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2화 헤르게니아 (9)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얼마 머지않을 미래에 절망의 기사가 될 라첼이 여기서 그냥 죽어 버리는 건 상당히 곤란했다.
그래서 은신이 드러나더라도 일단은 타락 천사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라첼을 지켜냈다.
이 상황에 긴장해서인지 바싹 얼어 있는 라첼이 저 빠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서지 않기도 했고.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아마 높은 확률로 라첼 역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은신을 풀고 정면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라첼이 놀란 듯 신음을 흘렀다.
“어……?”
“뭘 멍하니 보고 있어? 정신 안 차려?”
“아……!”
이 녀석.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눈빛이 살아나지 않는 걸 보니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거참.
이쪽은 너 하나 살려보겠다고 일부러 은신까지 풀고 모습을 드러냈는데 말이지.
사실 이 시점에서 내가 은신을 풀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합성된 타락 천사 석상들 사이로 쭉 걸어 들어간 내가 살아서 기사단 후방에서 나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테니까.
재중이 형 역시도 같은 생각인지 바로 연락이 왔다.
<불멸> 음. 이건 꽤 곤란한데?
<주호> 방법이 없었어요. 라첼을 그냥 두면 죽어 버릴 것 같아서요.
<불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주호> 모르겠어요. 하는 데까지 해 봐야죠.
일단 저질러 놓긴 했는데.
워낙 급박한 상황에서 다음 생각이 없이 일을 벌인 거라…….
잘못하다가는 적이 타락 천사만이 아니고 저 기사단 녀석들까지 추가될 판이었다.
기사단 놈들의 눈이 단추 구멍처럼 장식이 아니라면 말이지.
“어…… 넌?”
“저 녀석이 왜 저기서 나와?”
“안쪽으로 들어가서 죽은 거 아니었어?”
“저 몬스터 무리들을 뚫고 나왔다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해대는 기사단 녀석들을 보고는 속으로 욕이 나왔다.
역시나 죽을 걸 알면서도 들여보냈다 이거지?
말리는 녀석 하나 없이 말이야.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럴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 뒤에 있던 라첼 역시도 눈치는 있는지 걱정되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역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거였어?”
그런 라첼에게 다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기서 생색 좀 내면 멋있어 보이려나?”
“……미친놈.”
그러더니 라첼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모기 기어가는 목소리로.
“고, 고맙…….”
“뭐? 잘 안 들려?”
“아…… 댔어!”
잔뜩 부끄러운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라첼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당장 어떻게 될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누가 걱정했데!!”
“부끄러워하기는. 네 맘 다 안다.”
“이씨…….”
“뭐 상황을 알겠으면 일어나서 검부터 잡아. 저기 옆에 문제 생겼다.”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라첼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오오오오!”
“으어어어!!”
분명히 아까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의 변형된 붉은 화살에 맞아 죽어 쓰러진 회복술사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화살에 박힌 상처에서 혈관처럼 보이는 것이 주변으로 쭉 퍼져 나가면서.
그 혈관들은 회복술사의 신체 곳곳으로 퍼져 나가더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켜 버렸다.
그 상황을 지켜본 라첼이 깜짝 놀라 외쳤다.
“저건……!”
“아, 그래. 어디서 많이 보던 녀석들이네.”
아니나 다를까.
회복술사들의 등판이 쩌억 벌어지면서 등 뒤로 혈관으로 물든 하얀 날개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찌지직!
촤아악!
그리고 이내 활짝 펴진 날개는 그동안 봐왔던 어떤 녀석들을 연상케 했다.
심지어 회복술사들의 머리 역시 길게 변형되며 점점 타락 천사 석상들의 그것처럼 변해 갔다.
후.
설마 저 붉은 화살에 죽으면 타락 천사 석상으로 변하는 거였나…….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자리는.
적들의 한복판이나 다름없다는 뜻이 된다.
“그어어어!”
“우오오오!”
<불멸> 거기서 당장 빠져나와! 주변에 전부 타락 천사들이다.
<주호> 네. 알고 있어요!
당장 기사단이고 뭐고 따질 여력도 없었다.
