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7화 마왕의 핵 (5)
마왕 올펠이 이 시아트 마왕성에 오게 된 이유.
천사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에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이 외지까지 친히 마왕 올펠이 찾아왔었다.
결과는 녀석의 죽음.
여기서 그런 식으로 어이없게 죽게 될 줄은.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다른 마왕들도 마왕 올펠이 죽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터.
그런데 막상 와보니 마왕 올펠이 떡하니 죽어 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것도 몇 수는 아래라고 생각되는 마왕 스티어가 있는 마왕성에서.
마왕 올펠이 마왕 데미안보다는 약하다고는 해도.
엄연히 마계 서열 3위다.
어지간한 마왕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는 뜻이지.
그런 마왕이 이런 외지에 와서 죽었다?
당연히 뭔가의 변수가 없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건.
누가 봐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그런 변수가 될 만한 무언가가 마왕 스티어의 손에 떡하니 쥐어져 있었다.
정확하게는 내가 얼마 전에 녀석에게 던져준.
대천사의 검.
라페르나.
마왕 스티어의 손에서 그 어떤 빛보다도 환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검신이 반짝이고 있었다.
화련이 그 두 마왕의 대치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화련> 그냥 차라리 죽지 그랬어?
<주호> 대천사의 검을 넘겨줄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건가요?
<화련> 네 의도는 확실히 알겠는데. 두 마왕을 싸움 붙이려는 용도로 써먹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아?
화련은 마왕 스티어에게 라페르나를 준 게 둘을 싸움 붙이기 위한 구실이라는 걸 바로 눈치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라페르나가 날아간다는 게 뼈아프겠지만.
너무 아까워하는 화련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호> 괜찮아요. 저거 짝퉁이거든요.
<화련> 뭐?
<주호> 레플리카 정도죠. 그냥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가짜에요.
<화련> ……복사품이야?
사실 이건 그다지 알려주고 싶진 않았지만.
어차피 나중에 내가 라페르나를 또 꺼내는 걸 보면 화련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설마 저런 대천사의 검을 한 사람이 여러 자루 가지고 있는 건 애초에 말도 안 되니까.
전에 대천사 루스에게 르아 카르테로 사기(?)를 쳤던 것처럼.
이번에는 마왕 스티어에게 똑같이 사기를 쳤다.
겉모습만 완전히 똑같은 라페르나를 줘서.
당장 겉보기에는 누가 봐도 대천사의 검이다.
어느 정도의 고유 특성도 발현되는 편이고.
마왕 스티어가 손으로 쥐자마자 스파크가 일어나며 반발하는 걸 보고는 녀석도 별 의심도 하지 않았다.
만약 아무런 반항도 없었다면 오히려 의심했을 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지금 저 라페르나가 진품인 줄 알고 저렇게 열심히 숨기는 중이다.
그런 마왕 스티어의 태도는 또 마왕 데미안에게 확신을 가져다주고 있고.
마왕 스티어가 꽤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이게…… 그러니까…….”
마왕 스티어의 계획에 이런 그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내게서 대천사의 검을 강탈하고 난 뒤에 우리를 죽이든 내쫓든 보내버리고
흡수한 마왕 올펠을 비롯한 모든 증거를 없애버린 후.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을 테니까.
다른 마왕들이 바로 지금.
이 시점에.
이 마왕성에 오지만 않았다면.
확실히 녀석의 계획대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추궁당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대천사의 최종기에 마왕 올펠이 죽었는데.
지금 마왕 스티어의 손에 들린 건 대천사의 검.
누가 봐도 범행과 범인, 증거가 명확한 상황이었다.
<화련> 정말 타이밍 좋네. 대천사의 검을 쥐어주자마자 마왕이 들이닥칠 줄이야.
<주호> 아, 사실 그것도 노린 거예요.
<화련> 응? 설마?
<주호> 네, 시간을 딱 맞췄죠.
사실 마왕 스티어가 배신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처음부터 알았다면 어떻게든 마왕 올펠과 치고받다가 죽게끔 유도했겠지.
