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1화 신의 파편 (5)
설마하니 대놓고 마왕 헤르게니아가 날 따라다닌다고 할 줄이야.
그녀에게 적당히 협조만 얻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지금 상황은 내게 꽤 좋게 흘러갔다.
다른 것도 아닌 무려 마왕이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점도 있었다.
마왕 헤르게니아의 존재를 어떻게 숨기고 데리고 다닐 수 있을까.
이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
“일단 빠져나가자. 너도 여긴 더 있기 싫을 것 아냐.”
듣기로 하루 이틀도 아닌 수백 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다는데 나 같으면 다시 돌아보기도 싫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왕 헤르게니아가 질색하는 표정과 함께 대천사의 결계를 노려보았다.
“내 언젠가 저것들을 싹 죽여 버릴 거야.”
대천사 이야기만 나오면 그냥 이를 가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만날 녀석들은 쉽게 살아 나가진 못할 듯했다.
그렇게 마왕 헤르게니아를 데리고 지하를 점점 빠져나오자 그녀에게서 점점 짙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예상했듯이 신의 파편을 봉인해 둔 곳에서는 제대로 힘을 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딱 신성이 가득한 그 구역을 벗어나자마자 이렇게 존재감을 뿜어내는 것을 보면.
그녀 역시도 한껏 기지개를 펴더니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와.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바깥 공기야.”
“분신으로는 꽤 자주 나오지 않았나?”
적어도 이곳 헤르마늄 광산의 지하 정도에서는 마음껏 돌아다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건 그거고. 본체로 마시는 공기는 달라.”
“그렇다고 하고.”
“이익. 다르다니까.”
왠지 한 마디도 지기 싫어하는 여동생이 있으면 딱 이런 느낌이려나.
그동안 봤던 위압적이고 강렬했던 마왕들과 비교해 보면 마왕 헤르게니아 정도면 순하디 순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뭐 나 역시 이쪽이 상대하기 훨씬 좋기도 하고.
지하를 쭉 빠져나가며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형, 마왕 헤르게니아도 완전히 빼냈어요.
<불멸> 다른 문제는 없었고?
<주호> 네, 대천사의 결계도 완전히 무효화했어요.
그리고 간략하게 설명해 주자 재중이 형도 꽤 놀랍다는 듯 웃어 보였다.
<불멸> 대천사들이 나중에 와서 깜짝 놀라겠는데?
<주호> 그렇죠.
신의 파편과 마왕 헤르게니아가 동시에 아무 증거도 없이 증발해 버렸으니.
<불멸> 흐음. 대천사들이 보면 마왕 헤르게니아가 신의 파편을 들고 도망친 줄 알겠군.
<주호> 아무래도 그렇겠죠.
당장 대천사의 결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사라진 건 둘밖에 없으니까 분명히 그렇게 의심을 할 것이다.
어쩌면 무슨 방법으로 대천사의 결계를 빠져나갔는지 더 궁금해할 수도 있을 테고.
“뭘 그렇게 열심히 중얼거려?”
“응? 아. 조만간 합류할 사람들하고 이야기 좀 했어.”
“헤에. 그거 신기하네.”
음.
마왕 헤르게니아는 유저들간의 귓속말을 인식할 수 있는 거려나?
전에 아스티아도 그러더니.
아마 특수한 계열의 NPC들은 기존의 NPC들보다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은 듯했다.
그때 잠시 멈칫하고는 그녀에게 한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이거……
가능하려나?
아스티아 때도 가능했던 걸 보면 아마도 될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는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파티 신청을 걸어 보았다.
그러자 묘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손가락을 들어 뭔가를 가리켰다.
“붉은 실이 보여.”
“그래?”
이건 분명히 아스티아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NPC를 파티에 넣을 수 있을 때 보이는 그 붉은 실 시스템.
처음 보는 시스템에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한 마왕 헤르게니아가 자신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이거 받으면 되는 거야?”
“뭔지는 안 물어보고?”
“뭔데?”
