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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131화 (1,119/1,404)

#1130화 헤르게니아 (7)

흠칫.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라첼의 고개가 휙 하니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라첼이 아무리 바라봐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곧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쭈뼛쭈뼛하던 라첼의 입에서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잘못 들었…….”

“아니. 잘 들었는데.”

“히익!!”

내 대답에 화들짝 놀란 라첼이 바로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옮겨갔다.

당황한 와중에도 곧장 자세를 잡는 걸 보면.

이런 훈련은 잘 되어 있는가 보네.

그런데 여기서 라첼이 검을 뽑아들면 내가 굉장히 곤란해지는데 말이지.

“적은 아니니까 그 손 좀 놓지?”

“어떻게 믿고……!”

하긴.

이곳은 헤르마늄 광산 안의 지하 사원이기도 하고 중간에 뭐가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당연히 중간에 불쑥 나타난 나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테고.

“난 좀 전에 정찰 나갔던 기사단 소속이다.”

“뭐라고……?”

“쉿. 옆에 듣는다.”

기사단 소속이라는 내 말에 순간 라첼의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대놓고 몬스터 같은 존재만 아니라면 굳이 검을 들이밀 상황은 아니긴 하다.

그것도 같은 에센시아 기사단 소속이라면.

무엇보다 내 쪽의 하위 기사단은 굳이 라첼이 속한 상위 3기사단과 척을 지지도 않았을 테니까.

실제로 없는 기사단이기도 하고.

속삭이듯이 작게 말하자 라첼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나를 따라서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어떻게 앞서 정찰 갔던 기사가 여기에 있을 수가 있…….”

“음. 그건 좀 복잡한데 말이야.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고.”

그러자 라첼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공간에서 다른 회복술사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부상당한 기사단들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워낙 전투가 격렬하기도 하고 부상당한 사람도 많다 보니 이곳도 정신없긴 마찬가지라.

만약 라첼이 허공에 대고 뭐라고 말하는 걸 들었더라도 신경 쓰지 못할 상황이랄까.

하지만 계속해서 라첼이 다른 데 정신 팔린 걸 보게 된다면 분명히 라첼을 불러 세워서 추궁할 이유가 된다.

“나보고 지금 뒤로 빠지라는 거야?”

“안 그래도 힘들지 않았나?”

그러면서 발로 툭툭 쓰러져 있던 기사단의 몸을 건드려보았다.

곧장 피를 흘리던 기사단의 허리춤의 붕대가 갈라지며 다시 피가 새어 나왔고.

그 모습을 본 라첼의 고개가 바로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라첼은 눈은 정확히 그 흘러나온 피를 짠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것 봐.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니까.

진짜 피가 나는 것이 무서워서 피했다면 아예 기겁하는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라첼의 모습은 그런 모습과는 너무 차이가 컸다.

마치 주변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 느낌이 더 강하달까.

“네가 뭘 안다고……!”

“그럼 모르는 척해 주는 대가로 이야기 좀 하자면?”

그러자 잠시 멈칫하던 라첼이 곧 입술을 깨물면서 대답했다.

“칫. 알았어.”

곧 포기했는지 라첼이 부상자를 그대로 두고 두 손을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워낙 정신없는 상황이라 그런지 다른 회복술사들은 라첼의 이런 움직임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저 앞쪽에서는 미친 존재감이 생성되는 중이라서 말이지.

<주호> 정면은 어때요?

<불멸> 아아. 개판이지. 진짜로 저걸 놔둘지는 몰랐다. 잘못하면 우리도 튀어야겠는데?

재중이 형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합성된 타락 천사들의 석상 잔해들이 떠오르면서 하나둘씩 중앙의 있는 붉은 핵으로 빨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핵을 중심으로 차곡차곡 덩치를 불려 나갔고.

중앙의 붉은 핵은 마치 거대한 하나의 눈이라도 되는 듯 상하로 길게 찢어지며 더욱 찐득한 붉은 기운을 발산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천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라첼 역시도 시선을 돌려 합성된 타락 천사의 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놀란 표정으로.