결국 마왕 올펠이 죽어 버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패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마왕 스티어가 결계를 치기 전에.
바로 전사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리곤 암흑 상인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마왕 스티어와 대천사의 검에 대해서.
그것도 마왕 올펠의 세력에게만.
<주호> 전에 마계 경매장에서 마왕들 세력도 본 적 있죠?
<화련> 그래. 분명 마왕 올펠이…… 저 녀석의 세력이었지?
<주호> 네, 마왕 데미안의 세력이죠.
현재 마계의 구도는 크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마왕 바이카르를 주축으로 하는 기존의 마왕 진영.
그리고 또 하나는.
마왕 데미안을 중심으로 모인 새로운 신 마왕 진영.
전이 굳건한 마계의 전통적인 강자들이라면.
반대로 신 세력은 그에 반하는 마왕들의 세력이었다.
전에 마계 경매장에서 마왕 바이카르를 본 마왕 올펠이 으르렁거리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두 세력 사이에 상당한 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마왕 데미안 진영의 마왕 올펠이 죽었다?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잡 마왕에게?
마왕 스티어는 어떻게 보면 이제 겨우 걸음마를 띈 신생 마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낮은 수준의 마왕이 마왕 올펠을 잡을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제로에 수렴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미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한쪽 세력의 수장인 마왕 데미안이 직접 행차할 만큼.
놀라운 일이었을 터.
거기다 문제는.
마왕 스티어가 자신의 세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천사의 검을 들고 있는.
자신의 세력이 아닌.
자신의 세력을 죽인 마왕.
이걸 보고 마왕 데미안이 판단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마왕 바이카르가 완전 미쳐 버렸군. 천계와 손을 잡고 우릴 치다니.”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미소 지었다.
<불멸> 하. 이게 정말 통하냐?
<주호>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불멸> 하긴. 현장에서 바로 검거됐으니.
만약 이 시점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발뺌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어졌다.
마왕 스티어가 영문을 모른다는 듯 마왕 데미안에게 외쳤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마왕 바이카르라니.”
상황이 너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는지 마왕 스티어의 로브가 크게 흔들렸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왕 스티어는 마왕 바이카르와 어떠한 접점이 없으니.
“하, 그것 참. 대단한 충성심이군. 걸리면 알아서 꼬리를 짜른다는 건가. 급하게 와보지 않았으면 낭패할 뻔했어.”
정말 몰라서 반발했던 건데.
오히려 마왕 데미안은 녀석이 발뺌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불멸> 너무 잘 되니까 오히려 무서운데?
<주호> 그러게요.
대천사의 검을 마왕 스티어에게 쥐어준 판단은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단순한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양쪽 모두 알아서 오해하고 정상에서 벗어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왕 스티어가 궁지에 몰리자 갑자기 방향을 꺾었다.
“이건 내 물건이 아니다!”
그러면서 내 쪽을 보면서 외쳤다.
“이 대천사의 검은 저 녀석에게 받았다!”
맞다.
내게 받은 게.
문제는…….
마왕 스티어의 변명에 마왕 데미안의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
쭉 위아래로 날 훑어보던 마왕 데미안이 어이가 없는 듯 코웃음 쳤다.
“마왕 스티어. 완전히 미친 거냐? 인간. 그것도 저렇게 약해빠진 녀석이 대천사의 검을?”
참.
이럴 때는 내 레벨이 낮은 게 도움이 되네.
지금 내 레벨은 200이 채 안 된다.
마왕 데미안의 시점에서 보면 난 그냥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정도다.
사실 마왕성에 거주하는 일반 NPC들도 다들 나보다는 레벨이 높거든.
내가 대천사의 검을 가지고 있다는 건.
돌멩이가 길에서 보석을 덥석 주웠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것도 보석 중에서도 최상의 보석을.
대천사가 쥐고 놓지 않는 무기를.
내가 가지고 있는 사실 그 자체가.
마왕 데미안에게는 오류인 셈이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말이 안 된다는 걸 느낀 듯 마왕 스티어가 고함을 질렀다.
“젠장! 정말 녀석이 가지고 있었다니까!!”
