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8화 마왕의 핵 (6)
전에 마왕 스티어가 해준 말이 있었다.
마왕성은 마신의 파편이 존재하는 곳에 세울 수 있다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낚시일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직접 베르테니아 마왕성 지하에서 마신의 파편을 얻어 테르타로스를 만들었으니 아주 잘못된 정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는 말은 역시 이곳 시아트 마왕성도 하나의 마신의 파편을 보유하고 있지 않을까.
마왕 스티어의 말을 신용할 수 있으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이전부터 한 번쯤은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여기에는 큰 문제점이 하나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동안은 마왕 스티어가 이곳 시아트 마왕성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마왕성 지하로 내려갈 방법이 없었다.
베르테니아 마왕성 때처럼 마왕 본인이 직접 데리고 내려가지 않는다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왕 스티어가 마왕 데미안과 다른 마왕들에게 쫓기고 있는 이상.
이곳 시아트 마왕성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인 없는 마왕성.
그 어느 때보다 마왕성을 털기에는 지금이 아주 이상적인 상황이라는 거지.
금속의 정령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설마 마신의 파편이야?!”
척하면 척이네.
마왕성 지하라는 걸 듣자마자 바로 마신의 파편과 연결시킨 모양이다.
곧 금속의 정령의 입가에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야, 너 침 흘린다.”
“아니야!”
마신의 파편은 금속의 정령에게 있어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금속의 정령이 맛볼 수 있는 진미 중에서는 최고가 아닐까.
이런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슥슥 입을 닦던 금속의 정령이 날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하지만 지하에는 못 들어가는 거 아냐?”
“아, 지금은 주인이 없거든.”
내 말에 금속의 정령이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더니 납득한 듯 말했다.
“마왕 스티어가 죽은 거야?”
“음, 정확하게는 다른 마왕이긴 해. 마왕 스티어는 지금 도망 중.”
다시 한 번 사방을 살핀 금속의 정령이 다소 놀란 눈빛으로 변했다.
“대체 여기 마왕이 몇이나 왔던 거야? 기운이 다 달라.”
역시 금속의 정령쯤 되면 그런 건 바로 알 수 있는 건가?
“꽤 많이 왔지. 그래서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어.”
“왜? 마왕 스티어는 도망갔다며?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는 것 아냐?”
마왕 스티어가 얼마나 잘 도망다닐 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만약 그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짧은 시간이라면.
당장이라도 마왕 데미안과 휘하 마왕들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은 이곳을 정리하려고 하겠지.
거기다 또 다른 문제는.
이곳 마왕성이 비었다고 생각하는 게 그들만은 아니라는 거다.
“흠, 그게 다른 손님들이 또 올 것 같거든.”
이건 사실이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조만간 불청객들이 잔뜩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암흑 상인이 한쪽으로만 정보를 흘려서 일을 잘해 주기는 했지만.
저 정도의 상위 마왕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과연 상대 세력들의 마왕들이 모를까?
아니.
절대 모를 리가 없지.
“아마 우리 생각보다 시간이 더 없을 거야.”
최대한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떠야 한다.
어떤 마왕이든지 하나라도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정말 복잡하게 변한다.
곧 마왕 올펠의 드랍템들을 회수한 재중이 형과 화련, 전신, 패황이 내게 걸어왔다.
“다 회수했어요?”
“다행히.”
마왕 스티어가 튀는 덕분에 우리는 온전히 모든 아이템들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마왕 스티어가 드랍템을 습득할 수 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패황이 우리를 한 번 다 둘러보고는 말했다.
“일단 각자 드랍 권한이 있는 물품만 걷어왔는데. 분배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한 사람이 다 걷어 와도 문제인데.
지금은 그나마 따로 다 아이템을 가져간 상태였다.
마왕을 잡고 나온 아이템들이라 서로 절실하게 원하는 아이템도 있겠지만.
당장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흔히 말하는 랜덤 분배라고 하면 되려나?
그 때문에 우리도 모든 아이템을 확인하지 못 했다.
만약 같은 길드나 연합 사람들이었다면 나중에라도 해결하면 되지만.
우린 또 그게 아니거든.
솔직히 여기서 같이 손잡고 싸울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한 일이라.
화련은 패황이 가져간 아이템이 마음에 들었던지 곧장 패황에게 말했다.
“다 모아놓고 경매를 하는 게 어때? 어차피 다들 마음에 드는 아이템은 따로 있을 것 아냐.”
그런 화련의 말에 패황이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아마 패황은 화련이 가져간 아이템에 미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신도 긍정적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봐서는 마찬가지인 모양이고.
다른 누군가 전신이 원하는 아이템을 가져간 듯했다.
이래서 레이드는 다른 세력들하고 같이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때 내가 재중이 형에게 말했다.
<주호> 형, 우린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곳 지하에서.
그 말에 재중이 형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전혀 티를 내지 않고 답을 보냈다.
<불멸> 마왕들 오기 전에 털자고?
역시 척하면 척.
<주호> 네, 하지만 저들은 다 여기서 보내야 해요.
<불멸> 그렇지. 쟤들은 마신의 파편에 대해서는 모르니까.
만약 마왕성 지하에 마신의 파편이라는 게 있다고 하면 저들 중 누구도 절대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여기저기 다 알면 그건 비밀도 아니니까.
잠시 미소를 지은 재중이 형이 말을 꺼냈다.
“좋아. 하지만 여기는 좀 장소가 그렇지?”
그러면서 사방의 전투 흔적들을 돌아보았다.