붉은 화살에 맞아 죽은 녀석들이 죄다 타락 천사 석상으로 변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단순히 회복술사들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부상을 당해 누워서 치료를 받던 기사단들 역시도 반항도 못 해보고 죽었다가 지금은 똑같이 타락 천사 석상으로 변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문제는 이 녀석들은 아예 기사단 장비를 착용한 채로 되살아났다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신체가 강한 녀석들이 아예 기사단 장비까지 착용하게 된다면?
방어력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타락 천사 석상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문제다.
바로 손을 뻗어 라첼의 팔을 잡아끌었다.
“죽기 싫으면 멍 때리지 말고 일어나서 뛰어!”
기껏 은신까지 풀어가며 살려놨더니 여기서 죽어 버리면 곤란하지.
“알았어!”
현재의 라첼도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닌지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내 손을 덥석 쥐어 잡고 일어났다.
“빠져나간다!”
그리고는 다시 기사단의 보급형 무기를 복사해 냈다.
【 웨폰 카피! 】
【 웨폰 카피! 】
기사단 녀석들만 아니면 여기서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건데.
오히려 발목을 잡는 모양새라…….
일단 어찌 됐던 겉으로 보기에는 기사단으로 보여야 하기에 이게 지금은 최선이었다.
계속해서 무기를 복사해내는 내 모습을 본 라첼이 놀란 듯 외쳤다.
“와…… 너 쩐다.”
“끙.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웠냐.”
바로 기사단 무기를 앞으로 세우고 돌진했다.
그러자 빠져나갈 걸 염두에 뒀는지 죽은 기사단 녀석들이 내 정면을 막아섰다.
“비켜!”
여기서 발목이 잡히면 녀석들에게 바로 둘러싸이게 된다.
그럼 아무리 잘 싸워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뒤에 라첼이라는 혹을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야 행동의 폭이 너무 제한되니까.
이 녀석까지 지켜가면서 포위에서 버틸 자신까진 없거든.
【 대쉬! 】
【 헤이스트! 】
칫.
여기서 마왕 올펠의 플레이트가 있다면 엑셀레이션을 쓸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최선을 다해 정면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새로 태어난 타락 천사 석상들도 만만하진 않았다.
빠르게 공격해서 몇 녀석들의 목을 날렸는데도 불구하고 녀석들의 베이스가 기사단이어서 그런지 좀처럼 방어가 뚫리지 않고 계속해서 버텨냈다.
거기다 더 문제는.
타락 천사 녀석들의 머리 위로 하얀빛이 잔뜩 내려앉고 있는 중이었다.
중첩되는 아주 짜증나는 빛들이.
【 메가 힐! 】
【 메가 힐! 】
어이없게도 뒤쪽의 회복술사 타락 천사 석상들이 그들의 지팡이들을 들고 앞의 기사단들을 죄다 회복시켜주고 있었다.
방금 목을 갈랐던 녀석들조차도 목이 다시 달라붙으면서 완전히 회복되어 버렸고.
애초에 유저나 NPC가 목이 갈렸으면 바로 죽음의 빛으로 변하거나 움직임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텐데.
이 녀석들은 석상형 몬스터가 되어버려서 그런지 페널티도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다.
거기다 회복까지 받아버리니 할 말도 없을 정도고.
기사단 한 마리를 뚫기 무섭게 바로 다른 기사단 녀석이 내 앞을 막아섰다.
이 정도면 정말 죽지 않는 좀비 수준인데…….
그렇다고 뒤로 돌아가서 회복술사들을 죽이기에는 포위망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모양새라.
결국 발이 묶인 채 서서히 포위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휴.
할 수 없나.
이렇게 된 이상 원래의 장비를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마왕 올펠의 플레이트와 내 무기들을 꺼내야 지금 상황을 깨부술 수 있을 테니.
여기서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일단 살아야…….
그런데 그때.
내 정면의 기사단 타락 천사들이 일제히 머리가 날아가며 죄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응?
그곳에는 재중이 형이 기사단 창을 크게 돌리더니 씨익 웃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단 창의 이가 반쯤 나간 것을 보니 무리해서 쓴 모양인데.
“뭘 멍하니 바라봐?”
