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화 격전의 거점 쟁탈전 (2)
찬바람 쌩쌩 부는 이곳 설원에 와 있는 유저들은 현재 딱 두 분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초월 연합에서 레이드를 위해 나온 유저들.
그리고 그걸 방해하기 위해 나선 패황 연합의 유저들.
물론 사냥을 위해 찾는 다른 유저들도 있긴 하겠지만.
혹한의 얼음 여왕이 뜨는 이 리젠 자리 근처에서 대기를 하는 유저들은 결국 저 둘 중에 하나라는 거지.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마주치는 유저들은 아군이 아니면 그냥 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비단 이렇게 생각하는 건 우리뿐만 아니라 양측 다 똑같을 것이다.
지금 공격을 받았던 것도 마찬가지고.
반대로 말하면.
아군이라고 판정이 나면?
적이 아니면 아군이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그냥 프리 패스지.
패황 연합 유저들이 바리게이트를 치던 출구 쪽으로 나오자 주변에 잔뜩 대기하고 있던 유저들이 흘깃흘깃 쳐다만 볼 뿐.
더 이상은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내 옆에 서서 걸어가는 이 유저 덕도 있었고.
떡하니 패황 연합 편에 서서 싸웠던 유저와 같이 걸어가는데 굳이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있을까.
걸어가면서 그 남성 유저가 재차 확인을 위해 내게 물어보았다.
“아, 그러니까 안쪽에는 초월 연합 애들이 더 없다는 거지?”
“네, 우리가 확인했을 때는 전부 빠져나간 상태였어요.”
“그놈들이 그렇게 쉽게 혹한의 얼음 여왕을 포기할 놈들이 아닌데.”
“아마 이번에 피해가 좀 컸나 보죠.”
이럴 때는 모르는 척.
어차피 이들은 우리가 혹한의 얼음 여왕 레이드를 파토낸 것을 전혀 모른다.
나와 재중이 형은 거의 은신을 하고 있었던 데다가.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는 얼음 여왕의 말대로 거적대기를 걸치고 있는 상황이라.
주변에서 보면 그냥 랭커인 부랑자 두 명이 나와서 깽판을 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 로브는 흔하디흔해서 외관만으로는 찾아내기도 힘들 테고.
그리고 아이디야 요즘은 바꾸면 그만이라.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지.
“하하, 그럼 성공한 거구나. 안 그래도 이거 깽판 못 치면 위에 가서 엄청 깨질 거였거든.”
“그래요?”
“어, 그렇다니까? 수뇌부에서 여기를 먹어야 한다고 얼마나 고함을 지르던지. 아주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음, 그냥 본대에서 좀 빼서…….”
“에이, 무슨 소리를. 그놈들이 여기 와서 죽을 줄 알고? 우리 여기 죽으라고 보낸 거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그런데 왜…….”
“아, 너희도 길마가 말 안 해 줬나 보구만. 사실 이거 길마들 한 자리씩 차지하려고 지금부터 기름 치는 거라니까.”
“그래서 길드원들을?”
“휴, 더러워도 어쩔 수 없지. 제대로 된 사냥터 하나 꽂아 주면 지금 이것도 전부 이득으로 돌아오니까.”
“만약에 초월 연합에 지면요?”
“크, 말도 마라. 그럼 정말 다 짐 싸서 서버 옮겨야 할 판이야. 쟤들 이기는 순간 우린 끝이야. 발을 빼기엔 너무 깊숙하게 들어왔지.”
“그럼 무조건 이겨야겠네요.”
“어, 그래서 말 안 해도 알아서 저리 기잖아. 좀 지휘 계통이 개판이라 그렇지. 너도 알잖아. 지금 얼마나 엉망인지.”
“하하…… 좀 그렇죠.”
음.
우리도 그걸 이용해서 패황 연합 안에 끼어들었으니 딱히 할 말은 없네.
“아, 근데 저 새끼들도 너무 하네. 여기서 구르자마자 바로 거점까지 오라고 하고. 여기서 거기까지 얼마나 먼지 알아?”
“음, 포탈은요?”
“안 돼. 근처에 연결된 포탈은 이미 다 초월 연합 거잖아. 걔들 거점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흠…… 그건 꽤 난감하겠네요.”
패황 연합이 대천사의 무덤으로 가는 거점을 먹은 것은 좋았다.