으음.

딱히 겁먹은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이 녀석은 묘하게 이상한 표정을 한 번씩 짓는단 말이야.

“왜? 무서워?”

“하아. 넌 안 느껴져?”

자세히 보니 라첼의 어깨가 마치 못 볼 상황을 본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이건 뭐지……?

몸은 떠는데 눈은 오히려 계속 타란 천사의 변형을 쫓고 있었다.

“뭐가 느껴지는데?”

“혈향.”

“응?”

“강렬한 향…….”

그리고는 뭔가에 이끌린 듯 라첼이 앞으로 걸어가려고 하자 바로 녀석의 앞을 막고는 진각을 찍었다.

쿠웅!

약하지만 확실히 느껴지도록.

“정신 차리는 게 어때?”

“음……? 내가 방금 뭐라고 했어?”

순간 정신이 나간 듯 몽롱한 표정을 지었던 녀석이 내 진각으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해 보였다.

으음…….

아무래도 꽤 이상한 녀석을 주운 것 같은데.

이건 재중이 형이나 전사 형이 준 자료에는 아예 없는 상황이었다.

형들의 조사가 부족했을 리는 없고.

그런다는 건 아예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는 내용이라는 뜻인데.

혹은 의도적으로 지워졌거나.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이 후에 절망의 기사로 불릴 만큼 괴물이 된다는 데 있었다.

이런 녀석의 정보가 이렇게 없다는 건.

결국 누군가가 정보를 중간에 차단했다는 뜻일지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

뭔가.

꺼림칙한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지금의 이 몽롱함도 그중 하나일 테고.

<주호> 형, 아무래도 고생 좀 할 것 같아요.

<불멸> 왜?

<주호> 얘가 좀 맛이 가서요.

<불멸> 정상이 아냐?

<주호> 네. 저 타락 천사를 보고는 무슨 혈향이 난다고 하네요.

<불멸> 으음…… 개코인가?

재중이 형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순간 이 녀석이 수인족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말이었다.

<주호> 정말 수인족 아니에요?

이 녀석이 수인족이라고 치고 이전에도 수인족은 종종 존재했다.

딱히 새로울 것은 아니니.

그리고 늑대나 개과의 혼종도 분명 있을 테니까.

우리는 맡기 힘든 혈향이 맡아진다고 하는 걸 보면…….

<불멸> 흐음. 기록에는 없던데.

<주호> 그럼 물어보죠.

“혹시 너 수인이냐?”

내 말에 순간 내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그럼 그냥 정말 개코인 건가…….”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

간혹 NPC들 중에서도 감각이 굉장히 뛰어난 녀석도 존재할 것이다.

몬스터와 괴물들이 난무하는 세상인데.

이 정도야 뭐.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하고 넘어가려는데 라첼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을 꺼냈다.

“저거…… 그냥 두면 큰일 날 거야.”

그래도 얘는 최소한의 현실 감각은 있는 듯했다.

“그래. 누가 봐도 저거 그대로 놔두면 난리 나겠지.”

“그런데 안 말려? 여기 사람들…… 정말 많이 죽을지도 몰라.”

“내가? 왜?”

“응?”

뭔가 대화가 하나씩 빗나가는 듯한 느낌에 라첼이 내 쪽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기사 아냐?”

“뭐 일단은.”

“그런데 왜…….”

“그렇게 불만이면 네가 가서 말리지 그러냐?”

내 말에 라첼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두 손을 불끈 쥐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분하다는 듯한 목소리도 섞여 있었고.

공기를 타고 들어오는 저 소리가 정말 잔인한 현실을 같이 실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그런 답을 하는 라첼에게 되물었다.

“네가 제대로 못 싸우는 반푼이 기사라서?”

내 추측성 말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라첼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역시 너도 소문을 알고 있구나.”

아.

저 소문은 전혀 몰랐다.

솔직히 그런 소문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 내 쪽이 더 편했지.

어쩌면 훨씬 전에 라첼에게 접근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애초에 라첼이 여기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에 우리 팀 누구도 라첼 공작에 대한 대책은 세워두지 못했다.

