

마왕 헤르게니아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족 베인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나도 대충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예측이 되는데 베인 녀석이 과연 모를까 싶기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그건 마왕군의 사정이…….”

“필요할 때만 찾는 너희 사정 말이지?”

“……큭.”

이건 솔직히 할 말이 없기는 하지.

그동안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곳 헤르마늄 광산에 봉인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한 번도 찾지 않다가 성마대전이 일어난 뒤에야 나섰으니.

솔직히 그 이전에 봉인을 깨려고 했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결국 이전에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필요에 의해서 찾은 셈이었다.

마왕 헤르게니아의 불만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고.

그리고 지금껏 그녀를 봉인에서 꺼내지 않은 건.

다른 마왕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강한 마왕을 하나 더 풀어놔 봐야.

자신들에게 유리한 점이 하나도 없을 테니.

특히 엇비슷한 위치에 있는 마왕일수록 더 그런 경향이 컸을 것이다.

뭐 봉인에서 풀어서 자신들의 편에 서게 하는 방법도 없진 않겠지만.

대천사들과의 전쟁까지 염두에 두고 마왕 헤르게니아를 구해내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마왕 하나 구해내자고 대천사들과 싸운다?

글쎄…….

이건 마왕들 성향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도 하고.

결국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적용해서 마왕 헤르게니아는 그동안 이곳에 무기한 봉인 당해 있는 셈이었다.

그걸 풀어준 건 정작.

같은 마왕들이 아닌.

나였고.

여기서 마왕 헤르게니아가 불만을 가져도 전혀 할 말이 없을 테다.

“하지만 대천사들을 상대하려면 마왕 헤르게니아 님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마왕 데칸 님의 말씀이…….”

그런 베인 녀석의 말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그냥 단칼에 말을 잘라 버렸다.

“그럼 마왕 데칸에게 직접 오라고 해.”

“네?”

“난 갈 일 없으니까 꼬우면 직접 오라고.”

마왕 헤르게니아의 대답에 마족 베인의 안색이 까맣게 죽어 버렸다.

어쩌면 마왕 헤르게니아를 풀어주는 일보다 이게 베인 녀석에겐 더 힘든 미션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성마대전이 한참인데 마왕군의 군단장 보고 적지 한가운데로 오라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안 그래도 그게 힘들어 마족 베인을 보낸 것이 아닌가.

“하아. 마왕님. 안 되는 걸 아시면서…….”

“안 되면 되게 만들어. 그게 네 일 아냐?”

마족 베인이 바로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마왕 데칸 님께 그 말을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제 목이 날아갈 겁니다.”

“그건 네 사정이고.”

이렇게 보니 마족 베인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절절매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하긴.

원 역사대로 제대로 구출했다면 이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지금은 압도적으로 마왕 헤르게니아의 입장이 좋았다.

임무를 실패한 마족 베인도 자신의 목 걱정을 해야 하니 저렇게 매달릴 수밖에.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가 손을 들어 올려 둘의 대화를 끊었다.

“왜?”

“아, 맡겨두면 하루 종일 그러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곧장 마족 베인이 내 쪽을 바라보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왔다.

음.

아쉽게도 난 네놈 편이 아니란다.

그래도 일은 해결해야 하니까.

“베인.”

“네, 마왕님.”

“여기서 아무리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뭐 그렇다고 내가 앞으로 일을 도와줄 자네를 그냥 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 마족 녀석을 써먹으려면.

그만큼 당근도 던져줘야 한다.

이번 경우는 그냥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긴 해도.

뭔가의 기대를 하는 마족 베인을 보고는 바로 말을 꺼냈다.

“일단…… 넌 이곳에서 마왕 헤르게니아를 못 본 거다.”

“예?”

순간 무슨 말인가 모르겠다는 듯 녀석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마왕 헤르게니아 역시도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를 못 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아, 그러니까. 넌 아예 마왕 헤르게니아가 봉인에서 나오는 걸 못 본 거야. 정확하게는. 봉인 자체를 손도 못 댄 거라고 치자.”

“무슨 뜻인지…….”

“쯧.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사실 간단해. 넌 아무것도 못 본 거고. 여기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다.”

이어진 내 말을 모두 들은 마족 베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설마 전부 모른 척하라는 뜻입니까?”

“그래. 이해했네. 너만 모른 척하면 다 해결되는 일 아냐?”

“……흠.”

베인 녀석이 이번에는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알아듣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난 일이 없으면 보고할 일도 없겠군요.”

“그렇지.”

다행히 머리가 아주 안 돌아가는 녀석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 정도도 못 알아들으면 진짜 쥐어 패서라도 말을 듣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에센시아 제국에 침투하는 마족이라 기본적으로 돌아가는 머리는 있는 듯했고.

“제가 마왕 헤르게니아 님을 본 적이 없으니 협상 자리를 만들 필요도 없군요.”

“오케이. 아주 좋아.”

만약 베인 녀석이 여기서 마왕 헤르게니아를 발견했고 그에 대해서 보고까지 했는데 협상에 실패했다면 그건 그대로 녀석의 실책이 된다.

