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132화 (1,120/1,404)
  • #1131화 헤르게니아 (8)

    겉으로 보기에 석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생명체처럼 온몸의 혈관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네 명의 기사단의 목을 날려버린 녀석의 팔을 바라보자 하나의 거대한 대검처럼 길게 쭉 뻗어져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팔의 변형까지 완벽하게 된 건가?

    이전의 합성된 타락 천사 석상들은 그나마 변형되는 데 조금의 시간이라도 걸리긴 했지만.

    지금 이 녀석은 그런 딜레이조차도 없는 모양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빠르게 부딪히는 급박한 전투 속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무기를 변경시킬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상대방은 상대의 무기가 순식간에 다른 무기로 변해서 자신을 덮치니 대처하기가 더 힘들게 될 테고.

    그렇게 대검으로 변화한 자신의 팔을 다시 원래의 팔 형태로 변형시킨 녀석이 피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손을 그대로 찢어진 입으로 가져다 대자 묻어있던 혈액이 전부 녀석에게 흡수되어 갔다.

    “카햐하학!”

    동시에 기쁨을 표하는 듯 여섯 장의 날개를 크게 펼치며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가 포효하자 지하 사원의 공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단지 전달되는 것만으로도 속이 진탕되는 것 같은 강렬한 포효.

    이건 네임드 특유의 그것과 같았다.

    《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의 포효가 적용됩니다. 》

    《 헤르게니아의 포효에 의해 속박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

    《 헤르게니아의 포효에 의해 행동 저하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

    《 헤르게니아의 포효에 의해 호흡 저하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

    《 헤르게니아의 포효에 의해 출혈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

    《 헤르게니아의 포효에 의해 공포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

    .

    .

    단 한 번의 포효일 뿐인데 이 헤르마늄 지하 사원의 넓은 공간에 서 있던 모두에게 상당수의 종류가 다른 디버프가 적용되었다.

    그때 내게서 다른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합성된 타락 천사의 핵이 헤르게니아의 포효에 일부 저항합니다. 》

    다행히 타락 천사의 핵이 내게 들어오는 디버프의 대부분을 상쇄해 주었다.

    하지만 내 옆에 있던 라첼은 그런 디버프를 전혀 방어해내지 못했다.

    “허억! 허억!”

    가슴이 옥죄는지 자신의 손으로 압박하듯 가슴을 누르고 있는 라첼은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계속 숨을 헐떡댔다.

    어지간한 기사들 또한 죄다 허리를 숙이면서 고통에 찬 듯 숨을 가파르게 쉬었다.

    단 한 번의 포효로 이 정도라니.

    이건 거의 마왕을 연상케 하는 수준의 포효였다.

    고개를 돌려 우리 팀 쪽 방향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다들 고통스러운 듯 손으로 가슴을 틀어쥐고 있었다.

    쳇.

    장비라도 원래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느 정도 방어를 해주었을 텐데…….

    그때 막내별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급하게 주문을 시전했다.

    그러자 무력해졌던 상황에서 막내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하나의 결계가 형성되었다.

    동시에 우리 팀 머리 위로 표식 같은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고.

    아.

    그때 얻은 물건을 쓴 건가.

    막내별 역시도 마왕성의 비밀 창고에서 아이템을 하나 얻어왔었다.

    그 아이템의 기능 중에 하나가 바로.

    팀원들을 이런 광역 디버프 상황에서 보호하는 기능이었다.

    그땐 굳이 회복 능력이 좋은 아이템을 두고 이런 특수 아이템을 선택했을까 했지만.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굉장히 유용한 선택이었다.

    <주호> 괜찮아요?

    <불멸> 아아. 막내별 덕분에 살았다. 꼼짝도 못 할 뻔했어. 안 그래도 기사단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서.

    <주호> 네. 기사단 장비가 이런 점은 안 좋긴 하죠.

    방어력만 따지고 보면 어지간한 네임드 템만큼 준수하긴 한데.

    대량 생산형 보급형 아이템이다 보니 이런 특수 상황에서 쓰기에는 그다지 좋진 않았다.

    일반적인 몬스터들이야 기사단 장비로도 충분하겠지만.

    지금 상대하는 녀석은 그런 일반 몬스터와는 확연히 다르니까.

    그 증거로…….

    <불멸> 옆으로 뛴다!

    <주호> 네. 봤어요.