“아니. 그런데 네가 속한 3기사단. 원래라면 성마대전에 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원 역사대로라면 3기사단은 지금쯤 성마대전에서 활약하고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이곳 헤르마늄 광산에 와서 광산 관리를 하고 있으니…….

있지도 않을 라첼 공작이 이곳에 있지.

이 녀석이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정말 뜻밖의 상황이었다.

“음. 그건…… 황제 폐하의 지시라서. 원래라면 우리도 성마대전에 지원 나가기로 되어 있었거든.”

그 순간.

내가 한 가지 착각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헤르마늄 광산…….”

원 역사에서 이 헤르마늄 광산인 이 시점에서 공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파수꾼인 아크 드래곤도 죽지 않은 시점이라 헤르마늄 광산을 들어올 수조차 없었을 테지.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가 아크 드래곤을 잡고 헤르마늄 광산이 열렸으니.

다른 곳으로 지원 갔어야 할 기사단을 빼서 이쪽으로 돌린 셈이 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눈앞의 3기사단이고.

이건 비단 3기사단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단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아. 미안. 네가 공작이 될 기회를 내가 걷어찬 것 같네.”

“뭐라고?”

이건 진담이 조금 섞여 있긴 했다.

아마 가만히 놔두었으면 이 녀석이 미래의 절망의 기사인 라첼 공작이 되었을 테니까.

그런데 이젠 이 라첼이라는 녀석이 어떻게 해서 공작으로 올라서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중간에 무언가 계기가 되는 무기를 얻었을 경우도 있을 수 있을 텐데...

역사를 틀어버려서 라첼이 얻지 못한다면?

뭐 그냥 개털이 되는 거지.

휴.

그나마 미래의 다른 공작이 될.

통곡의 벽인 비에른 백작은 건졌지만.

얘는 진짜 어떻게 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어떻게든 공작으로 만들어주마.”

“무슨 개소리야.”

음.

입이 좀 거친데.

그냥 확 버리고 갈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다잡고 일단은 이 녀석을 끌고 가보기로 했다.

순간 내 뒤쪽으로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면서 감각을 쭈뼛하게 세울 만한 압력이 밀려들어왔다.

거의 지하 사원 전체를 휘몰아치는 압력이랄까.

<불멸> 기어코 완성됐다.

<주호> 그렇게 보이네요.

우리라도 나서서 방해했다면 어떻게든 됐을 테지만.

앞에 다른 기사단이 포진한 상태에서는 그것도 힘든 일이라.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확인한 녀석은 지금까지의 석상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총 여섯 장의 거대한 날개.

네 개의 팔과 함께.

눈은 무려 양쪽을 합쳐 여덟 개나 곳곳에 박혀 기사단들을 빤히 주시했다.

특히 가슴 정중앙에는 커다랗고 길게 뻗은 하나의 검붉은 눈이 박혀 역시 존재감을 보여주었고.

그 눈에서는 혈관처럼 쭉 뻗어 나온 붉은 빛의 혈관들이 몸 전체로 뻗어나가 혈맥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하얀 백지 위에 길게 붉은 선을 잔뜩 그려놓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선들이 날개와 팔에도 쭉 이어져 정말 혈관처럼 뛰는 모습을 보고는 아까 라첼이 말한 혈향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이전에 기사단에게서 흡수한 피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축척하고 있던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렇게 잠시 빤히 기사단과 우리를 내려다보던 녀석의 머리 위로 하나의 네임이 떠올랐다.

『 헤르게니아의 타락 천사 』

그것도 시뻘겋게.

그런데 그 순간.

아래를 내려다보던 녀석이 한 팔을 옆으로 살짝 휘둘렀을 뿐이었는데.

그 방향으로 서 있던 기사단 네 명의 목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정말 아무런 반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아니 정확하게는 공격당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바로 재중이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불멸> 방금 봤냐?

<주호> 네. 겨우 봤어요.

<불멸> 나도 잔영만 스치듯 봤어.

젠장.

이 녀석.

진짜 네임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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