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4화 폭주하는 네임드들 (6)
아주 예전에.
딱 한 번 정도 생각해 봤던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현실 가능성이 그다지 없다고 해서 스스로 접어두었고.
당시 재중이 형에게 이야기해 주었을 때는 꽤 흥미롭게 받아들였지만.
그때는 그다지 필요도 없었기에 묻고 넘어갔던 이야기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 녀석들이 존재했다.
바로 네임드에 몸을 던지는.
네임드의 경험치가 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날리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우리가 예전에 생각했던 그거 맞죠?”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역시나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 이거 참, 패황 그 녀석. 이제 보니 아주 골 때리는 놈이었잖아? 설마 저걸 진짜로 하는 미친놈이 있을 줄은 몰랐어.”
골 때리는 놈이라…….
사실 그걸 먼저 생각했던 게 나와 형이거든요.
차마 그 말은 하지 않고 나 역시 웃음을 보였다.
“그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라는 거죠.”
“그건 인정. 패황 이 녀석 정말로 전신과 승부를 걸어볼 셈이군.”
원래는 패황을 그렇게 높게까지는 평가하지 않았었다.
그냥 돈 좀 많은.
시류를 알고 세력을 잘 만다는 녀석 정도?
거기다 본인이 게임에 관심이 많다는 정도까지가 내 평가였다.
하지만 지금 저걸 보고는 그 평가를 확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기기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녀석이야.
그게 비록 같은 편의 손해로 이어질지언정 아군의 손해를 감수하게 만들 정도의 장악력도 있으니 저런 일들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패황의 성향은 지금 눈앞의 녀석들을 경악하기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미친놈들아! 그만 둬!”
얼마나 당황했는지 레이드 팀의 메인 탱커마저 레이드에 손을 놓고는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댔다.
저 상황이 이해가 되는 건.
기껏 죽음에 이르게까지 겨우 체력을 깎아 놓은 뱀파이어 로드를 레벨업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네임드의 레벨업.
이건 체력을 전부 원상태로 돌린다는 뜻이지.
거기다 스킬 쿨 타임도 전부 돌아오고.
심지어 레벨이 올라서 더 강해지기까지 한다.
오죽하면 레이드 할 능력이 없는 레이드 팀들은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다음에 잡는 녀석들에게 완전 민폐라고.
가득이나 잡기 힘든 네임드를.
레벨까지 올려놓으면 그건 정말 최악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남이 잡고 있던 네임드의 레벨을 올려 버리는 건 최악 중에 최악이었고.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짓이라.
그런데 그걸 지금 대놓고 하는 중이었다.
“저러면 못 잡겠죠?”
“어, 아무리 초월 연합 쪽에서 정예로 레이드 팀을 꾸렸다고 해도 두 번이나 레이드를 연속할 정도로 능력이 있진 않아. 지금도 빠듯할 정도로 물약을 챙겨왔을 테니.”
재중이 형 말대로 이미 우리가 오지 전에 뱀파이어 로드를 레이드하면서 가지고 왔던 물약 대부분을 소진했을 터였다.
좀 여유가 있는 유저들도 물론 있긴 하겠지만.
그걸로는 절대 레이드를 지속하지 못하지.
지금 저 메인 탱커가 고함을 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레이드가 망해 버린 것을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거기다 녀석들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앞으로 저런 식으로 계속 방해하겠죠?”
“어, 당분간은 가능한 작전이지. 아직까지는 유저 목숨 몇 던져 주는 걸로 네임드를 레벨업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확실히 저 방법은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네임드는 유저와 마찬가지로 레벨이 오를수록 요구하는 레벨업 경험치가 늘어나니까.
지금이야 저들 몇 명으로 레이드를 방해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당분간이다.
하지만…….
패황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머리를 잘 썼네요. 딱 필요한 시점에.”
지금 저런 식으로 네임드 사냥을 전부 스톱시켜 버리면?
더 이상 초월 쪽에서 네임드 아이템을 추가하지 못하게 된다.
그건 자금 문제도 있겠지만.
전력이 올라가지 못한다는 뜻도 된다.
이 시점에서 패황 연합이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건 역시나 네임드 템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본인 세력의 숫자가 계속 불어난다고 해도 상대측의 전력이 계속 올라가는 건 역시 부담이니.
그리고 이걸로 초월이 단기간에 전력을 늘릴 수 있는 길을 원천 봉쇄해 버렸다.