하지만 초월 연합이 차지하고 있는 거점은 단지 그것 하나에만 국한하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세력을 유지하면서 필드 곳곳에 거점을 세워두었으니까.
한마디로 지금 패황이 차지한 거점은 말 그대로 고립된 것과 다름없었다.
패황이 있는 그 거점이 제일 알짜이긴 한데…….
거기까지 가는 통로가 거의 다 막혔다고 해야 하려나.
거기다 거점끼리는 포탈로 연결이 가능했다.
이건.
거점과 마왕성을 먹으면서 우리가 손수 확인했던 거고.
그때는 중앙의 신성 제국성과 마왕성이 연결된 거긴 한데.
나중에 거점이 늘어나면서 근처에 있는 거점끼리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이건.
같은 아군의 거점이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거리가 가까워야 했고.
마지막으로 그 거점 사이에 다른 거점이 없어야 하는 단점 아닌 단점도 있었다.
반대로 거점 사이의 포탈을 한 번 구축만 해 두면.
그것보다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동 수단은 없었다.
매번 순간이동을 해서 움직여 다닐 게 아니라면.
그리고 마왕성이 중요한 건 이런 이유도 있었다.
중간에 마왕이 거주하는 마왕성이 떡하니 존재하면.
그 주변에 거점이 아무리 많아도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마왕성이 알 박은 상태가 되니까.
그래서 곳곳에 위치한 마왕성 때문에 유저들이 영역을 무한정 늘리는 것도 무리지.
거기다 마왕성 근처에 거점을 만들면.
친히 마왕이 강림하게 된다.
당연히 유저들도 마왕의 눈치를 봐가면서 거점을 세울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형성된 게 지금의 거점 위치들이었다.
그런 거점의 대부분을 세운 건 초월 연합.
결국 이런 구도를 깨지 않으면 패황 연합이 마계에서 제대로 기를 펴보는 건 요원한 일이다.
아무래도 포탈이 없으면.
기동력이 너무 딸려.
적들이 우르르 포탈 타고 나타나는데 이쪽은 뛰어서 가야 하니 상대가 될 리가 있나.
전신이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머리가 좋았다.
미리부터 중요한 지점에 거점을 설치해 어떻게든 버텨냈으니.
다른 길드들은 그걸 하지 못했고.
거기에서부터 차이가 이렇게나 벌어진 셈이었다.
“흠, 잘못하면 중간에 가다가 계속 초월 연합 유저들에게 습격 받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지금 고민이야. 어휴. 다들 그 거점이 좋은 건 아는데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차지할 필요가 있었냐는 말이 계속 나온다니까. 당장 지원 가기도 힘들고. 안 갔다가는 그냥 깨질 게 뻔한데.”
그 말에 슬쩍 재중이 형을 바라보았다.
<윈> 어떻게 생각해요?
<심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야. 패황이 당장은 지킬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말라죽을 위험도 있어.
<윈> 그런데도 먹이를 물었네요.
그 거점은 우리가 패황 연합에게 내놓은 떡밥이었다.
덥썩 문 건 패황의 판단이고.
<심연> 그 녀석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진 않았을걸?
<윈> 흠, 뭔가 작전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패황도 생각 이상으로 똑똑한 편이었다.
적진 한가운데 들어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가진 않았을 테고.
흐음.
녀석이 정말 노리는 게 뭐지?
일단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고레벨 사냥터를 먹는 이점이 있겠고.
반대로 적들이 마음대로 영역을 늘리지 못하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위로 올라갈 사다리를 걷어차는.
그런데 정말 딱 그것만 보고 움직였나?
대외적인 과시 때문에 그랬다면 그것도 이유는 되겠지만.
속을 알 수가 없네…….
그러다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유야 크게 상관없을지도.
둘이 서로 치고 박아주는 게 우리 입장에서는 베스트라.
가급적이면 이 싸움을 길게.
그것도 아주 길게 끌어갈수록 우리에게는 이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패황의 숨통을 한 번 틔워줄 필요가 있겠어.
<윈> 형, 아무래도 길을 뚫어 놔야겠어요.
<심연> 패황에게 좀 더 힘을 실어주자는 거군.
<윈> 네, 패황도 나름 계획은 있겠지만. 지금 돌아가는 걸 보면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지는 않네요.
<심연> 좋아, 그럼 패황이 차지하고 있는 거점으로 가는 길을 열어 보자고.