    나와 재중이 형의 고개가 동시에 한쪽 방향으로 돌아갔고, 그 시선을 따라가는 경로에 있던 모든 기사단의 목이 잘려나가 피분수를 일으켰다.

    푸우욱!!

    촤아악!!

    흐릿하게 신형이 사라졌던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는 네 개의 팔이 전부 상앗빛 검으로 변해 있었고 그 무기들 모두에 기사단의 것으로 보이는 피가 검신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얼마나 빠른지 눈으로 좇기 힘든 이동 속도와 가속.

    저기 반응을 하는 건 둘째 문제고.

    어지간한 동체 시력으로는 정말 눈을 감았다 뜨면 목이 날아가는 수준일 것이다.

    타락 천사가 일자로 지나가면서 검들을 휘둘렀는데 반응을 하지 못한 기사단은 전부 목을 헌납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옆으로 몸이 쓰러져 내렸다.

    그 와중에도 몇몇 기사들이 자신의 검이나 방패를 기울여 녀석의 공격을 막은 듯 보였다.

    마치 도끼로 찍은 것처럼 깊게 파인 방패의 흔적이 그 증거였다.

    조금만 더 파였으면 바로 목이 날아가는 궤적이기도 했고.

    검으로 막은 녀석은 검의 이가 나간 정도가 아니라 검신이 거의 반쯤 갈라져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목이 잘리기 딱 직전까지 겨우 버텨낸 듯했다.

    “허억! 막았다……!”

    “나…… 살았어?”

    “괴물……!”

    녀석이 전진하던 경로에 있던 기사단들 모두 동공이 흔들리면서 방금 지나간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를 쳐다보았다.

    딱 한 번 막은 것으로 이 정도의 차이라…….

    그나마 반응을 해서 이 모양이지.

    아니었다면 저 기사단 녀석들 역시도 목이 날아간 건 마찬가지일 테다.

    거기다 막아낸 것도 헤르마늄이 섞인 아이템이어서 버틴 듯했다.

    몇몇 기사단 중에서는 반응을 하고도 무기와 방어구째 목이 날아간 경우도 보였으니까.

    그사이 길다란 목을 쭉 빼서 죽지 않은 녀석들을 빤히 바라보는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의 하얀 얼굴에서는 의아함과 웃음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남았구나……?”

    그리고는 기사단의 피가 묻은 자신의 검들에서 다시 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치 녀석의 식사라도 되는 듯이.

    그러자 녀석의 가슴 중앙에 있는 검붉은 핵이 더욱 맥동하면서 붉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주호> 저 녀석…… 설마 여기서 더 강해지는 건 아니겠죠?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같은 의견을 냈다.

    <불멸> 지금 저 녀석들이 더 죽어 나가면 말이지. 아무래도 저 녀석. 피를 흡수해서 더 강해지는 것 같으니까.

    안 그래도 계속 신경 쓰이는 부분이 타락 천사가 저 피를 흡수하는 광경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이 피만 흡수하는 경우는 없을 테니.

    분명히 저 과정을 통해 뭔가를 얻을 텐데.

    지금 같은 경우는.

    녀석이 강해진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때 옆에서 라첼이 내게 힘겹게 말을 꺼냈다.

    “더 죽으면 안 돼……!”

    이 녀석도 눈치챈 거려나?

    처음부터 피에 대해서 민감했던 녀석이니 뭔가를 더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역시 강해지는 거냐?”

    그런데 그때 라첼이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냥 강해지는 걸로 끝나면 좋게?”

    “그럼?”

    “만약 저 녀석이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라첼의 말에 순간 나 역시 멈칫했다.

    저 피를 흡수하는 괴물이 헤르마늄 광산 밖으로 나간다?

    지하 사원 주변을 쭉 둘러봤다.

    여긴 몇 안 되는 기사단뿐이지만…….

    밖은 이야기가 달랐다.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이곳과는 차원이 다르게 많다.

    그리고 그중.

    이 부근에서 가장 생명이 많은 장소는.

    딱 한 곳뿐이었다.

    “설마 저 타락 천사가 에센시아 제국으로 갈 수도 있다는 거야?”

    내 물음에 라첼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이 나처럼 반응한다면……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낼 거야. 그 거리가 얼마가 되었든.”

    뭔가 말하기 싫은 걸 말한 것처럼 보였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말해준 듯했다.

    “지금도 강한데. 밖으로 나가면…….”