마왕들이 치고받았던.
“이놈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빨리 뜨자.”
그 말에는 다들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는?”
패황이 물어보자 모두를 살펴본 뒤 내가 슬쩍 말을 끼워 넣었다.
“서로의 거점에서 중립인 지역에서 만나죠.”
전신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딱히 상관없습니다.”
패황도 그 말을 듣고는 같은 반응을 보였다.
“중립 지역이면 괜찮겠군요. 괜찮은 곳이 있을까요?”
어차피 저들 세력 중 하나의 거점으로 모이자고 하면 서로 싫어할 게 뻔하니까.
그때 구석에서 조용하게 이 모습을 지켜보던 중립 연합장이 우리에게 말을 꺼냈다.
“다들 괜찮으시면 우리 거점으로 오실래요?”
마왕들이 하도 난리를 치는 통에 솔직히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다들 그런 그녀에게 시선이 모이자 머쓱한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중립 지역이 필요한 것 아니었나요?”
“그렇긴 하죠.”
“그럼 우리 거점이 서로에게 괜찮을 듯한데요? 일단 중립 지역이기도 하고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소를 제공해 주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서로가 중립이라고 생각하는 곳이니까.
전신과 패황도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곧장 허락을 했다.
화련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네, 좋아요. 따로 자리를 마련할게요. 아, 그리고 대전 바깥에 있는 병력들은 서로 물리는 게 어떨까요?”
그러고 보니 마왕 스티어의 결계가 풀렸음에도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마왕 데미안이 어떤 조치를 취해 두었는지도 모르겠고.
저들이 다 사라진 지금이라면 들어올 수도 있으려나?
“네, 각자 다 물러나라고 하죠. 더 이상 이곳 마왕성에 있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리고는 모두 자신들의 세력들을 물리기 위해 연락을 넣었다.
딱히 이 대전에 들어와서 복잡해지는 건 서로 원하지 않으니까.
<주호> 전사 형, 일단 전부 퇴각이에요.
<방패전사>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상황은 어떻게 됐어?
<주호> 자세한 건 이따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마왕들이 돌아오기 전에 전부 나가야 해요. 여기는 좀 있으면 마왕들 계모임 장소가 될 예정이라.
<방패전사> 하. 남아 있으면 절대 안 되겠네. 그럼 어디로 가면 돼?
<주호> 중립 연합 거점 있죠? 거기로 가면 돼요.
<방패전사> 알았다.
어차피 우리도 가야 하니까 미리 보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세력들이 마왕성을 벗어나자 마왕성을 보던 전신과 패황이 닮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곳 마왕성에 들인 돈이 적지 않은데.
전부 날아가게 생겼으니 속이 쓰리겠지.
마왕 올펠을 잡고 나온 아이템이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라도 되려나.
곧 전신이 먼저 자리를 떴고 패황도 귀환으로 사라졌다.
화련도 우리를 보더니 말했다.
“난 간다.”
그 말을 남기고 귀환으로 사라지려던 화련을 바로 말렸다.
“아, 잠시만요.”
갑자기 자기를 잡자 화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알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쟤들 보내고 해야 할 일이 남았구나?”
그런 화련의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웃음을 터트리며 감탄했다.
“눈치가 왜 이렇게 좋아졌어? 내가 아는 화련이 맞나?”
“뭐? 확 가버린다?”
“아, 쏘리. 그건 안 되고.”
그러더니 재중이 형이 바톤을 내게 넘겼다.
잠시 화련을 바라본 뒤 말을 꺼냈다.
과연 이걸 들어주려나?
“사실 아까 화련이 잡은 드랍템 중에 제가 원하는 템이 있어서요.”
솔직히 그 아이템이 내게 나왔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화련에게 드랍템이 넘어가는 순간.
어쩔 수 없이 화련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헤에? 그래? 그게 과연 뭘까?”
이러면 주도권이 화련에게 넘어가버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화련이 거절해버리면 답이 없으니까.
“휴, 딱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굳이 내 목적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괜히 돌려서 속이려고 해봐야.
결과가 그렇게 좋진 않을 테니.
그리고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화련이 미소 지었다.
“어떤 건데?”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다.
“마왕의 핵.”
그 말에 화련이 드랍템 중에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거 말이야?”
검은 구슬처럼 생긴 하나의 보석 템.
겉으로 보면 그냥 평범한 구슬 같지만.
이름부터가 마왕이 들어가는 템이다.
그것도 핵.
아까 금속의 정령이 몰래 해준 말을 기억했다.
마왕의 핵이 있어야 한다고.
지금까지 금속의 정령이 틀린 말을 하는 걸 본적이 없으니까.
아마도 저게 마왕성 지하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거겠지.
“네, 그걸 제가 가지고 싶은데요.”
“왜 필요한지 물어보면 알려줄 거야?”
“…….”
잠시의 침묵.
역시 여기서는 말해야 하려나?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불멸> 시간이 없어.
<주호> 네,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곧 화련을 보고는 말을 꺼냈다.
“그게 있어야 마신의 파편을 가질 수 있어요.”
내 말에 화련이 의외로 덤덤한 말투로 웃어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
“네?”
“네가 지금 여기서 할 만한 게 그거뿐이 없잖아?”
내가 말을 꺼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잠시 마왕의 핵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화련이 내게 마왕의 핵을 던져주었다.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또 빚진 거다?”
“고마워요.”
“고맙긴. 뒷감당은 알아서 하고.”
그러더니 화련이 말했다.
“구경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런 화련을 보고는 마주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