어차피 가는 길에 들리는 거점을 멀리 우회해서 간다고 하더라도.
녀석들에게 들키는 건 순식간이다.
피해서 가는 건 무리.
결국 돌파해야 하는데…….
고개를 돌려 우리와 함께 걷고 있던 녀석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패황 연합에서 뚫고 있는 거점이 또 있나요?”
이건 순전히 내 추측.
외곽의 네임드 사냥터도 이렇게 방해를 하러 나오는 녀석들이 과연 중간에서 걸리적거리는 거점을 그냥 둘까?
이렇게 길목이 막힌 상태에서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터.
내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지금 대천사의 무덤 쪽 거점으로 가는 중간 길목이 세 군데가 있어.”
<윈> 생각보다 많진 않은데요?
<심연> 제일 가까운 거점이 셋이라는 거야.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특히 대규모로 움직일 때는.
다시 녀석을 보며 물어보았다.
“그럼 세 곳을 전부 공략 중입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사실 한 곳도 뚫긴 어려워서 말이지. 거기다 서로 포탈을 이용해서 거점들을 옮겨 다니니까. 괜히 인원을 분산해 봐야 우리만 개피 본다고.”
“흠, 확실히 그렇군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쪽은 인원을 세 곳으로 나눠서 각각의 거점을 공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공격하는 입장이니까.
반대로 수성 측은 우리가 어디를 공격할지 모르니 세 곳에 인원을 적절히 인원을 분산해야 하는데.
이 비율을 잘못 맞추면 한 곳이 그냥 밀려 버릴 수도 있었다.
막말로 여기서 속임수를 써서 다른 곳으로 가는 척하고 한 곳에 인원을 집중시키면 속절없이 뚫려버릴 테니.
그런데 세 거점이 전부 초월 연합 휘하에 들어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거점의 포탈.
그걸 이용하면 눈 깜짝할 찰나에 하나의 거점으로 모든 병력을 모아버릴 수도 있었다.
포탈을 타고 넘어가 버리면 아주 간단한 문제라.
하지만 패황 쪽은 그렇게는 또 못하지.
서로의 거점 사이가 너무 머니까.
한번 진출 병력 숫자를 정하고 나면 그다음에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절대 안 뚫리겠네요.”
“하하…… 잘 알고 있군. 우리가 아무리 인원을 잘 짜서 공격해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기다리고 있었어. 그것도 딱 우리 숫자를 상회하는 전력으로.”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수성 측은 포탈을 이용해서 마음대로 숫자를 늘였다 줄였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도 뚫을 수가 없지.
패황 연합이 앞서는 건 쪽수인데.
그 쪽수에서 상대도 맞춰 버리면……?
그럼 결국 개개인의 실력에서 앞서는 초월 연합이 압도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그렇게 한두 번씩 발리다 보면 패황 연합의 사기는 아주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흠.
쉽게 들이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네.
몇 번의 전투를 잘못 붙었다가는 그동안 준비한 것들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어.
그러자 재중이 형이 녀석에게 물었다.
“아예 한 곳에 집중해서 뚫어 버리지 그랬습니까? 어차피 분산해서 못 이길 거라면.”
“그게…… 아쉬운 말이지만 또 수뇌부는 그걸 꺼려 하더라니까. 전면전으로 붙었다가 밀리면…….”
그 말을 들은 재중이 형이 내게 귓속말했다.
<심연> 흠, 패황이 생각하기에 정면으로 붙어서는 힘들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윈> 이렇게나 유저를 많이 모아도 힘들다는 건가요?
<심연> 뭐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지금 꺾여 버리는 건 패황 입장에서도 낭패겠지.
전면전은 말 그대로 서로의 전력을 제대로 붙여 보는 순간이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깨지고 싶지는 않다 이거네.
그래서 지금 이리저리 간만 보는 중이라…….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간보기만 이어지면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사이에 대천사의 무덤으로 가는 거점은 점점 메말라 가고.
<심연> 완전 적의 아가리로 들어간 셈이군.
<윈> 네, 할 수 없네요. 우리가 해 주는 수밖에.
곧장 뒤를 돌아보고는 거적대기 3인방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발록, 뱀, 퀸. 가자. 할 일이 생겼어.”
그래.
너희들이 뚫지 못하는 그 거점들.
우리가 확실히 뚫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