    “괴물이 되겠지. 그것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라첼은 아마 저 녀석이 에센시아 제국민 전체를 흡수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당장 기사단 몇의 피를 흡수했을 뿐인데 느낌상 상당히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 수가 한둘도 아니고 수십, 수백만 단위의 제국민이라면?

    바로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보고 설명했다.

    그러자 재중이 형도 혀를 내둘렀다.

    <불멸> 저 녀석이 밖으로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나가는 순간…….

    <주호> 제국은 멸망이죠.

    단순히 멸망 정도가 아니라.

    이 성마대전 시대가 개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건 바로 유저들의 존재.

    과연 녀석이 유저들도 흡수할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가능하다고 하면.

    제국민의 숫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

    그야말로 여기서 풀어놓는 순간.

    마왕보다 더한 녀석을 만들어 낼지도.

    <주호> 휴. 일단 막긴 해야겠네요.

    대체 고대의 녀석들이 뭘 만들어 놨는지.

    이젠 아크 드래곤이 오히려 귀여워 보일 지경이다.

    고개를 돌리자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가 고속 이동을 하면서 몇몇의 기사단 목을 더 날려 버렸다.

    그만큼 녀석 역시도 더 강해진 듯했고.

    그제야 상황이 심각함을 느꼈는지 각 기사단의 기사단장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헤르마늄 장비를 가진 녀석들은 앞으로 나서! 막지 못하는 녀석들은 블록을 짜서 버티기만 해!”

    기사단 내에서도 서열에 따라 실력 차가 확실해서 그런지 아예 전력을 둘로 나눠 버렸다.

    진형을 변경해 블록을 짜고 실력 있는 기사단이 전면에 나서서 겨우 안정되는가 싶었지만.

    변한 진형을 살피던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동시에 녀석의 등에 있던 날개가 활짝 펼쳐졌고.

    그 날개가 기묘하게 변형되더니 몇 개의 이상한 모형을 만들어 내었다.

    저건……?

    내 옆에 있던 라첼도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곧 하얗게 표정이 질려 버렸다.

    “활……!”

    아니나 다를까.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의 날개가 기묘한 형태의 활들로 변형되면서 그 사이로 수백 발의 화살이 튀어나왔다.

    붉게 물들어 있는 날카로운 깃털도 인상적이었고.

    슈슈슉!!

    쇄애액!!

    그리고는 압축되어 있다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화살들이 전방에 있는 기사단을 그대로 건너뛰고 후방에 있는 우리를 바로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재중이 형이 외쳤다.

    <불멸> 칫. 저 녀석. 회복술사들을 전부 죽일 생각이다!

    재중이 형 말대로 후방에서 치료하고 있던 회복술사들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누워서 치료 받고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고.

    가장 큰 문제는.

    녀석의 화살이.

    보통의 유저들이 쓰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빠르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당장 내 쪽으로만 날아오는 화살만 일곱 발.

    아예 자리를 피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내가 피하면 바로 라첼이 벌집이 되어 버릴 것이다.

    뒤에 있는 라첼을 생각하고는 한숨과 함께 기사단 보급 무기를 들어 올렸다.

    과연 기사단의 보급 무기가 버텨 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첫 번째 날아오는 화살을 최대한 검신을 기울여 옆으로 튕겨냈다.

    키이익!!

    마치 갉아먹듯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의 반동이 손아귀를 강하게 울렸고 검신의 표면이 깊게 눌려 파여졌다.

    칫.

    역시 이래서 보급품은…….

    이어지는 후속타들을 보급 무기를 계속 휘둘러 막아냈는데 문제는 네 번째 공격까지 막자 검신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것처럼 보였다.

    휴.

    할 수 없나.

    【 웨폰 카피! 】

    【 웨폰 카피! 】

    【 웨폰 카피! 】

    키이익!

    콰지직!

    부서짐과 동시에 웨폰 카피로 만들어낸 보급 무기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전부 쳐내자 무기들이 전부 허공에서 깨져나갔다.

    어쩔 수 없이 은신이 풀려나갔고 내 등 뒤에 있던 라첼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듯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라첼을 돌아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말했잖아. 공작까지는 시켜준다고.”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자 우리를 제외한 모든 부상자들과 회복술사들이 화살에 박혀 그대로 죽어 있었다.

    누구도 다시 살려내지 못하게.

    하.

    머리까지 쓰는 네임드라니.

    정말 힘들겠는데.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