“마중 고마워요.”
“고맙긴. 얼른 튀어. 금방 다시 포위된다.”
그러더니 재중이 형이 눈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에는 기사단 타락 천사들이 회복술사들의 힐을 받고는 바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최악이네.”
“그러게요.”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원래 장비가 있다고 해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라.
바로 재중이 형이 뚫어준 길을 따라 뛰자 라첼 역시 불이 나게 내 뒤를 따라붙었다.
마치 감동 먹은 눈빛으로 재중이 형을 바라보면서.
“와. 진짜 멋지다.”
“난 안 멋지고?”
“저쪽이 더 잘생겼…….”
재중이 형은 라첼의 말을 듣고는 크게 웃음 지었다.
“애가 사람이 됐네.”
음.
이 녀석 그냥 버리고 갈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한숨을 쉬면서 라첼을 끌고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사단 타락 천사들이 모두 회복되어 다시 블록을 만들어 갔다.
이번에는 회복술사들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저건 또 어떻게 뚫는다?”
재중이 형도 난감한지 그 블록을 바라보기만 했다.
“굳이 뚫을 필요 있을까요.”
“아마 뚫어야 할걸?”
재중이 형이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 쪽을 가리키면서 눈짓했다.
마침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 위로 줄기차게 하얀빛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 메가 힐! 】
【 메가 힐! 】
.
.
무려 열댓에 달하는 타락 천사 회복술사들이 일제히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에게 힐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것도 기사단 타락 천사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저건 좀 미쳤네요.”
가뜩이나 네임드가 된 저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만 해도 버거운데.
거기에 타락 천사가 된 회복술사들이 아낌없이 힐 샤워를 녀석에게 들이붓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간 아군일지 장담할 수 없는 에센시아 기사단들과의 전투로 인한 피해까지 죄다 회복되었다.
“설마 일부러 노린 건 아니겠죠?”
만약 되살아나는 것까지 고려해서 일부러 회복술사들을 노렸다면…….
재중이 형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게 보이지?”
아군은 회복술사가 죽어서 마이너스.
그런 회복술사가 죄다 네임드 쪽에 붙으면 적에게는 플러스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 쪽은 마이너스가 두 배로 적용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전력이 아슬아슬한데 말이지.
“기사단이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요?”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잠시 지켜보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죄다 녀석에게 죽어서 적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런 재중이 형의 장담에 라첼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럼 다 죽는 건가요?”
아니.
이 녀석.
나한테는 반말이고 왜 재중이 형한테는 존댓말이야?
따지려다가 워낙 녀석의 표정이 굳어있어 그만두기로 했다.
“모르겠네. 지금은.”
에센시아 기사단 녀석들도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가 회복되자 그때서야 아차 싶었는지 전력을 둘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나쁘지 않다는 듯 지켜봤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그간 뒷짐 쥐고 있던 각 기사단의 단장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를 돌아가면서 버텨내기 시작했다.
적어도 저 기사단장들은 바로 뚫리진 않을 듯했다.
실력도 있고.
무엇보다 헤르마늄이 잔뜩 섞인 장비도 있으니까.
“그래도 일단 대처는 잘하고 있는데 말이지…….”
강한 쪽은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를 상대하고.
다른 기사단 녀석들은 원래 자신들의 편이었던 회복술사들을 죽이기 위해서 뒤로 빠졌다.
그래도 쉽진 않겠는데...?
당연하겠지만 회복술사들이 죽어 버려서 현재 에센시아 기사단들은 힐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조금만 전투가 장기화된다면?
필히 기사단이 하나둘씩 쓰러지면서 전력의 누수가 시작될 것이다.
당장도 기사단장들의 몸에 피해가 누적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잘 싸운다고 해도.
상대가 네임드다.
그것도 수준급의 고레벨의 네임드.
회복도 없이 한쪽으로 편중된 기사 세력만으로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내가 살아 돌아온 건 저들에게 전혀 관심 받을 일도 아니게 되었다.
살아남기 바쁜 판에 신경이나 쓰겠냐만.
재중이 형이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
“선택하라는 거죠?”
“그래. 여기서 녀석들을 살릴지. 죽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