하지만 애초에 봉인 자체에 접근조차 못 해서 그녀의 거취조차 모른다면?

그냥 협상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거다.

보고할 일도 없고.

뭐 봉인에 접근을 못 해서 욕은 좀 먹겠지만.

적어도 마왕 헤르게니아의 거부로 목이 날아갈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지.

“그리고 솔직히 까놓고 네 능력으로 대천사의 결계를 부수고 마왕 헤르게니아를 신의 봉인에서 꺼내올 수 있다고 마왕 데칸이 믿어 주기는 하겠어?”

“……그렇긴 합니다만.”

당장 자기가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 테다.

당장 신의 파편이 있는 봉인의 신성 지대에 접근조차 못하는 녀석이 대천사의 결계에 봉인까지 깬다?

이건 베인 녀석의 능력치를 한참 상회하는 상황이 되는데 과연 마왕 데칸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까.

당연히 뒤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난 그 상황이 오는 게 그다지 달갑지 않고.

안 그래도 처리 못 해 신경 쓸 것들이 많은데.

여기다가 마왕군까지 겹치면 진짜 일이 귀찮아지거든.

“알아들었으면 이제부터는 알아서 행동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하하. 역시 마왕님이십니다.”

순간 아주 약간의 적대적인 시선이 남아 있었던 마족 베인의 태도가 싹 씻기듯이 사라져버렸다.

《 마족 베인과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마족 베인과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마족 베인과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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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호감도 시스템의 울림들로 녀석이 얼마나 만족했는지 잘 알 수 있었고.

녀석에게 걸린 책임과 부담을 싹 없애주는 방법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그런 나와 마족 베인을 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입을 벌리고는 놀란 듯 나를 쳐다보며 감탄했다.

“와……! 잔머리 엄청나.”

“그거 칭찬 맞지?”

둘 사이에 냉랭하게 변할 수 있었던 선택지 자체를 아예 없애 버림으로 오히려 사이를 좋게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이젠 비밀을 위해서라도 서로 협력을 해야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

그리고 후에 마왕 헤르게니아의 정체가 드러난다고 해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

어차피 베인 녀석은 나온지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라.

반대로 그렇다고 한들 가급적 정체가 들통 나면 곤란하니 베인 녀석이 적극적으로 마왕 헤르게니아를 도와줄 것이다.

녀석도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을 테니까.

적어도 에센시아 제국에 있는 이상.

앞으로 베인 녀석의 도움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서로 윈윈인 상황이지.

“좋아. 여긴 해결됐고. 이제 나가자. 기다리는 녀석들도 있고.”

내 말에 베인 녀석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문으로 간 기사단들 말입니까?”

“어. 참고로 그쪽은 여기 상황을 전혀 몰라.”

애초에 중요한 장소로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으로만 골라서 가고 있을 테니.

여기 지도를 미리 준 것도 다 우리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괜히 대천사의 결계까지 도달해 버리면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다.

우리와 달리 기사단들은 진짜 작정하고 뛰어들 게 뻔하니까.

그럼 당연히 대천사의 결계가 반응을 일으키고.

대천사가 날아오며 거의 난장판이 되었겠지.

“너도 표정 관리 잘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이미 죽어 버린 기사단들의 장비 중 그나마 멀쩡한 것 몇 개를 추려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던져 주었다.

“이건 왜?”

“잠시 입고 있어. 나갈 때는 기사단인 척해야 하니까.”

우리가 들어왔을 때 기사단 위장을 했듯이.

마왕 헤르게니아도 같은 위장이 필요할 것이다.

거기다 기사단들이 다 죽어 버려 의심 받을 확률이 적기도 하고.

기사단장과 함께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 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마왕 헤르게니아를 완전히 위장시킨 뒤 원래의 문으로 돌아 나오자 이미 바깥으로 나와 있던 우리 팀과 3기사단, 7기사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전사 형이 앞서 나와 우리를 반겨주었다.

“생각보다 늦었네.”

“네, 뭐 조금 걸렸어요.”

“일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어요.”

“오케이.”

잘 됐다는 말로 알아들은 전사 형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내 뒤를 본 전사 형이 귓속말로 물었다.

<방패전사> 저게 그 마왕?

<주호> 네. 가급적 눈에 안 들어오게 해 주세요.

<방패전사> 기사단들 사이에 섞이면 전혀 모를 거다.

<주호> 좋네요.

“세상에. 2기사단장이 죽다니…….”

“아예 전멸인데?”

“휴. 겨우 셋이 살아온 건가…….”

“우리가 저쪽으로 안 가서 다행일지도.”

실제로 우리 쪽의 기사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서 그런지 다들 침울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 안에 마왕이 섞여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곧장 기사단장인 아이라 루벤과 타룬 벡스터를 바라보며 애써 슬프다는 듯 말을 꺼냈다.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군요. 그래서 이쯤에서 철수를 제안합니다.”

여기선 다 해먹었으니 이만 나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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