“어, 어차피 내가 먹지 못하면 초월 니들도 먹지 말라는 거겠지. 그러면 전력도 고정시킬 수 있고.”
애초에 못 먹을 감.
그냥 다 터트려 버린다는 거다.
“여기 말고 다른 네임드도 마찬가지겠죠?”
“어. 레이드를 방해하는 데는 희생할 수 있는 쪽수가 문제지, 애들이 강하고 약하고는 문제없으니까. 다소 경험치 하락이 있어도 그 정도는 연합에서 충분히 회복시켜 줄 거다.”
“그럼 죽어서 떨어뜨리는 드랍템은?”
“아까 너도 봤잖아. 저 녀석들 장비 허접하다는 거. 처음부터 죽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 떨어뜨려도 상관없는 아이템들을 착용하고.”
“플랜 B가 아니라 그냥 저게 플랜 A군요.”
“어, 오히려 제대로 잘 죽었다고 지금쯤 서로 자화자찬하고 있을 걸? 윗녀석들에게 이쁨 듬뿍 받으면서.”
확실히 패황이 좋아하긴 하겠네.
녀석이 노린 작전이 그대로 된 셈이니.
지금 망연자실하게 레벨이 오른 뱀파이어 로드를 보고 있는 레이드 팀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녀석들도 이런 경우는 상정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바득 갈면서 뱀파이어 로드를 보던 녀석들은 결국 어려운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전부…… 후퇴한다…….”
“하지만……! 이거 못 잡고 가면 진짜 엄청 깨질 겁니다. 잘못하다가는 실패 책임을 전부 뒤집어쓸 수도 있다고요.”
“그럼? 어떻게 할래? 당장 저거 잡을 수 있어?”
“……아니죠.”
“그럼 그냥 까라는 대로 까. 상황 설명하면 어떻게든 될 거다.”
결국 후퇴하는 건가?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돌아가서 깨지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이대로 있다가는 뱀파이어 로드에게 전부 죽게 생겼으니.
특히 뱀파이어 로드의 가공할 정도의 흡혈 능력이 문제였다.
공격이 스치기만 해도 체력을 빨아 가는 녀석이라니.
일단 누군가 상처가 나면.
오히려 뱀파이어 로드를 더욱 잡기가 힘들어진다.
처음 레이드 시도를 할 때야 다들 정신 상태가 팔팔했으니 컨트롤도 잘 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쭉 이어진 레이드에 이미 정신력을 상당히 소모한 상태에서 집중력조차 많이 떨어졌을 터.
평소 하지 않던 실수까지도 지금은 염두에 두어야 했다.
반면에 뱀파이어 로드는 다르다.
녀석은 네임드.
애초에 정신력 소모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거기다 가장 팔팔한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했으니.
레이드 하는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지.
그리고 당장 여기서 죽으면……?
지금 레이드 팀을 꾸린 녀석들의 장비는 최상급이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아이템들을 장착하고 온 상태라는 거지.
이 상황에서 죽어서 드랍이라도 하게 되면?
거의 최악을 넘어서 절망 수준이 된다.
금전적인 손해도 무시할 수 없었고.
얻을 것 없이.
잃을 것만 있는 상황.
그러니 후퇴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는 거다.
그런데 모두의 생각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후퇴는 안 됩니다. 이대로 물러날 순 없습니다.”
지금 레이드 팀들은 하나의 길드만이 모여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여러 길드들이 섞여서 소속이 상당히 섞여 있는 상태였다.
급하게 레이드 팀을 조직하다 보니 저렇게 된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러다 보니 서로 생각하는 방향이 많이 달라 보였다.
“지금 명령을 안 듣겠다는 겁니까?”
“명령? 언제부터 네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렸지?”
그 단어에 굉장히 띠껍다는 표정으로 메인 탱커와 대검을 차고 있는 한 딜러 길드원이 대치를 했다.
분명 주도권은 저 메인 탱커에게 있는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방금 끼어든 유저의 길드원들도 상당히 포진해 있는 상황.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모르지. 탱커가 이기면 후퇴. 아니면 다시 레이드 재개고.”
“둘 다 좋진 않겠네요.”
레이드를 다시 한다는 건.
그냥 여기서 다 죽자는 소린데.
그걸 모르고 한 말은 아닐 테고.
한동안 노려보던 딜러 길드원이 곧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주변에 있는 녀석들 먼저 죽이고, 그 시간 동안 거점에서 물약을 가지고 오게 하면 되는 일 아냐?”