“음. 설명하자면 너하고 내가 한 팀이 되는 거지.”
“신기하네.”
그러더니 곧 마왕 헤르게니아가 파티 시스템을 받아들였다.
《 파티장 주호가 새 파티원 마왕 헤르게니아를 받아들입니다. 》
설마하니 마왕까지도 이런 시스템이 적용될지는 몰랐다.
기쁨과 놀라움 반이 섞인 웃음으로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고는 곧 그녀의 레벨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890……?
뭐 이런…….
아무리 시간이 지나면서 NPC들의 레벨대가 많이 올라간다고 해도.
이 정도 레벨이면 거의 극에 달한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마왕이라는 베이스를 바탕으로 레벨 890이면 말 다한 거지.
기본 능력 자체가 다른데 레벨까지 높아 버리면 손댈 수도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흐음.
그럼 설마 대천사들도 이 수준에 버금갈 정도로 강할 거라는 말이 되나?
아님 이 마왕 헤르게니아가 특이하게 강할 경우도 배제할 수 없었고.
혹시나 싶어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대천사하고 붙으면 네가 이길까?”
이건 그녀의 자존심을 긁는 질문이기는 한데.
확실히 확인은 해봐야 하는 일이었다.
내 질문에 잠시 눈을 찡그린 마왕 헤르게니아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무조건 내가 이겨.”
“자신감은 빼고.”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으음. 네가 대천사와 비교해서 진짜 얼마나 강한지 알고 싶어서.”
진지한 질문에 그녀도 잠시 고민을 해보다가 곧 결론을 냈는지 말해주었다.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내가 무조건 이겨. 그 숫자가 둘이 됐든 셋이 됐든.”
이건 아마 아크 드래곤 같은 자신을 도와줄 권속이 있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대천사들의 부유 도시 같은 것을 상대로 싸울 전력인데 부족함이 없을 터.
“아니라면?”
“그냥 직접 싸우면…… 에이씨. 그런 걸 왜 물어 보는 거야?”
짜증난다는 듯 발로 바닥을 차는 그녀를 보고는 생각했다.
으음.
저 반응은 아마도 직접 전투력에서는 다소 밀리는 모양이네.
그렇다는 건.
대천사들의 레벨대도 마왕 헤르게니아와 비등할 확률이 높았다.
그간 용사 후보의 버프로 레벨을 상당히 올려서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아직도 갈길이 먼 듯 해 보였고.
적어도 대천사와 싸우거나 마왕과 붙으려면.
더 나은 전력을 갖추어야 할지도.
그래도 한 가지 수확은 있었다.
준비만 확실하면.
마왕 헤르게니아를 이길 만한 존재가 그다지 없을 거라는 것.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고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앞으로 할 게 많겠네.”
그리고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아. 맞다. 나가서 사고 치면 안 돼.”
“응?”
“앞으로 보는 사람들 앞에서 마왕이라고 대놓고 드러내면 안 된다는 뜻이지.”
“흐음. 위장 놀이야?”
“그런 거지.”
“재밌겠네.”
재미라.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고.
만약 고집을 피워서 마왕임을 드러내고 다니면 같이 다니는 건 상상할 수도 없게 된다.
여차하면 정말 따로 떼어놓고 다녀야할 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그녀는 이런 쪽으로는 오히려 흥미가 동한 듯 했다.
적어도 준비가 완벽할 때까지는.
마왕 헤르게니아의 존재는 완전히 감춰 둘 필요가 있었다.
“마기는 지울 수 있어?”
“응? 그건 쉬워.”
말과 함께 마왕 헤르게니아는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던 마력을 그대로 걷어 들였고, 순식간에 그녀가 평범해 보이는 수준까지 위압감이 사라져 버렸다.
“이러니 못 찾아내지.”
“응?”
“아니. 잘했다고.”
어떻게 에센시아 제국에서 마족들이 침투해 있을 수 있나 궁금했는데 그녀가 하는 걸 보니 마력을 숨겨 버리면 정말 못 찾는 수준이었다.