“웃기는군.”
이젠 아예 개소리처럼 들리는 모양.
그리고는 마왕 데미안이 주변의 마왕들에게 지시했다.
“데려가서 어떻게 천계와 접촉했는지 심문해야겠군. 녀석을 죽기 직전까지 밟아라. 대천사의 무기는 회수하고.”
흐음.
바로 죽이는 게 아니었나?
솔직히 마왕 올펠을 죽였기 때문에 마왕 스티어를 바로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보를 캐내려는 듯했다.
그러자 마왕 데미안의 옆에 있던 세 명의 마왕들이 모두 앞으로 나섰다.
하나하나가 이전의 마왕 스티어의 수준을 상회하는 마기를 뿜어내는 걸 봐서는.
이들 역시도 상당히 높은 랭킹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마왕 스티어가 마왕 올펠의 기운을 흡수해서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저들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특히 마왕 데미안이 나서는 순간.
바로 쥐어 터지겠지.
“젠장! 녀석들을 막아라!”
이대로 끌려가면 그 끝에 무조건 죽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마왕 스티어는 부하들을 총동원시켰다.
마치 바리게이트를 치듯 리퍼들이 겹겹이 앞을 막아서는 순간.
앞으로 나섰던 마왕 중에 하나가 그들 사이로 파고들기 무섭게 반수를 터트려 버렸다.
“크아아악!”
“으아악!”
“키악!”
피로 만들어낸 것 같은 붉은 대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절반이 죽어버리자 마왕 스티어의 어둠이 크게 흔들렸다.
“젠장! 대업이 눈앞인데 고작 이런 곳에서……!”
붉은 대검을 휘두른 마왕이 마왕 스티어를 보면서 웃었다.
“크큭!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어느새 소환된 마왕 스티어의 거대한 데스 사이드와 피처럼 붉은 대검이 공중에서 수도 없이 부딪혀 갔다.
카아앙!!
콰아앙!!
따라가기도 벅찰 수준의 공방에 눈이 즐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잘 싸우네.
마왕 스티어 역시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서 그런지 점점 상대 마왕을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마왕 둘이 더 가세를 한 순간.
순식간에 마왕 스티어가 밀렸다.
“으아아!! 이 새끼들이……!”
저게 야망의 말로인가…….
시도는 꽤 좋았지만.
애초에 우릴 배신하는 그 순간.
녀석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멸> 널 적으로 만든 것 자체가 실수지.
<주호> 하하…… 그런가요.
<불멸> 역대급 잔머리를 저놈이 어떻게 이길까.
음.
이거 칭찬 맞겠지?
그사이 마왕 스티어가 연신 밀리면서 뒤로 빠지다 결국 대천사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달려들던 세 마왕들이 모두 움찔했다.
“대천사의 무기…….”
“조심해라. 저건 진짜다.”
“마왕 올펠을 저걸로 죽인 건가.”
저 강한 마왕들도 멈추게 할 정도의 무기.
마왕들이 얼마나 대천사의 무기를 경계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더 다가오면 전부 죽여 버리겠어!”
마왕 스티어가 대천사의 검을 앞으로 내밀며 위협했다.
그러면서 눈은 계속 마왕 데미안을 쫓고 있었다.
여기서 제일 위협적인 건 역시 마왕 데미안이니까.
그런 마왕 스티어를 마왕 데미안은 서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따라오지 마라!”
마왕 스티어가 결국 마왕성을 내버려 두고 그대로 부서진 벽을 통해 바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쫓아가!”
곧장 대전 밖으로 사라지는 세 마왕.
그리고 마왕 데미안 역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정말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시선조차 주지 않고.
순간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와,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런 마음이었는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재중이 형과 모두가 마왕 올펠의 드랍템을 챙기러 움직일 때 난 바로 르아 카르테를 꺼내 들고는 금속의 정령을 불러냈다.
“마왕들 다 갔어?”
“어, 다 사라졌어. 근데 지금 바로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응? 뭔데?”
“마왕성 지하.”
“지하?”
“그래, 녀석들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털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