“레이드를 다시 하자는 건가?”
“지금 방해하는 녀석들을 싹 죽여 버리면 더 이상 문제 될 건 없잖아?”
이미 둘 사이에 존대는 싹 사라졌네.
“빈손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너나 나나 이 일을 책임져야 해. 그리고 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흐음…….”
딜러 길드원의 제안에 메인 탱커도 마음이 쏠리는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면서 뱀파이어 로드를 쭉 바라보았고.
“좋다. 기한보다 좀 늦어져도 레이드만 확실히 성공하면 아무 문제 없겠지.”
이내 마음을 잡은 듯 메인 탱커가 승낙하자 뒤에 일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물약 조달하는 인원들 추가로 보내달라고 하고. 1, 2조가 뱀파이어 로드를 붙들고 있는 사이, 3조부터 남은 인원들은 전부 흩어져서 이 필드에 들어온 적들을 싹 잡아들인다.”
그 말을 하자마자 바로 사방으로 녀석들이 흩어졌다.
몇몇 뱀파이어 로드를 붙들어 둘 인원들만 남겨놓고.
패황에서 보낸 적들을 전부 잡기 위해서.
그렇게 레이드 팀과 방해하러 온 패황 연합의 유저들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튀어!”
“잡히지 마라!”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뱀파이어 로드에게 죽어.”
패황 연합 유저들은 장비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붙게 되면 거의 필패나 마찬가지지.
그래서 지금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레이드를 방해했다는 측면에서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쉽지 않아 보이네.
“으음, 일이 좀 꼬이는데요?”
“녀석들도 그냥 당할 수만은 없다는 거지.”
패황의 노림수대로라면 지금쯤 초월 연합에서 보낸 레이드 팀은 전부 귀환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오히려 방해를 하기 위해 필드에 들어와 있는 녀석들이 학살당하기만 할 뿐.
작전의 유효성이 없어지지.
“아마 패황도 여기까진 생각 못 했나 보네요.”
“뭐, 다 작전대로 돌아가면 녀석이 서버를 전부 먹었게?”
“하긴.”
일단 우리야 은신으로 숨어 있고 발록 역시 녀석들이 발견하기에는 모습을 숨기는 능력이 너무 좋았다.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들키지는 않는다는 말.
적들도 눈에 보이는 녀석들을 바로 쫓아갔지, 우리를 발견조차 하지 못했다.
가만히 숨어 있기에는 이 좋은 기회가 너무 아까운데?
대부분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에 남아 있는 유저들은 뱀파이어 로드를 억지로 붙들어둔다고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재중이 형이 날 보면서 씨익 웃어보였다.
“가만히 있을 건 아니지?”
“당연한 소리를요.”
우리의 목적도 패황 연합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물론 방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흐음.
제일 좋은 방법은…….
슬쩍 발록을 바라보면서 물어보았다.
“손 좀 빌릴 수 있을까?”
“협조해 달라는 거냐?”
“어, 대천사의 무기의 봉인을 풀려면 필요한 일이거든.”
“흠. 좋다. 뭘 하면 되지?”
“별것 없어. 그냥 저기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하는 녀석들, 좀 건드려 주면 될 것 같은데?”
내 말에 발록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더니 검지를 메인 탱커에게 겨누었다.
화르르륵!!
그리곤 검지에서 생성된 강렬한 화염탄이 빛줄기처럼 뻗어나가 메인 탱커의 등짝을 그대로 태워 버렸다.
즉발로 이 정도 위력이라니.
확실히 네임드는 네임드네.
그사이 생각도 못 했던 일격에 당해 자세가 흐트러진 사이 뱀파이어 로드의 날카로운 손날이 메인 탱커의 가슴을 관통해 버렸다.
“크아악!! 안 돼!!”
당연히 그 상태로 모든 피가 빨려서 그 자리에서 죽음의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뱀파이어 로드에게 죽어 멋들어진 갑옷을 그대로 드랍한 채로.
그렇게 발록이 공격하는 순간.
은신한 상태로 바로 스타트를 끊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갈고리를 던져 그 갑옷을 재빨리 낚아채고는 빠르게 전장을 빠져나왔다.
큭.
임자 없는 아이템은 줍는 사람이 임자지.
자.
다들.
가지고 있는 것들부터 전부 벗어놓고 가라고?