뭐 이건 그녀가 잘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나중에 다른 마족에게도 시켜보면 답이 나오려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시선에 한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최상급 마족인 베인.
신성 구역에서는 차마 버티지 못해서 바깥에서 기다리기만 했던 녀석이 나와 마왕 헤르게니아를 발견하더니 반색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마왕 헤르게니아 님을 뵙습니다.”
지금의 상태가 온전한 본체라는 걸 베인 녀석도 잘 아는 듯했다.
어느새 마력을 풀어 위압을 드러낸 마왕 헤르게니아가 마족 베인에게 물었다.
“그래. 주변에 문제는 없었고?”
“네. 접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좋아.”
나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무적이고 날카로운 말투에 나도 놀랄 정도였다.
본체라는 게 이렇게 다른 모양이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마왕이 본체 상태로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거였나 싶기도 하고.
마계야 뭐 마왕들의 세상이니 그렇다 치지만.
흐음.
이건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겠는데.
마왕 헤르게니아가 인간들의 세상에서 본체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곧 다른 마왕이나 대천사들도 본체로 활동이 가능하다는 걸 뜻할 테니까.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마족 정도를 상대하는 것과.
그 이상의 존재들을 상대하는 건 엄청난 차이지.
우릴 빤히 바라보던 마족 베인이 내 쪽으로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마왕 헤르게니아 님을 봉인에서 꺼내 주셔서 마왕 데칸 님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딱히 네가 아니었어도 마왕 헤르게니아를 꺼냈을 거야.”
여기선 딱 선을 긋는 게 낫겠지.
내 필요에 의해 마왕 헤르게니아를 꺼내오는 것과.
마왕 데칸의 요구에 의해 그녀를 꺼내는 건.
그 의미와 의도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리니까.
“그렇습니까.”
내 의도를 알겠다는 듯 일단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베인 녀석에게 따로 지시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함께 활동할 예정이다.”
내 말에 마족 베인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분명 베인 녀석의 목적은 마왕 헤르게니아였을 터.
그런 그녀가 나와 함께 움직일 거라는 뜻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서 에센시아 제국에서의 적절한 위장 신분이 필요한데. 필요하면 기사단에 넣어서라도.”
지금은 비록 전멸했지만.
에센시아 5기사단을 지휘하고 있는 기사단장에게 기사 한둘을 새로 뽑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의심받지 않을 위장 신분으로는 나쁘지 않은…….
그런데 그때 마왕 헤르게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기사는 싫어.”
“그래?”
얘는 호불호가 확실하네.
그러더니 날 빤히 바라보고는 요구하듯이 말했다.
“너네 나라.”
“응?”
“로가슈 왕국에 자리 없어?”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재밌겠다고 하더니 진짜 하겠다는 거네.
잠시 고민을 하고는 그녀에게 자리를 제안했다.
기사가 싫다면 아마 이쪽이겠지.
“휴. 알았다. 마법사단장 정도면 되겠어?”
챠밍이 있긴 한데.
어차피 다들 로가슈 왕국의 공주로 알고 있으니.
크게 문제가 없을 터.
“그건 좋아.”
순식간에 로가슈 왕국의 마법사단장을 꿰찬 그녀를 바라보던 마족 베인이 할 수 없다는 듯 양보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하긴 고작 상위 마족이 마왕의 일에 태클 거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그게 비록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르다고 할 지라도.
곧 베인 녀석이 눈을 번뜩이면서 말했다.
“조만간 마왕 데칸 님과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한다는 거려나?
어쨌든 녀석의 목적은 마왕 헤르게니아와 아크 드래곤일 테니까.
마왕 헤르게니아를 봉인에서 직접 꺼내지는 못했지만.
일단 그녀와 접촉하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러면 마왕 데칸에게 가서 면목도 설 테고.
그런 마족 베인에게 마왕 헤르게니아가 한껏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한 마디 말을 꺼냈다.
그것도 베인 녀석이 꽤나 당황할 듯한 말을.
“싫은데?”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